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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Sep 05. 2024

기억나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낡은 여행 가방을 든 크프우프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고 있다. 이름에서 짐작이 되듯 그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늦은 시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분위기다.  공항에서 누군가 뭐라 말을 걸었던 것 같은데 크프우프크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출구로 나간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명이 시작되면서 멍한 상태다. 크프우프크는 꿈 속을 걷는 느낌으로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뭐라고 묻던 자는 더 따라오지 않는다. 이날의 마지막 비행기였다. 약간 출출하긴 했지만 어서 온기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 막 출발하려는 공항버스에 몸을 싣는다. 한 시간여 가수면 상태에서 흔들리다 내렸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훅 얼굴에 와 닿는 겨울 공기가 상쾌하다. 기분 좋은 한기, 익숙한 거리의 냄새. 어깨를 빳빳하게 했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가 이야기 속에서 자주 드나들던 서점의 불이 꺼져 있다.  한 걸음 떼는데 불 꺼진 서점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형체가 보인다. 서점주인 C가 아직 안에 있는 모양이다. 캄캄한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마음이 어지러울 땐 어둠 속에 가만히 있어요. 조금 있으면 마음을 휘젓던 것들이 가라앉고 평온해지면서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라고 C가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C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평온함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다. 크프우프크는 몇 걸음 옮겨 문이 닫혀 있는 옆 가게 앞에 선다. 창문을 가려놓은 커튼 틈으로 깃털 같은 것이 보인다. 커다란 드림캐처가 걸려 있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 악몽이 찾아올 리는 없을 텐데, 여기 주인은 낮에도 백일몽에 시달리는 걸까, 생각한다. 서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옆 골목으로 몸을 숨긴다. 만나면 반갑긴 하겠으나 이런 식으로 C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다. C는 문을 닫고 창문들이 제대로 닫혔는지 둘러본 다음 뚜벅뚜벅 길을 건넌다. 건너편 술집 <달의 궁전>도 닫혀 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인가, 공항버스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그 사이 뭘 하다 이렇게 늦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어딜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굴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이명이 울린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잠시 멈춰 있으니 거리가 어둠으로 덮이기 전의 시간이 떠오른다.      

  크프우프크 자신도 믿기지 않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의 이야기 속 또다른 주인공이다.  이야기 속에서 거의 불가능한 연애를 하던 주인공은 작가를 보자 빙긋이 웃었다.      

  “드디어 끝났어요.”

  “......”

  “그가 떠났어요. 이제 전 자유예요.”

  “힘들진 않나요? 외롭다거나.”

  “외로워요. 그래서 좋아요.”     

  주인공은 크프우프크의 팔짱을 끼더니 낯선 길로 이끌었다. 찾아간 곳은 주인공의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네요.”

  “다 버렸거든요.”      

  주인공이 텅 빈 네모 공간을 춤추듯 빙글빙글 돈다. 크프우프크는 어지러워서 눈을 감는다. 주인공이 크프우프크의 손을 잡는다. 순간 올라오는 냉기에 크프우프크가 흠칫 눈을 뜬다.     

  “이제 뭘 해야 할 지 알려주세요. 여길 떠나야 하는 건지, 다시 채워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걸 왜 나에게...”

  “당신이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내가 만들었다니, 뭘? 크프우프크는 난감한 상황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아서 더 당황스러웠다.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 우물거리다가 일단 피하는 길을 선택한다.     

 “시간을 좀 주세요.”

  오랜만에 찾은 자유 덕분에 마음이 넉넉해진 주인공은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 저, 인내심이 그리 없거든요. 이리 오세요. 나가는 길을 알려드릴게요.”     

  크프우프크는 손을 절래 내젓는다. 눈으로 괜찮다는 뜻을 전하고 작업실 문을 나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거리가 매우 어둡다. 한 걸음씩 천천히 걷는다. 열 보쯤 걸으니 어깨의 긴장이 풀린다. 거리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다. 불 꺼진 상점들을 구경하며 걷다가 문득 생각난 듯 하늘을 올려다본다. 매우 깊은 파란색 하늘이다. 파란색이라고? 깊은 겨울밤의 파란색 하늘이라고?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 까만 길 끝에 황금색 고양이 한 마리가 이쪽을 노려보며 웅크리고 있다. 편의점 지붕 위에 사는 고양이 중 하나일까. K는 아직도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을까. 시인 P는 그 사이 시집을 냈을까. 기억 저편에서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 둘 올라온다. 그저 얼굴을 떠올렸을 뿐인데 가슴이 뭔가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허기.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공원 입구의 벤치에 몸을 앉힌다. 감나무 끝에 말라붙은 감이 한 개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크프우프크는 자신의 손을 앞뒤로 살펴본다. 꺼칠한 갈색 손등과 붉은 손바닥.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다시 올라오는 허기. 이번에는 꽤 구체적으로 라면 냄새까지 올려 보내는 뱃속 기억.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크프우프크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누구라도 아는 체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늦은 아침, 이국의 바닷가 마을에서 깨어난 크프우프크는 욕실 화장실 거울을 통해 매우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만난다. 얼굴은 밤사이 만난 세계의 기억을 감추고 어서 찬물이나 끼얹어 달라는 표정을 짓는다.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돌아와 집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크프우프크는 오늘도 배를 타고 나갈 것이고, 바다 비린내를 맡으며, 수면에 혹시 비칠지도 모르는 자기 그림자를 좇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나는 존재하지 않아, 나는, 없어'라고 중얼거리는 그의 의식이 꿈틀꿈틀 형체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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