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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gseop Jun 21. 2020

남이 해준 밥

실패가 없는 비밀 레시피

"남이 해준 음식이 제일 그립죠"


새벽부터 분주하게 배우 송일국 씨의 생일상을 준비하다가 한 PD의 질문을 잠결에 대답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내 휴대폰에 느닷없이 문자 메시지가 다다다 들어왔다.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온 것인데, 장난스러운 안부도 있고, 걱정이 깊은 안부도 있었다. 게 중에 한 친구가 직접 사진 찍어 함께 보낸 텔레비전의 장면 덕분에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거무튀튀한 사내가 피곤에 절어서는 남이 해준 음식이 그립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내가 보아도 놀림받기 딱 좋은 행색이었고, 눈물이 삐죽 나올 것 같은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다만 그것이 내 모습이었기에, 쉽게 웃을 수도 자랑처럼 늘어놓지도 못했다. 상반된 두 가지 해석 모두 사실이었기에 반응을 머뭇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르완다라는 나라에 살아온 지 갓 1년이 막 지난 시기였다. 검게 그을린 피부가 타국에서 온 사람과는 쉽게 구별되는 정도가 됐고, 마음으로는 스스로 이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MBC 창사 특별기획으로 만들어진 해외봉사 프로그램에 현지 활동가로 선발되어 연예인과 학생들로 꾸려진 팀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강행군이 지속되던 어느 날 먼 타국 오지에서 생일을 맞게 된 송일국 씨 소식을 듣고 우리는 깜짝 생일파티를 계획했다. 그동안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로 고생했을 몸과 두고 온 고향 생각에 지쳤을 마음을 위로하자고 미역국과 한국식 밥상 한 끼를 선물하자 입을 모았다. 하루 전날 일정이 모두 끝난 시각에 한국에서 공수해온 반조리 식품과 건조된 미역과 나물, 통조림 보관 재료들을 미리 확인하고 손질했다. 조금 늦게 잠을 청했고 아침이 빠르게 찾아왔다. 꼭두새벽 비밀스럽게 일어난 우리들에게 PD가 놓칠세라 빠르게 다가왔다.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게 뭔가요? 한국을 생각하면 그리운 게 있나요?"

"남이 해준 밥... 남이 해준 음식이 제일 그립죠"


원하는 대답을 위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덧붙인 질문이었는데, 나는 방송의 의도와는 다소 무관하게 그 순간에 충실한 아주 솔직한 대답을 내뱉고 만 것이다. 새벽 댓바람부터 송일국 씨의 미역국을 끓여줄 만큼 우리의 친분이 두텁지 않을뿐더러 그런 박애주의를 동기삼아 이 땅에 온 것도 아니었다고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따뜻한 미역국과 (촬영팀이 공수해온) 한국 반찬들로 차려진 소박하지만 감동이 있는 이 작은 생일상이 그리웠을 다른 동료들 얼굴이 먼저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아주 잠시 '내 무방비한 마음이 마치 송일국 씨를 질투하듯 화면에 비친진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충분히 중의적인 대답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리고 내심 만족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휙 돌아서 잊어버린 일이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고 답장 못 한 메시지들이 쌓여있던 그 날, 사건 당시의 실제 생각이나 기분과는 무관하게 주변인들의 마음이 담긴 메시지들은 나를 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메시지들의 본론은 주로 자신이 만든 반찬을 보내주고 싶다거나, 한국에 오면 꼭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약속, 별안간 도대체 거기서 뭐 하고 있냐고 심문하는 내용이었지만 몇몇의 메시지는 그을린 피부와 꾀죄죄한 행색이나 흙먼지 날리는 배경은 뒤로하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집중하고 살펴주던 다감한 말들이 있었다. 그제야 (공중파로) 흘려보낸 내 말의 의미를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그리웠던 것이 과연 '남'인지 '음식'인지 혹 그것이 정말 음식이라면, '누구의 음식'인지 '어떤 음식'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남이 해준 음식은 다 맛있다. 가구도 없이 돗자리 깔고 사는 동료의 자취 공간에서 요리 경력 몇 개월도 안 되는 친구와 함께 먹는 반쪽짜리 혼혈 한식들도 예외가 아니다. 현지에서 구매한 크기도 모양도 다른 채소들로 흉내 낸 무침이나 볶음류들. 저렴한 고기를 잔뜩 쌓아두고 귀하게 공수해온 한국 장을 넣은 구이류들. 특히 간장과 고추장을 무기로 한 고기 요리들은 찰기 하나 없이 빼빼 마르고 건조하게 흩날리는 쌀밥의 식감마저 상쇄시킨다. 양배추는 기본이고 파파야 같은 과일이나 딱딱한 채소들을 얇게 저며서 김치를 만들어도, 그런 것들이 초대받은 식탁 위에 오르면 마치 미슐랭 별점이라도 받은 레스토랑의 색다른 시도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손맛 그리운 사람들에게 정성이 주는 힘은 언제나 놀랍다. 편리한 기계문명과 멀리 떨어져 아프리카 오지가 허락한 이 원시생활은 손맛이 불가피했으므로 어쩌면 가장 한국적이었을지 모른다. 


