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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Aug 30. 2021

이별을 위한 마지막 인사

만남에 있어서 마지막은 항상 중요하다. 나는 늘 관계의 마무리를 잘 매듭짓기 위해 노력했다. 퇴사를 할 때에도 싸우거나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에도 모두 작은 편지를 쓰고 핸드크림을 돌려 웃으며 안녕을 했다. 2년의 극단 활동이 연출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나는 그 감정과는 별개로 그 간의 감사함을 담아 스승의 날에 카드와 꽃을 보냈다. 모든 인연을 그렇게 대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할아버지와는 예상치 못한 이별로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실 어렴풋이 이별의 신호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귀찮다는 핑계로 다음 주에 찾아뵌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내가 할아버지를 마주한 건 이미 심정지가 와서 심폐소생술로 겨우 숨을 살려 내고, 의식은 사라져 버린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괴팍한 성미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지만, 첫 손자인 나에게는 어릴 때 당신의 머리 끄덩이를 잡고 놀게 해 주실 만큼 나를 아껴 주시던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도 해드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하루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고 상상을 해보았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상상이다. 그런 기적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할아버지의 인생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할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꼭 가지고 싶다.


먼저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할아버지와 나의 추억을 내 어린 시절부터 쭉 돌아보고 싶다. 어릴 때 밥상머리에서 밥풀 한 톨도 남기지 않도록 훈육하신 모습, 다리 떨면 복 나간다며 발을 때리시던 모습. 초등학생 시절,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삼진당’ 한약방에 가면 나와 동생을 위해 한약방 앞 ‘원 피자’ 한 판을 시켜 주시던 모습. 한약재를 신기해하면 감초를 꺼내서 ‘야~ 한 번 먹어 봐라~’ 하시던 모습. 배가 아플 때 손을 따주시던 모습, 맹장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에 들어갈 때 멀리서 찾아와 내 손을 잡아 주시던 모습 등을 떠올리며 추억을 이야기할 거 같다.


그 뒤에는 할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아버지의 자전적 소설을 발견했다. 책으로 출판을 할까 생각을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다. 「어느 육군 병장의 군중 일기」라는 제목의 소설은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가 참전한 6.25 전쟁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친구에게 빌려 온 영어사전에 매료되어 낮에는 고된 노동을 하고 밤을 지새워 영어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어릴 적 꿈은 소설 문학도. 하지만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그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으셨고, 할아버지한테 사랑을 주지 않으셨다. 비가 오던 어느 날, 공휴일로 착각하고 친구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가 휴지로 꿰어 맨 노트가 빗물 받지 진흙 속에 처박혀 있었다. 영어 사전도 행방이 묘연했다. 그 뒤 할아버지는 코피로 1년 동안 앓아누우셨고, 그 기간 때문에 할아버지는 작은 키를 갖게 되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된 소설은 할아버지가 전쟁 속에서도 나라에 대한 충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글에 대한 할아버지의 열정과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역사를 알게 된 소설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영어 사전과 회화를 공부하시고 영어마을 다니시기를 즐기시며 공부하는 삶을 사셨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와 이 소설을 함께 읽고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와 뭉쳐진 아픔을 헤아려드리고 풀어드리고 싶다. 할아버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할아버지의 슬픔과 회한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꼭 알려드리고 싶다. 너무도 외로웠을 그 어린 시절의 박상호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지막에는 할아버지께 전하는 감사의 편지를 읽어드리고 싶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늘 의자 위에 올라가 발표하는 것을 시키신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할아버지가 늘 나를 대단하다고 해 주신 덕분에 자신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여서 너무 감사했고 저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그간 저한테 아낌없이 주신 사랑 저도 베풀면서 살겠다고. 꼭 전하고 싶다. 할아버지 사랑한다고. 그리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곁에서 마지막을 지킬 것이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참 감사하다. 내 삶에 이렇게 영향을 준 누군가가 있었고, 나의 가슴을 울리고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할아버지는 내 가슴에 살아 숨 쉬며 내 삶에 끊임없는 영감을 주시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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