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세 달째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캐나다살이
한창 추울 때보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고 해도 길어졌다. 이곳에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핑계로 더이상 날씨를 댈 수 없는 것일까 하고 지난 주 며칠 동안 생각했다. 학원에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그들 모두 이제 갓 도착한 지 3일 혹은 일주일 남짓 된 사람들이라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답답하기까지 했을 정도. 모두 하는 얘기가 이랬다. "벤쿠버가 레인쿠버라고 듣고 왔는데 날씨 엄청 맑은데요?" 억울하다고. 그게 아니라고.
지난 주를 끝으로 학원 생활 두 번째 달을 마무리하였고 이곳 생활도 이제 세 달째에 접어든다. 나는 또 한 번의 방학을 맞았고 이곳엔 다시 또 한 번 폭설에 가까운 눈이 왔다. 이제 밴쿠버의 겨울이 얼마나 짖궂은지 그들 모두 깨달았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삶의 모양이 한 달 단위로 반복되고 있다.
대규모 학생들의 졸업이 끝나고도 나에겐 한 주가 더 남아서 지난 주가 공식적으로 이 학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였다. 긴장은 풀릴 대로 풀렸지만 여전히 해야 하는 숙제를 붙들어잡고 있자니 하루가 훨씬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도 몸은 피곤한 것 같은데 자려고 해도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침대에서 2-3시간 뒤척인 후에야 간신히 잠에 들 수 있었고, 꼭 2-3번은 잠에서 깨서 시계를 보고 다시 잠드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낯선 곳에서 이만큼 아늑한 보금자리가 또 어디 있겠냐마는 한동안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오죽하면 '불면증'이라는 단어까지 검색해보았다.
사실 걱정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니지.
또 한번 약간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지난번처럼 이곳을 다시 낯설게 느끼게 될까봐 겁이 나기도 하고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가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같이 으쌰으쌰하며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신경이 좀 쓰이는 게 아니니.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더니 걱정이 됐는지 룸메이트가 여기 온 지 얼마나 지났냐고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이제 거의 세 달쯤 됐다고 하니 자신도 그때쯤 그랬던 적이 있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끼워 맞춘 듯 '3,6,9'라는 숫자에 걸리는 시점에 찾아온다는 고비가 생각난다. 아마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그런 거겠지.
그래도 이번에 쉬는 시간이 어느정도 달가운 면도 있다. 매일 신문 읽기에 발표에 쫓겨 하루를 보내다 보니 '생각할 거리', '찾아볼 거리', '공부할 거리'로 메모만 해둔 키워드가 한가득이다. 미루고 있었던 것들을 좀 생각해 보아야겠다. 버킷리스트도 다시 한 번 뒤적거리고 하기로 했던 것 중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가서 또다시 살아가려면 언제쯤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지.
책을 좀 많이 읽어야겠다. 고이 모셔온 이북리더기가 불쌍할 지경이다. 영어의 실력과는 관계없이 사회 문제에 누구보다도 깊게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나라의 학생들을 보면서, 그리고 박학다식한 영어 선생님을 보면서, 단순 암기과목의 성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지식과 지혜가 부러워졌다. 아마 어려서부터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생각도 좀더 다각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 주에 내가 통 잠을 못 잔다고 말하니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신 선생님께서 아이디어 하나로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셨다. 네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뭐냐고. 걱정거리를 꽁꽁 싸매고 있지 말고 조금 떨어져서 문제를 바라보라고. 선생님, 제가 그거 모르는 게 아닌데요. 그건 극히 일부의 성공 케이스잖아요. 그리고 그들이 겪은 사회와 내가 겪어야 할 사회가 같나요? 10대 청소년이 아닌 이상 이렇게 회의적인 반응이 먼저 튀어나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어쩌면 정말로 지금 내게 필요한 게 그런 류의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