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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Jul 26. 2021

예정된 후회

아무리 열심히 해도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나는 웬만해서는 후회를 잘 하지 않는다. 실패든 성공이든 그 모든 것이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첫사랑을 잡을 수 있던 몇몇의 순간을 놓쳤던 그 때에도, 하와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을 때에도, 순례길에서 노숙자를 인터뷰를 하다가 위험할 뻔했을 때에도 선택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순간에 나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후회되는 순간이 딱 한 번 있다. 그 순간은 생각할 때마다 눈 뒤쪽으로 눈물이 차오른다. 다시 되돌리고 싶은 마음과 그럴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슬픔이 함께 차오른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순간이다. 나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


할아버지는 아주 괴팍한 분이셨다. 작은 키를 비롯해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이 대단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았던 것이 큰 원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할아버지에 대한 성격은 주변 가족들을 매우 힘들게 했다. 가장 고통받은 사람은 집안의 귀한 장손이자 독자의 며느리인 엄마였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종종 우리 집을 불시 점검하셨고, 허락없이 피아노를 샀던 날, 엄마 아빠는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몇 시간씩 호통을 들어야 했다. 부모까지 들먹이며 막말을 하시고, 엄마의 멱살을 잡은 적도 있었다. 엄마는 할아버지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무엇이든 내어주는 분이셨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등에 나를 태워주셨을 때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첫째 손녀인 나를 매우 아끼셨다. 등에 타면 할아버지가 나보고 머리를 잡으라고 하셨다. 할아버지 머리를 뭉텅이로 잡고 타면, 할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바보 할아버지가 간다~’면서 네 발로 방안을 돌아다니셨다. 어린 나는 좋다고 깔깔거리며 할아버지 머리를 잡고 등에 몸을 바짝 붙였다. 엄하디 엄한 할아버지는 내 앞에서는 스스로 바보 광대가 되셨다.


어릴 때 생신 때면 할아버지는 나에게 써온 편지를 읽게 하셨다. 의자 위에 올라가서. 모두 읽고 나면, 할아버지는 ‘우리, 해원이가 최고다~!’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크게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말하는 것은 어릴 적 할아버지의 훈련 덕분이다.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내가 전화를 드리거나, 찾아 뵈면, ‘최고의 손녀, 우리 해원이가 세상에서 제일 최고다~!’라고 말씀해주셨다. 나에게 최고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삶에서 퍽 위로가 되던 때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괴팍하고 이상하다고 욕을 해도, 나에게는 최고의 할아버지셨다.


나이가 들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신 할아버지는 치매가 왔다. 표정이 점점 옅어지고 성큼성큼 걷던 걸음걸이도 구부정한 종종걸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거실에 놓인 다홍색 3인용 쇼파 위 할아버지 옆에 앉아 할아버지한테 말을 걸어드리고, 할아버지를 만져드렸다. 할아버지 손의 핏줄을 따라가며, 이건 몸의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냐고 한약사였던 할아버지의 뇌가 굳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 여쭤봤다.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오지만, ‘영원한’ 이별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순례길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당장 병원으로 출발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할아버지의 의식은 저 너머로 넘어간 상태였다. 병원에서 심장만 겨우 살려 놓은 상태였다. 눈은 못 뜨시고 말씀도 못하시지만 귀에 대고 말하면 소리는 다 들으실거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병원 응급실 한켠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이미 얼굴이 누렇게 뜨고 영혼이 반쯤은 이미 새어 나간 것 같은 할아버지의 귀에 대고 열심히 말을 주억거렸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때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너무 죄송해요.’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내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단톡방에 할아버지 사진이 올라왔었다. 돌도 안 된 아기 조카를 보고 웃는 할아버지 사진이었다. 할아버지는 몰라보게 야윈 모습이었다. 몸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단톡방에 ‘할아버지가 해원이 보고 싶다고 하시네’라는 말에 나는 곧 찾아뵐 거라고 별 생각없이 말했다. 사실 귀찮았다. 백수였지만, 여행의 피로가 덜 풀렸다고 생각했고, 다음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할아버지는 끝내 보고싶다던 내 얼굴은 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셨다. 변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돌아가신 것이었다. 숨이 끊어질 때에도 나는 할아버지 곁에 있지 않았다. 복도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와중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사무쳤다. 나의 게으름이 죄책감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날 바로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왜 그 소중한 시간을 놓쳐버린 것일까. 한번이라도 더 찾아 뵙고 할아버지께 기쁨을 선물해드렸어야 했는데… 나는 그의 기쁨이었는데… 생각할수록 눈물은 새롭게 솟아올랐다. 다른 모든 일들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죽음’ 앞에서 다른 일들은 작게 느껴졌다. 죽음만큼 일말의 가능성도 차단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없었다.


가족들이 할머니가 힘들어하실 거라며 우는 것도 마음껏 울지 못하게 했다. 나는 울음을 휴지로 찍어내며,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지켰다. 장례식 3일 내내 빈소를 지키고, 염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화장터로 관을 옮길 때에는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낭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만 3년이 지났다. 모든 가족들이 그렇듯, 우리는 할아버지의 부재에 익숙해졌다. 남겨진 할머니를 돌보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할머니도 경도성 인지장애로 치매와 비슷한 증상을 앓고 계신다. 할아버지 때를 되새기며 나는 할머니와 시간을 더 소중히 보내려 애쓴다. 혼자 계신 할머니 댁을 방문해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고, 할머니를 모시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고, 코인 노래방을 가고, 춤을 추면서, 할머니와의 추억을 더 쌓으려 한다. 할머니의 남은 시간 동안 기쁨의 순간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한다. 할머니 삶이 끝나는 날, 나는 충분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점점 몸이 안 좋아지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할머니께 신경 써야할 것 같은 마음과 내 삶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한다. 끝에는 언제나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할머니와 함께 하는 그 순간을 오롯이 집중하고 충실하게 보내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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