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5일 파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노트르담 대성당은 대규모 화재를 겪었다. 영혼의 피난처를 휘감은 격렬한 화마는 전 세계인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10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날만큼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숲(La forêt)이라는 별칭이 야속하게 들렸다. 방대한 양의 목재가 사용된 지붕이 먼저 붕괴되고, 이어 수랑과 본당이 교차하는 지점 위에 높이 솟은 첨탑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신의 가호였을까? 인명피해 소식은 없었다. 새벽 4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고요한 파리의 스카이라인 위로 창조자이자 파괴자가 있는 곳을 가리키던 이정표가 사라지고 나니 도시는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암담했다. 다행히 불길이 다른 종탑이나 주변부로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미 800년의 시간 중 일부를 상실한 뒤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곧장 대국민 연설을 통해 “우리 삶의 중심지”가 5년 안에 수리될 것이며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복원될 것을 약속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새로운 기술과 시대에 맞는 디자인 공모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유리와 강철로 만든 화려한 디자인들이 SNS 피드를 가득 채웠다. 첨탑 재현을 두고 역사적 복원과 ‘현대적 재창조’ 사이의 균형에 대한 온 국민의 긴 토론이 이어졌다. 덕분에 무너진 첨탑이 창조적 복원을 주장했던 건축가 비올레 르 뒥(Viollet-le-Duc)에 의해서 이미 19세기에 한 번 복원된 것이었다는 점 외에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여럿 있었다. 노후화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18세기말부터 철거 위기가 있었으며, 이 시기에 실제로 많은 조각과 장식이 종교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프랑스가 세속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대성당은 자연스럽게 종교적 기능을 버리고, 계몽주의와 이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심한 훼손과 관리 부족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였던 대성당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낭만주의 시대를 연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였다. 1831년에 그는 옛 건축물에 대한 사랑으로, 대성당과 동명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를 썼다. 노트르담이 성당지기 꼽추 콰지모도를 세상과 연결하고 집시 무용수 에스메랄다의 유일한 안식처로 등장하기 전까지, 앞장서서 이 장소를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수십 장에 걸친 건축물의 세밀한 묘사로 시작된다. 위고의 눈에 비친 노트르담 대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투과한 빛처럼 신비롭고 경이롭다. 그는 풍화되고 손상입은 곳곳을 이 건축물이 겪은 시간의 흐름과 역사적 증거로 제시하며 그곳이 마치 물리적 장소가 아닌 하나의 살아있는 인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건축물은 인간의 가장 거대한 기록물”이라고 위고는 말했다. 출간 직후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은 그의 소설은 오래된 건물의 문화적 리노베이션이었다. 노트르담은 더 이상 종교적 기념물도, 건축적 기념물도 아닌, 시민의 기념물이 되었다. 그 이름처럼 ‘우리 모두의 여인(Notre dame)’이 된 것이다.
화재로부터 어느덧 5년이 지났다. 나는 센강을 가로질러 시테섬의 대성당 서쪽 정문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최후 심판의 문 앞의 공사장 가림막과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기중기의 위협 때문에 여느 때처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강을 건너 라탱지구 골목길을 들어가기 직전, 불길에 스러졌던 첨탑이, 내가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 다시 세워진 것을 보았다. 잠시 강변을 따라 걸으며 복원 논쟁의 결론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변함없이 엄숙한 분위기와 기괴한 장식들을 오늘따라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문득 입 밖으로 삐져나온 내 짧은 감탄사에,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를 노인이 “역시 그렇죠?(n’est ce pas?)” 하고 대답한다.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사랑할만한 오래된 것들이 있는 프랑스는 그런 점이 즐겁다.
*파리의 한인 주간지 '파리광장'에 연재중인 글입니다.(발행일 2024-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