하기사 어떠한 노동력도 제공하지 않고 받아먹는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서비스' 니 작은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기쁨이 있고, 또 우리가 워낙 공짜(서비스)를 좋아하는 민족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값을 지불한다고 해서 남이 해준 음식만의 고유의 맛이 사라지는 것은 또 아니다. 바깥 음식들은 너무 짜거나 달고, 어딘지 염치없는 조미료 맛만 도드라지거나 과학의 힘을 빌린 괴팍하게 강조된 맛들이 혀를 속이고 일방적으로 뇌를 자극하기 일쑤지만 우리는 더욱 열성으로 매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길 원한다. 조리할 시간이 없다거나, 소위 싱글 이코노미에 맞는, 말하자면 식재료보다 한 끼 식사가 싸다는 논리, 더러는 집밥보다 나은 맛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현상을 볼 때면 어떤 결핍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저렴한 한상차림 가게를 빈번히 가도 맛이 없다고 컴플레인하는 사람은 잘 없으면서도, 직원의 정 없는 모습이나 인색한 태도에 더러는 성마른 지적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고향 음식인 '한식'을 떠올리면 생각 회로는 곧장 엄마나 할머니로 향한다. 그들의 헌신과 마르지 않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백반집에서도 인정 넘치는 서비스를 기대하게 된 걸까. 그놈의 덤과 각종 써-비스가 외식산업 전반의 전략이 된 게 혹시 그 때문일까. 정 많은 사장님이 조금만 잘 대해줘도 금세 손님의 이모가 되는 이유가 아닐까. 가만히 보니 우리가 사고파는 한국 음식들은 그 만듦새부터가 서양의 것처럼 계량되고 정량화되지 못하고, 싼 값에 늘 제 양을 초과하는 성질이 있다. 모두가 집밥이 그립다며 '어머니의 된장국'같은 가삿말을 흥얼흥얼 하지만 정말 모든 어머니의 된장국이 맛있었을까? 아마 제 자식들 먹여 살리는 부모의 푸짐한 인심이 고팠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가 담긴 메시지들의 미뤄둔 답장을 오늘에서야 한다. 그 시절 나는 결코 결핍하지 않았다. 나도 한때는 할미손이 약손이고 엄마 밥이 약밥인 줄로만 알았으나, 울 할미 20년 전 가시고, 울 엄마 할미 곁으로 간지 10년이지만 나는 더없이 건강했다. 그 당시 내가 먹은 된장국에는 커다란 멸치가 대가리를 치켜뜨고 눈을 맞추고, 시간차로 브로콜리가 동동 떠오르기도 했지만 맛도 있었고 영양가는 두배로 좋겠구나 싶었던 기억만 남았다. 제육볶음밖에 할 줄 모르던 친구 집에서 1박 2일이라도 보내는 날에는 입가에 고추장 마를 날 없었지만 (문자 그대로) 매 순간 다른 맛이 나는 바람에 지루할 틈 없었다. 매번 음식으로 골탕을 먹는 우리들 모습이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두루미들 같았지만 초대는 끊임이 없었다. 그리고 간혹 계절처럼 들이닥치는 허한 마음에 '해줄게', '밥 사주 꾸마' 하고 보내준 그 메시지들 곱씹으며 달래길 꼬박 2년 반이었다.    


그 시절 정()과 성()이 넘쳤던, 때로는 지나치게 솔직했던 식탁들은 그 어느 빼어난 식탁보다 기억에 남아있다. 같은 이유에서였을까 심드렁한 마음을 제쳐두고 안쓰러운 마음을 재료 삼아 차려진 자신의 생일상을 받아 든 송일국 씨는 밥을 우걱우걱 먹다 말고 눈물을 조금 흘린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카메라 뒤편에 서서 '참 절묘하다'는 중의적인 감탄을 떠올렸다. 송일국 씨뿐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가 해준 미역국이 투 쁠러스 한우가 들어갔든 명품 조개가 들어갔든지 간에 먹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은 정말 드물 것이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열정적인 송일국 씨가 악수를 청하며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조리하셨어요' 물어왔고, 정말 특별할 것 없던 그 밥상을 누구도 잘 설명하지 못해서 어버버 대답하는 바람에 그 장면은 방송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질문에는 무어라 답해주면 좋았을까. 


한국음식은 그 맛과 조리방식을 구체화하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모두 입을 모은다. 손맛이나 정성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0년 전 갑작스럽게 암을 진단받은 엄마가 떠나고 나서는 입맛에 맞는 김치가 없기에 더 이상 김치를 잘 먹지 않는다. 엄마와 같은 지방의 내로라하는 반찬가게나 손맛 좋기로 유명한 사람들의 김치 또는 직접 만들어보려는 몇 년간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 김치의 비결을 채 알아내지 못해 고통받았던 기억이 작은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생각이 났다며 멀리서 보내주신 친구 어머니의 김치가 여전히 냉장고에 가득 있다. 인삼과 생굴을 잔뜩 넣은 이 귀한 (도무지 내 입맛에는 맞지 않는) 김치를 먹을 때면 내 엄마의 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으나 그 맛이 자꾸 생각나 눈시울이 맵다. 생마늘 향이 강한 이 김치는 정말 맵다. 


김치 담글 때면 간은 꼭 내입으로 본다고 쭉 찢은 김치를 들고 쫓아와서는 밥 없이 괴롭게 씹어대는 내 얼굴 면밀히 살펴보고 간을 조정하곤 하던 엄마의 악취미가 기억났다. 어쩌면 나를 위한 감동적인 맛이라는 걸 내 손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감히 몸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건강하게 먹여 살리고 늘 감동을 주는 '남이 해준 음식'이라는 비밀 레시피가 과연 이것이 아닐까


 2019년 10월, 문경 © Yolanta C. S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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