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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퇴사, 여자의 입원

돌덩어리

by 임요세프

새로운 사업장에서 일한 지 투(two)개월 차, 새벽 5시. 충혈된 눈을 비벼가며 밤샘 근무를 하던 중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졸음이 사라진 건 물론이다. 이 시각에 연락이 오는 건 좋지 않은 징조다. 아내는 어지간한 일 아니고서는 일할 때 전화하는 사람이 아니다. 차사고가 나거나, 아이가 다쳐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거나, 집안의 누가 돌아가셨거나 하는 피치 못할 상황에만 연락하던 의연한 사람이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놓기 때문에 전화를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새벽 5시면 한창 꿈나라에 있을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간만큼은 희한하게도 전화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20년 차 부부의 텔레파시가 통한 것일까. 아내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버티고 버티다가 내게 전화를 했다. 이른 아침 지하철과 버스 운행이 시작될 무렵, 이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한 거다. 고통의 순간에도 여자는 남자를 배려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나를 둘러싼 이들에게 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내, 아이들, 부모님,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까지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퇴사한 후에도 하루하루는 치열하게 사는 것 같은데,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최근 들어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는데, 아내의 새벽 전화는 그 트리거였다.


집 앞 류내과의 원장님은 즉시 큰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유하셨다. 병명은 급성 신우신염. 콩팥과 요도에 문제가 생겼단다. 원인은 운동부족과 자극적인 음식섭취 등. 최근 의정 갈등 영향으로 세브란스 병원 입원은 쉽지 않을 거라며, 원장님은 서대문구청 옆 동신병원을 추천해 주셨다.




실제로 아내의 몸속에는 커다란 돌덩어리가 쌓여 있었다. 교수님 말로는 다른 환자들보다 10배는 크단다.


스님들이 입적한 후 몸에서 사리가 나와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내는 천주교 모태신앙이지만, 그녀의 몸속 '돌덩어리'는 마치 불교 수행자의 '사리'처럼 느껴졌다. 원인은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나 운동부족 때문이 아닌, 바로 '남편' 때문 아니었을까.


'여자'는 '남자'의 연출된(!) 다정함에 속아 20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결혼 20주년이다. 2005년 청주 사천동 성당에서 제자들의 합창으로 성당 가득 울려 퍼졌던 축가, 동물원의 '널 사랑하겠어'는 2025년 현재 일종의 공염불(空念佛)이 되어 있다. 여자가 졸혼, 아니 이혼을 요청한다고 해도, 남자에게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사는 동안 사고란 사고는 전부 남자가 쳤으니, 과실비율로 치자면 <100 대 0>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 20주년을 한 달 앞둔 시점 남자의 퇴사 결정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아내는 이번에도 남편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걱정과 우려를 표하다가도, 대화의 끝에는 항상 남편에 대한 격려를 잊지 않는다. 알고 보면, 남자는 여자의 지지 덕분에 퇴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사이 아내의 몸속에는 '돌덩어리'가 계속 커져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행히 계속 물 마시고, 걷고, 뛰자 아내의 몸속 '돌덩어리'는 몸 밖으로 나왔다. 아팠지만, 개운했다. 아내는 밤샘 근무를 끝내고 귀가한 남편에게 '그것'을 꺼내 보여주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또,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뼛속 깊숙한 곳에 까지 아픔을 감내하고 사는 아내 앞에서, 낮아진 자존감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 의지를 다져야 한다. 결혼 20주년을 인생 전환점의 원년으로 삼으면 된다. 아내가 건네준 '돌덩어리'는 그 징표다.


남자는 어느새 격일 근무에도 적응했고, 업무의 개괄적인 흐름도 파악했다. 믿고 의지할 만한 파트너도 생겼다. 방향성만 잘 잡으면 사업을 해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장 대표의 격려도 있다. 조금 더 공부하면, 기업상장을 위해 달려가는 주식회사 돌우물과의 협업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돌덩어리'와 '돌우물'은 묘하게 겹쳐진다. 이 모든 것은 아내의 큰 그림이다.


아내가 퇴원한 후, 시청역 근처에서 오랜만에 후배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매일 출근하던 시청역도 이제는 추억의 장소다. 과거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음악과 사랑만큼은 오래될수록 좋다(Oldies but Goodies). 20년이 지나도 말이다. 2025년 봄,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남자의 플레이리스트는 "널 사랑하겠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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