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가 M도서관 종합자료실 문을 닫고 나온 시간은 저녁 10시. 영하의 날씨였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갑갑했던 얼굴에 닿는 공기가 상쾌하다. 육교를 건너려고 발을 계단으로 올리는데 날카롭게 빛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초승달이다. 꽉 찬 달만큼은 아니어도 주위의 어둠을 물릴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밝다.
i가 태어난 밤에도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처음 겪는 산고에 온몸의 뼈가 다 나가떨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을 엄마가 기억했을 풍경은 아니고, 나이가 제법 찼을 때부터 음력 생일 때마다 보던 달이라 스스로 생일 풍경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리고는 어디서 들었는지 초승달이 뜬 날 태어난 아이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면서, 꽉 찬 만월에 태어난 아이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느끼기 시작한 건 사춘기 때부터였는데 그런 느낌 때문이었는지 친구 사귐이 늘 어려웠다. 그때 가장 부러워했던 친구는 두 부류였다. 첫째 부류는 친구가 많은 아이, 두 번째 부류는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 아이. 결핍감을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었던 i는 어릴 적부터 친숙했던 책의 세계로 숨어 들어갔다. 생일 즈음마다 보던 초승달은 아름다웠지만 보고 있으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아릿한 슬픔이 올라오곤 했다.
초승달이 그림 같은 사물이었다면 보름달은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원의 대상이었다. 특히 달이 크게 보이는 겨울 저녁에는 일부러라도 산책을 하면서 달빛을 쐬곤 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빛이 마음에 닿으면 뭐라도 이루어질 것 같아서였다.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꿈이니 소원이니 바람이니 하는 것들이 의미 없어지기 시작했고 달을 벗 삼아 산책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보름달에 태어났다고 하여 인생이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았고, 언젠가부터는 외로움에 익숙해져서 사람 사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지기도 했던 때였다. 책 속 세계의 매력도 시들해져서 삶은 한동안 단조로운 회색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에 자기 세계가 단단해지기 시작한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나갔고, 여전히 흔들리는 삶을 사는 몇몇만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뭐 새로운 이야깃거리 없나 하고 의미 없는 말들을 던지곤 했다. 만나면 나오는 이야기가 어디 무슨 집이 뭐가 맛있네, 요즘 무슨 드라마가 재미있네, 요즘 어디가 많이 아프네...로 흘러가면서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도 지겨워지기 시작한 i는 어느 날 크게 결심을 하고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프리랜서로만 일하면서 어디 소속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갑자기 그런 결심이 든 건 마흔이 되는 생일날 혼자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고 올려다본 초승달 때문이었다. 하늘에 찍어놓은 손톱처럼 생긴 달이 그날따라 애처로워 보였다. 하늘에 박힌 그 많은 별들이 초승달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초승달의 존재감이 감정이입 되면서 i 마음속 어딘가에 완전한 자기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직장 경험이 없는 마흔 살 여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다. 수십 번 시도한 끝에 그나마 갖고 있던 자격증과 자원봉사 경력 덕분에 M도서관 종합자료실에서 일정 기간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난 책의 세계는 그 전과는 사뭇 달랐다. 책에서 위로를 찾으려면 스스로 노력을 해야 했다. 어릴 때와 달리 책은 자기 세계를 쉽게 열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책과의 만남은 더 고요하고 깊어졌다. 일은 생각보다 수월치 않았고 책 정리를 하느라 손목은 혹사를 당했지만 다양한 책 냄새를 맡으며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중 i가 가장 좋아한 시간은 사람이 다 나간 빈 서가를 한 바퀴 둘러보는 마감 시간이었다.
책만 남겨두고 자료실 문을 닫고 나온 겨울밤 10시. 이날의 초승달은 마치 화살표처럼 i의 발길을 이끌었다. 산책을 하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발길이 공원 쪽으로 향했다. 공원은 어두웠고 텅 비어 있었다. 그냥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 옆 불 꺼진 서점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다. 마치 홀리듯이 불빛을 따라 서점 문 앞에 섰다. 서점 입구에는 <연말까지 운영합니다. 서점을 맡아주실 분은 문을 두드려주세요>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어두운 점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책 정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순간 바람이 불었고 바람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보니 초승달이 보석 핀처럼 박힌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i의 오른손이 서점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서점에 불이 켜졌고, 문을 열면서 i와 초승달을 거의 동시에 바라본 C는, 오늘 달님이 참 밝네요라고 말하며 i를 안으로 안내했다. 서점 안에서 마주 한 i와 서점주인 C는 책들이 쌓여있는 탁자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서로에게 행복한 결정을 내리게 될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