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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gseop Apr 09. 2024

파리는 왜 비 올 때 더 아름다울까


2024년 1월 1일부터 오늘까지 파리는 220mm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일간지 르 파리지앵(Le Parisien)은 파리에서 40년을 살아온 한 시민이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비가 오는 것은 처음이라며 불평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시민들의 참을성이 바닥날 만했다. 지난 3월은 평소보다 4배에서 최대 6배에 달하는 기록적인 양의 비가 전국적으로 내렸으며, 2월의 일조량은 겨우 38시간에 불과했다. 이례적인 날씨 변화가 기후 변화와 같은 환경 문제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쌓여가는 빨랫감을 감당하기 버겁다.

해외살이를 처음 시작하면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계절과 그에 따른 날씨 변화를 이겨내는 법을 몸으로 느끼고 스스로 배운다. 지역의 기후 특성은 의식주와 같은 기초적인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파리에 살면서 프랑스인들에게 어깨너머로 처음 배운 것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일광욕과 비가 와도 우산을 사용하지 않는 습관이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해가 나면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탈의하거나, 한겨울에도 테라스를 고집했다. 또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가거나, 빗길 위를 자전거로 미끄러져 지나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우산을 깜빡한 것 같지 않았다. 이런 광경에 경계심을 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도시는 그만의 독특한 이야기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도시는 미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그들을 끌어들인다. 메시지의 수신자는 머무는 동안 한 도시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도 탐구하는 기회를 얻는다. 런던이나 뉴욕 같은 대도시에 유독 야심 찬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파리는-런던의 절반 크기인 뉴욕보다도 7배나 작지만-마치 15세기의 피렌체처럼 예술가와 철학가들을 매혹시키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만약 당신이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대사처럼, “파리는 비 올 때 가장 아름답다.”라고 느낀다면,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감상적이고 멜랑콜리(우울)한 파리의 메시지를 받은 것일 수 있다.

비에 젖은 파리의 거리, 광장, 강변, 다리를 오가다 보면 기분 좋게 취한 것처럼 흥이 난다. 길을 잃은 사람처럼 좁다란 돌바닥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결국 이 도시의 셀 수 없이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중 하나를 마주칠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어떤 작품을 통해 마치 과거로 여행하는 몽환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괜한 청승을 떠는 것이 아니냐고? “우울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을 기대할 수 없고 모든 창조는 이것으로부터 연유한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한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보에도 없는 봄비가 내린다. 테라스가 있는 아무 모퉁이 카페에 들어가 방수후드를 벗고 자리를 잡았다. 글을 쓰거나, 사색에 잠기거나,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나는 가만히 앉아 한산해진 파리의 거리를 바라본다. 비가 만들어 내는 잔잔하고 경쾌한 리듬에 눈과 귀가 어느새 동화된다. 대서양에 인접한 파리는 해양성 기후 특성상 비의 형태가 실제로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집중 호우보다는 이슬비나 보슬비가 내리고, 매서운 비가 오는가 싶다가도 금세 하늘이 화창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내리는 비도 그랬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섬세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가볍지만 끈기 있는 형태로 변하고, 짧고 강렬한 빗줄기가 갑자기 시작되었다가 멎는다. 이제 석조 건물에 맺힌 이슬자국과 바닥 군데군데에 물웅덩이만 남아있다. 단조로 구성된 자연의 즉흥적인 연주가 잠시 멈추고 나니 파리의 시간도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것만 같다. 한 아이가 웅덩이 위로 장화 신은 발을 사정없이 구르며 인터미션의 정적을 깼다. 뒤따라오던 부모도 발을 구르며 아이를 따라 한다. 프랑스인은 어른도 아이처럼 천진하고 유치한 면이 있다. 아마도 그것이 프랑스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비결일 것이다.



*파리의 한인 주간지 '파리광장'에 연재중인 글입니다.(발행일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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