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책친구'를 찾으면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던 책이다. 내가 책친구가 가지고 싶어 진 이유.
어느 시험 다음날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두었던 나는 채점도 안된 시험지를 캐리어 맨 밑바닥에 깔아 두고 마구잡이로 짐을 싸서 3박 4일간 떠났다. 여행을 참 많이도 다녔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고, 채점 안된 시험지의 점수가 어림짐작이 가는 만큼 2년간 준비했던 시험을 포기하고 앞으로 어쩌지... 하는 고민에 잠길 예정인 여행이었다.
우울했어야 정상일 듯한 3박 4일간 나는 야무지게도 놀았다. 배고파지면 먹었고 졸리면 다시 잤다. 시험 준비하는 내내 스트레스로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20분 이상은 걷지를 못했었는데(마찰 알레르기의 일종인듯한데 흔하지는 않다고 알고 있다, 걷다 보면 허벅지나 종아리 등 쓸리는 부분에 알레르기가 일어나기 시작해 처음에는 간지럽다가 나중에는 정신없이 따가워지기 시작한다.ㅠㅜ) 시험을 내던졌으니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기는 하나........ 바로 다음날 제주도에서 3시간 반을 걸었는데도 멀쩡했다. 이 정도면 인체의 신비를 논할게 아니라 '꾀병'의학을 연구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즉각적인 신체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원체 걷는 걸 좋아했던 터라 걸어도 걸어도 알레르기가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돌아다니다 확 지쳐버렸다.
근처 횟집을 한 군데 찾아들어간 시간이 낮 2시.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바다가 보이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해산물 모둠 중자 하나랑 한라산 주세요" 2월, 아직 겨울이라 비닐이 쳐진 테라스 자리에 앉아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면 4가지 해산물을 번갈아 입에 넣었다. 손님이 없으니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bgm도 하나 깔아 두었는데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때는 복면가왕에 나왔던 '오래전 그날'이라는 노래에 꽂혀 있었으니 아마 그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해산물을 후루룩 먹어치웠는데도 소주가 아지 1/3병쯤 남아있었다. '이게 또 술을 남기는 건 예의가 아니지'하는 마음으로 안주를 추가했다. "성게 미역국 하나만 부탁드려요" 그랬더니.... 부엌에서 나를 힐끗힐끗 보며 대화를 하시던 아주머니 아저씨 두 분이 잠시 멈칫, 아저씨가 가까이 오셔서 "아가씨 기다려봐요 내가 미역국 그냥 좀 가져다줄게. 밥도 좀 갖다 줄 테니까 밥도 먹으면서 마셔"
나는 바다는 보이지, 해는 하늘 높이 떠있지, 해산물 왕창이 다 내차 지지, 술은 달지.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행복해하고 있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는 내 모습은 퍼도 처량해 보였나 보다. 그런들 어떠랴, 공짜로 먹는 성게 미역국은 더 맛있었다. 한라산 한 병이 똑 떨어지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들어가 2시간쯤 퍼질러 자고 일어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첫날을 그렇게 야무지게 먹고 나서 그다음 날은 책방에 콕 박혀있었다. 소심한 책방, 이 날 이 곳에서였다. 내가「모든 요일의 기록」을 만난 건. 책방 사장님의 코멘트가 달려있던 책이었다. 소심한 책방 best1위를 달고 있어 스스륵 펼쳐 보는데, 프롤로그에 꽂혔다. 저자는 기억력이 안 좋다고 했다. 방금 읽은 책 주인공 이름을 모르고, 심지어 자기가 쓴 카피를 못 외우는 카피라이터라고 하니 평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기억 못 하는 그 경험들이 자신의 몸 어딘가에 '기록'되어있다고 믿는다 했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에서 머리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에는 그 눈물이 기록되어있다고,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앞에선 기꺼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된 것이라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덮자마자 물어봐도 주인공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그냥 철자의 생김새로 인물을 구분하는 것 같다, 이름을 제대로 읽지 않고 눈도장으로 쿡 찍는 느낌?) 정말 좋았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적인 줄거리 한 줄 말로 꺼내지 못하는 그런 스스로가 엉터리 같아 책을 한동안 읽지 않던 때였다. 읽어도 소용없는 것 같고, 남지도 않는 것 같고, 시간도 없고. 책을 읽지 않을 이유는 넘쳐흘렀다. 몇 년을 책을 읽지 않다가 다시 책을 손에 잡기 시작한 첫 책이 「모든 요일의 기록」이었다. '책' 그 자체를 그냥 좋아하던 나를 떠올리게 해 줬고, 내용을 줄줄 외워야만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내가 읽은 그 책들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어도 내 몸 어딘가엔 기록되어 있을 테니까.
이전에 책친구를 찾아 시작했던 독서모임은 현재 「데미안」, 「불안」을 지나 3번째 책을 읽고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 책은 그때 그 여행에서 「모든 요일의 기록」의 기록과 함께 샀던 책이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다 보니, 그때 나의 생각, 그 시절 나의 기억들이 궁금해 이 책도 다시 펼쳤다.
그렇게 다시 읽다가, 결국 책을 두 권 주문했다.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그리고 까뮈의 「결혼, 여름」. 회사를 그만두고 무언가를 찾아, 떠나버리고 싶던 그 시절 만났다는 이 책은 지중해로 도망치려 했던 저자에게 따끔하게 이야기한다.
"참으로 이곳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올 것이 아니다. 이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새우며 행복한 사람의 땅"이라고. 파리로 도망가면 행복해질 줄 알고 저자는 파리행에 모든 것을 걸었었다. 새벽에 불어 학원에 가고, 여행 갈 돈을 모으고, 여행을 위한 가벼운 노트북, 여행을 위한 퇴사, 심지어 남자 친구에게도 말해두었다. 자기는 '떠날 사람'이라고. 근데 그렇게 철저하게 '행복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올 곳이 아니라고, 오지 말라고, 그곳은 '현재' '지금' 행복한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고 쾅쾅 못을 박아 버리다니.
뭐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지금'을 중요시하는 이야기들은 꽤 힙한(?) 이야기로 분류되어 책, 영화, 광고 등 다양한 곳에서 소비되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소비되어버린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 나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었다. 꽤 오랫동안 상태 메시지로 해두었던 '카르페디엠'이라는 말은 그저 허공을 떠도는 의미 없는 말이 되어버렸고, 더 나아가 중2병 바이러스가 그득한 문구 같아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 책을 읽었던 2년 전의 나는 그렇게 '지금'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후루룩 읽어 넘겼던 듯싶은데, 오늘의 나는 '지금'을 이야기하는 책 속의 한 꼭지에 걸려 넘어졌다. 그냥 문득 '지금'을 연필을 쥔 손끝에 힘주어 꾹꾹 눌러 쓰듯이 보내보고 싶어졌다. 서울 한복판, 내 일상 속에 있을 지중해를 꾹꾹 눌러 적어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책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