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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Jun 18. 2024

마음대로 아플 수 있는 권리

휴직의 좋은 점 셋



‘광화문 동백이’.

광화문에서 근무하던 시절 내가 나 자신에게 붙였던 별명이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인 ‘동백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1년 365일 가게 문을 열어 장사를 하는 캐릭터였는데, 내가 딱 그 짝이었기 때문이다. 연중에 불의의 질병에 걸려서 안 그래도 몇 개 없는 연차를 홀라당 다 써버리고 말아서 그 해에는 10월부터 정말 연차가 단 한 개도 남지 않았었다.



말 그대로 '광화문 동백이'가 되어 12월 31일까지 풀근무를 해야 했다. 남들 다 노는 연말 휴가,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다 딴 나라 얘기였고, 놀기 위한 휴가는커녕 쉴 수 없기에 아파도 안 되는 세 달이었다. 흑.



그 3개월이 조금 빡세긴 했지만 그 외의 날들도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전년도를 매일매일 출석, 즉 만근한 근로자에게 주어지는 올해의 기본 휴가 15개. 근속연수에 따라 개인별로 차이가 있지만 20년 근속한 선배 아니고서는 뭐 대동소이한 열댓 개의 ‘돈 받고 쉬는’ 휴가.



연차가 쌓이다 보면, 전날 클럽 가고 다음날 늦잠 자기 위해 쓰는 ‘단순 유희용 휴가’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이른바 ‘병원용 휴가’가 열댓 개 휴가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대학병원 같은 덴, 예약도 어려울뿐더러 평일 내가 일하는 시간에만 진료를 하니까.



그래서 우리 직장인들은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한다. 365일 중에 최대 열댓 번만 아파야 한다고나 할까. 중요한 건 휴가가 남았다고 한들, 맘대로 쓰지도 못한다는 거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중요한 주간회의 시간 피하고, 고객사 미팅 피하고, 임원 보고 일정 피하다 보면 아플 수가 없다.



아 이번주에 중요한 회의 다 끝나니까 다음 주쯤 아파볼까? 못한다는 거다.



이마에서 열이 펄펄 나도 일단 출근해서 할 일은 하고, 흰 죽 먹고 화장실 왔다 갔다 하면서도 잠시 병원 다녀올 짬이 안 나서 병을 키운다. 오후에 시간 나면 갔다 와야지.. 하다가 그놈의 ‘왜 이제 오셨어요’ 소리 들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휴직을 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서 안 아플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몸도 연식이 좀 되다 보니 스트레스 안 받고 하루의 유일한 고민이 저녁 메뉴여도 아플 땐 아프더라. 몸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지 만 하루. 오늘 동네 내과를 찾았다. 만 하루 기다릴게 아니라 아픈 것 같다고 느끼자마자 갔었어야 하는데, 십여 년이 넘게 이어진 ‘일단 참자’ 병은 쉽게 고칠 수가 없었다.



쓸데없이 날씨가 엄청 좋은 5월의 평일 오후 2시. 출근할 때는 신을 수 없는 백수 전용 크록스를 신고 느적느적 걸어 병원에 갔는데, 대기자가 너무 많았다(병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아픈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동백이 시절이었으면 못 기다리고 다시 사무실에 복귀해야 하지만, ‘30분 대기시간 발생하세요’ 안내 멘트를 듣고 여유 있게 챙겨간 책을 꺼냈다.(유럽도시기행 1, 유시민 저, TMI)








나는 오늘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 ‘마음대로’ 아파봤다.



내 의지대로 아파봤고, 때맞춰 병원에 가서 내 증상에 맞는 약을 받아왔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약봉지를 받아 들고 집으로 오는 길에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들더라. 회의, 미팅, 보고, 남은 연차 개수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아팠다.



회사원이었을 때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휴직한 지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괜시리 빈 하늘이나 한 번 올려다봤다.




(꼬질꼬질한) 크록스를 신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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