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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픽션들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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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Oct 01. 2024

읽다, 그리다, 울다

  타로리더는 수그리고 있던 등을 펴고 막 완성한 타로 카드 한 장을 들여다본다. 뿌옇고 파란 달 카드는 음울해 보인다. 유화 물감이 마르도록 벽면 책장 위에 세워놓는다. 달 카드 옆의 상자에는 17개의 메이저 카드가 들어 있다. 남의 손이 닿지 않은 카드를 갖고 싶어서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그림의 디테일은 좀 떨어져도 혼이 담긴 카드라 리딩이 더 잘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었으나…창밖을 내다보니 서점주인 C가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서점을 곧 닫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단골들이 자주 오는 것 같다. 몇 달 새 눈에 익어서인지 단골들은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좀전까지 서점에 있던 이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짧은 머리에 몸집이 자그마한 여자다. 오늘따라 더 힘이 없어 보인다.

 “저기요”     

  서점에서 막 나온 여자를 부르는 타로 리더의 조심스러운 목소리. 이에 돌아본 여자는 울고 있지는 않으나슬픔이 가득 배인 얼굴이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저, 혹시...시간되시면 잠깐 얘기 좀...”

  하면서 타로리더가 열려있는 가게 문을 가리킨다. 타로리더는 대답 없이 고개가 갸웃해지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타로는 안 보셔도 되요. 그냥, 그림 그리시는 분 같아서,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건 어떻게...”

  “지난번에 여기 서점 주인분이 보여주셨어요, 전시 리플렛.”

  “아...”     

  그림 이야기에 경계심이 풀렸는지 여자가 더 망설이지 않고 타로 가게로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여자의 시선이 벽면 책장 위에 세워 둔 타로 카드에 가서 멎는다.      

  “여긴 어디인가요?”     

  뜻밖의 질문이다. 타로리더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본다. 그림 속 배경은 허공에 가깝다. 그림 전면에서 시작된 오솔길이 흐려지는 원경에는 아무도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성이 한 채 있다. 안개에 쌓인 성은 마치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돌무더기처럼 보인다. 전경에는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실재하지 않는 두 마리 짐승이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대고 있다.      

  타로리더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 여자는 상자 속 다른 카드들을 본다. 그림을 본다기보다는 책을 읽는 것 같은 표정이다. 연인 카드를 보던 여자가 묻는다.     

  “이상한 집이네.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타로리더가 그린 연인 카드에는 귀퉁이에 티피로 보이는 것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바로 티피를 알아본 것도, 여기에 이야기가 있는 것을 알아본 것도 놀라워서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지만 시선이 더 깊어진 것 말고는 슬픈 표정에 변화가 없다. 타로리더는 티피 아니 '비둘기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주 예전의 일인데, 서울의 Y역에, 시끄러운 목소리로 행인들에게 호통을 치는 노숙자가 한 명 있었어요. 작은 리어카에 폐지를 잔뜩 모으며 다니는데 진로에 방해되는 행인들에게 거의 욕설에 가까운 말을 던지곤 했죠. 몸집이 아주 작아서 뒤에서 보면 끌고 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리어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죠. 세수도 하지 않는지 꾀죄죄한 얼굴에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있고 옷은 아무것도 껴입어서 보기 안쓰러웠죠.. 뭣보다 욕설을 어찌나 무섭게 하는지 어쩌다 마주칠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피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어떤 아저씨한테 호통을 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그 분도 노숙자였는데 마시고 있는 술병을 빼앗질 않나, 마구 욕설을 퍼붓지 않나,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거의 매일 봤는데, 일 때문에 타고 다니는 지하철 노선이 달라져서 한 계절을 거길 못 갔죠. 그러다 아마 겨울이 시작되는 즈음에 그 역을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노숙자 두 분이 다 안 보이는 거예요. 아마 어디 노숙자 쉼터에라도 갔나보네 생각했는데 어느 눈 오는 날 이었어요.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져서 지하철 입구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지하철 입구 쪽에 하얀 티피가 있는 거예요. 온갖 폐지로 얼기설기 만든 집이었는데. 흰 눈이 지붕을 두텁게 덮고 있던 거죠. 막 그 티피를 지나는 참에, 거기서 누군가 나오는 거예요. 천막 같은 걸 걷고 나온 사람은 그 노숙자였어요. 행색은 여전했는데 뭔가 달랐어요. 좀 밝고 순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심지어 여자였다는 걸 그때 보고 알았어요. 이 분이 여기 숙소를 지었나보네 하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그 분 뒤로 따라 나온 분이 누구였을까요? 글쎄 그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노숙자 아저씨였던 거예요. 자세히 보니 그 천막에는 그림까지 여기저기 붙어 있더군요. 그 사이 두 분만의 '비둘기집'을 지었던 거죠...”     

  이야기를 하면서 타로리더의 마음이 잠시 다른 곳에 가 있던 사이. 그림 그리는 여자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없이 울고 있었던 것을 타로리더는 알지 못했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타로리더에게 여자는, 그림들이 이상하긴 한데 좋다고, 여긴 이야기가 많은 세상이군요, 이렇게 풍부한 카드라면, 읽을 거리가 많겠어요…라고 말한다.

  타로 가게를 나선 여자는 평소처럼 골목길에서 골목길로 천천히 걸어간다. 이왕 간 김에 타로를 보고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바로 부질없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어떻게 해도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누가 어찌 되든 자체의 법칙을 따라 굴러갈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하고,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고, 나는 걷고 또 걷고, 저 사람은 먹고 또 먹고, 그리고 달려가는 저 사람,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머릿속 끊임없는 중얼거림에 멀미가 올라온다. 타로리더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멀미와 슬픔이 출구를 못 찾고 엉긴다.

  여자는 몇달 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괜찮아, 내 이야기의 집을 곧 지을 수 있을 거야, 혼잣말을 해보지만, 힘없이 바로 흩어지고 만다. 어두워지는 거리를 홀로 걷고 있는 여자는 이 도시 전체가 울릴 만큼 울고 있지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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