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되는 중이라고 믿는 캐나다살이
스마트폰에 찍어둔 사진을 보니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캐나다에 와서 벌써 2번의 이사를 했고 2주의 수업을 들었고 혼자 가기에 적합한 패스트푸드 가게만 전전하다 햄버거 맛집을 발견하기도 하고(벌써 네 번이나 갔고) 이곳의 스타벅스 회원이 되어 한국보다 더 큰 벤티 사이즈의 커피를 무료로 먹기도 하고 요가 수업도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옷가게에서 옷을 몇 번이나 입어보고 내려놓고 다시 나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상적인 일들과 한국에서는 불가능했을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이 한데 뒤섞인 채 20여일이 지났다.
적응을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건 20여일 전보다는 일주일 전이, 일주일 전보다는 지금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움 받을 이 하나 없이 외지에서 지내보니 최소한의 수준으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의식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다. 특히 그중 '주거생활'에 대한 것. 몸소 느껴보지 않고는 모른다. 허리를 펼 수 없는 호스텔 1층침대에서의 사흘보다 단기숙소에서의 보름 남짓이 숨통을 트이게 했고, 그 보름 남짓보다 본 숙소(!)에서의 사흘 남짓이 질적으로 훨씬 높은 수준의 삶을 유지하게 한다. 우선 짐을 풀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감사하다. 압축팩 속 찌그러져 있던 옷가지들이 20여일 만에 빛을 봄과 동시에 나 또한 2-3벌로 돌려 입던 옷 이외의 옷을 꺼내면서 빛을 보는 기분이랄까.
감사하게도 이사한 집의 약 9할이 마음에 든다. 이전 주인이 10달 간 살았던 집이라 당장 짐을 싸서 나가야 할 정도의 집은 아니라는 점, 또 약 5분 간의 인사 후 짧게 스쳐 지나간 전 주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따스했다. 좋은 분인 것 같아 하우스메이트의 관계가 아니라 전 입주자와 현 입주자의 관계로 만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방은 오히려 더 작아도 될 뻔 했다 싶을 만큼 널찍하다. 그로 인해 살짝 춥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 아주 많이 전전긍긍하고 그 사이에 또 금전적인 문제, 관계에 대한 문제로 인해 엄청난 회의감을 느꼈지만 결국엔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서 이 집과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지난 스트레스쯤은 잊을 수 있다. 드.디.어.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어제는 다이소스러운 가게에 가서 연분홍색 목욕바구니를 사고 화장실에 내 목욕용품을 채워 넣었는데 그 사소한 일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몸이 아주 힘들다. 아침마다 억지로 일어나서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간신히, 아주 간신히, 즐거운 기분을 만들어 놓기 위해 노력하고 비바람을 뚫으며 학원에 간다. 그러나 막상 학원에서 느끼는 것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것은 '아, 이게 바로 뿌듯함이라는 거구나.'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수업시간이 짧고 과제가 빡빡하지 않아서 이정도 수준으로는 몇 달을 들어도 영어실력이 고만고만할 것 같은 점이 아쉽다. 다음달에는 좀더 빡빡한 수업을 찾아서 막 몰아붙여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오랜만의 생산성 있는 삶이다.
수업의 양이나 강도와는 별개로 선생님의 강의력과 수업의 질은 꽤나 만족스럽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ESL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궁금했는데 사실 특별한 것은 없다. 대학교 필수교양 때 외국인 교수가 진행한 영어수업과 굉장히 비슷하다. 그때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등록금이 생각보다는 그렇게 매겨질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아주 약간 납득하게 된다고나 할까.(그래도 말도 안되게 비싸지만) 관용적인 표현을 배우고 써먹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외에도 소소하게 문법을 배우지만 그때의 문법은 모두 실제 스피킹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들을 배우고 적용하는 것들이다.
2주 간의 ESL 수업을 들은 후 드는 생각이지만 어학원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한국인 비율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내가 듣는 수업에서 한국인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음) 지금 듣는 수업에는 16명 정도의 학생이 있고 그중 한국인이 3명, 그외 아시아인이 절반, 나머지 절반이 남미쪽 학생들이라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은 반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게 딱히 큰 장점으로 작용하느냐? 그건 아닌 것 같다. 한국인이 많아도 어차피 그들과 한국어로 대화할 일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차피 서로 영어가 서툰 사람과 대화하는 건데 큰 차이가 있을까? (-> 세 달 지나고 살짝 수정하는 후기. 말하는 방식이나 문화가 동일한 한국인들 간에는 아무리 영어를 쓰더라도 눈치로 알아듣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외국인들과 대화할 때보다 소통이 훨씬 수월하다. 그러니 영어 실력 향상이라는 목적이 있다면 의지를 갖고 다른 외국인과도 대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늘 같은 자리에 앉다 보니 내 주변 그룹에는 늘 남미학생들이 모여있는데, 그들이 유독 표현하고 말하는 쪽에 강하다 보니 같이 대화하면 내가 에너지에 약간 눌린다. 다만 그들을 보며 새로운 것들을 많이 느낀다. 교육을 어떻게 받아왔길래 그리고 영어를 어떻게 배우길래 저렇게 활기차고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저들처럼 표현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문법 실력 절반은 포기해도 좋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