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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Jun 18. 2024

안개

  시인 P는 처음 '시'라는 것을 느꼈던 그날을 기억한다. 어느 여름날, 시골집 뒤뜰, 우물 옆, 하얀 양은 대야에 찰랑이는 투명한 물, 그 물에 손을 넣었을 때의 시리도록 차가운 감각, 물 위로 쏟아지던 따가운 햇살, 얼음조각처럼 부서지던 빛나는 알갱이들.....

  "당신의 삶은 그날의 그 투명하고 서늘한 물의 느낌을 다시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요?"라는 말을 언젠가 서점주인 C가 한 적이 있다. 이야기 번개 모임 말미에 지나가듯 던진 말이라 P 본인 말고는 주의 깊게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꿈에 P는 어딘가를 쏘다니다가 어느 공원 옆에 이르렀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눈앞에 서점이 떡하니 서 있었다. 존재감이 너무나 생생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미는데 미끄러지듯 넘어졌고 P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우물이 떠올랐다. 서점과 우물이라니, 서로 전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는 장소와 사물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네모난 서점, 동그란 우물, 알 수 없는 깊이, 들여다봄, 네모난 하늘, 동그란 하늘, 하나의 하늘, 비침, 너와 나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장들,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몇 가지 단어들을 읊조리고 있는데 우나무노의 소설을 읽다 메모해둔 것이 떠올랐다. ‘아, 오르페오, 오르페오. 이렇게 홀로, 홀로, 홀로 잠든다는 것은 단 하나의 꿈을 꾼다는 것이야. 단 하나의 꿈은 현실이고 외양일 뿐이지. 그러나 두 사람의 꿈은 진실이고 현실이야. 현실세계는 우리 모두가 꾸는 공통의 꿈인 것이야. 이어 그는 잠이 들었다.’ (P.116, 안개)라고 적힌 메모. 본인의 필체를 낯선 이의 흔적을 대하듯 바라보다가 P는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섰다.      

  서점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시인 P를 C는 반갑게 맞았다.      

  “글은 좀 진척이 되고 있나요?”

  “아니요. 맴만 돌고 있어요.”

  “뭐가 문제일까요?”

  “계속 같은 벽에 부딪혀요. 막힐 때마다 나름 길을 찾아낸다고 하는데 부딪히고 보면 같은 벽이에요.‘

  “벽이 문제군요. 그럼 벽을 부숴야겠네요.”

  “그렇군요. 저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선택을 해도 같은 벽에 부딪힌다면서요. 그렇다면 다르게 선택한다고 하면서 실은 매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순간 P의 귓가에 쨍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빛으로 하얗게 바랜 우물 주위를 빙빙 도는 누군가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익숙한 뒷모습. 친근한 뒷모습이 뒤를 돌아본다. 낯익은 타인의 얼굴.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만나는 얼굴. 그 얼굴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같아. 경로가 다를 뿐,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 될 일은 되고. 벽이란 건 그저 머릿속 생각일 뿐이지. 그러니 그냥 가보는 거야. 여기서 빙빙 돌지만 말고 움직여보라고. 너의 그 a와 b, 네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는 사람과 사물들을 풀어놔봐. 그럼 풀릴 거야.'     

  서점주인 C는 자기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안 듣고 있는 건지 멍하니 서 있는 P의 어깨를 툭 친다. 퍼뜩 서점 공간으로 돌아온 P는 눈빛이 다시 밝아졌다.     

  “곧 정리하신다구요? 서점이요.”

  “예. 그 전에 살 책 있으시면 사세요. 할인중이니까요.”

  “서점이 없어지나요?”

  “누군가 서점하실 분이 계시면 넘기면 좋겠는데 좀 기다려 보려고요. 여하튼 그 소설, 꼭 완성하시길 바랍니다.”     

  P는 답을 못하고 웃는다.  빛나는 문장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물은 그녀의 세계 안에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뜨거운 여름햇살을 단숨에 부수는 얼음 같은 물을 찾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미완의 소설을 쓰고 또 쓰는 부질없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물음 하나가 올라왔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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