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저 남자 돈 많겠지?"
한 중년 남성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팔짱에 낀 채 걸어가자 뭇 남성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시선이 쏠림과 동시에 남성은 자동적으로 '검증'되고 '무언가'를 지닌 대단한 놈으로 인식된다. 그 무언가는 돈이 될 수도 권력, 외모 혹은 끝내주는 잠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중에 하나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대중이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설령 두 남녀가 내면적 동기로 서로에게 이끌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관찰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사랑에서 이유를 찾고 두 사람의 관계를 순식간에 한두 단어로 정의해버린다.
심리학에서는 사랑을 6가지로 이야기한다.
헌신적 사랑 (Agape)
낭만적 사랑 (Eros)
유희적 사랑 (Ludus)
동료애적 사랑 (Storge)
집착적 사랑 (Mania)
그리고 논리적 사랑 (Pragma)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나는 Pragma를 논리적 사랑이 아닌 '거래적 사랑'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것이 더 실질은 잘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인간끼리의 교류는 대부분 등가교환의 법칙 아래 이루어지고 사랑도 그 룰에 예외가 되지 못한다. 다만 사랑에서 만큼은 그 거래적 속성이 아주 은밀하게 (혹은 무의식 중에) 나타날 뿐이다.
결별 후 사랑에 실패한 일방 당사자가 분을 참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해코지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을 주었는데 돌려받지 못했고 이것을 '불공정거래'로 인한 '손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특정 성별, 나이, 계층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노량진에 가면 고시에 합격한 여자친구가 이젠 신분이 달라졌다고 착각한 나머지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랑은 그 속성이 다분히 거래적이다.
이러한 거래적 속성은 최근 미국 사회에서 대두된 슈가대디 제도로 엿볼 수 있다. 슈가대디란 만남을 조건으로 젊은 여성에게 금전적 지원(주로 학자금)을 제공하는 중년 남자를 의미하는 미국 내 신조어이다. 많은 여대생들이 매칭 서비스를 제공하는 해당 사이트를 이용 중이고 그 수가 미국 내에서만 190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 관계에서 섹스는 암묵적으로 합의되지만 강요되는 사항은 아니고 한 여성이 동시에 여러 슈가대디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많은 여대생들이 이 관계를 통해 단순히 성관계뿐 아니라 함께 여행도 다니고 문화활동을 하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어느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카샤니은 올봄 빚없이 학업을 마친 후 그 공을 그녀의 슈가대디에게 돌린다.
"로스쿨을 졸업하는 많은 동기들이 수십만 달러의 빚을 지고 사회로 나가는 것이 안타깝다. 슈가대디와 나는 서로를 베스트프렌드로 여기며 아껴준다."
이러한 '예찬론'을 펼쳤다는 이유로 카샤니는 SNS상으로 수많은 질타를 받아야 했다. 국내에도 슈가대디 제도가 알려지면서 일각에서는 이를 매춘으로 폄하하고 그 도덕성을 비난하는 등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슈가대디라는 제도를 중립적인 거래행위로 볼 것이냐 부도덕한 사회악으로 볼 것이냐. 판단은 개개인 도덕적 가치관의 몫이지만 그 본질을 명확히 봐야 한다. 슈가대디의 본질은 행복 추구를 위한 개인 자유의 향유에 있다. 개인의 신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자유를 추구하는 데 핵심적인 기준이자 목적이 된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사로잡혀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인간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니체라면 카샤니를 향한 누리꾼들의 힐난 그리고 그들의 맹목적인 도덕규범을 정신병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어떻게 도덕적인 사람으로 살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야말로 도덕적인 사람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설령 슈가대디가 정말 매춘행위에 불과하고 어떤 방식으로도 합리화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네 연애는 과연 이와 다를까. '무언가'를 지닌 그 대단한 놈은 슈가대디와 무엇이 다르며 이별을 고하던 노량진의 커플은 또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알 수 없는 타인의 관계를 한두 단어로 쉽사리 '거래'로 정의하던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가. 조금 더 노골적이라고 해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섹스의 고대 영어 동의어는 'to know'라고 한다.
흔히들 섹스를 성적 행위로만 생각하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탐닉할 때 알고자 하는 것은 그녀의 허벅지와 발목, 목의 느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의 생각이나 즐겨 입는 옷, 독서 취향, 성격, 친구관계, 샤워하고 나왔을 때의 향기까지도 궁금한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수많은 성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문명이라고 말한다. 문명의 발달에 따라 사회가 형성되며 도덕적 가치가 확립되었고 이제는 고매해져버린 인류가 섹스를 향한 정욕을 온당치 못하게 대우한다. '로맨틱'은 우대받지만 '에로틱'은 천대받는다.
인류가 더욱 발전한다면 에로틱의 기준도, 에로틱을 향한 지금까지의 부당대우도 바뀔 수 있다. 어쩌면 완전한 해방을 경험키엔 인류가 아직 충분히 진보하지 못했는 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미래의 포르노는 더 이상 논리없는 전개와 동물적인 피스톤 움직임만 그리지 않고 지성, 친절한, 겸손과 같은 한 차원 높은 감성을 시나리오에 담아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고매한 인간이 되느냐, 섹스만 밝히는 동물적인 존재로 남느냐의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놓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