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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Mar 06. 2022

봄날 꿈같은 이야기

  게시판에 강좌 포스터를 붙일 때 까지도 서점 주인 C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누가 찾아올까. 제목부터 이상했다. '봄날 꿈같은 이야기 나누기’라니.

  ‘자서전 읽고 쓰기’ 정도의 평범한 제목을 생각하고 있던 C는 강사가 제안한 강좌 제목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강사료를 걱정하던 터여서 선뜻 재능기부를 해주겠다는 이웃 작가의 제안에 마음이 풀어졌다. 제목이 좀 이상하면 어떤가. 덕분에 흥미를 갖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강좌 첫날, 참석자는 모두 네 명이었다. 빈자리가 많아 민망했다. 서점 주인 C도 자리를 채울 겸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강사는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을 말없이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그분, 그분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여인은 당황한 얼굴로 옆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만 역시나 난감한 표정을 만나자 바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들더니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여인의 정면에는 거울이 있었다. 저기에 거울이 있었던가. C는 왠지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의 이야기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마치 거울 속에서 실타래를 뽑아내듯이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여인은 '그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숨소리도 낮추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강좌가 진행되는 서점 구석 자리의 조명은 거울 속, 이야기하는 여인을 비추고 있었다. 여인의 감정이 고조되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수강생들도 같이 긴장하여 서점 안에 열기가 도는 것 같았다. 고달프게 이어지던 ‘그분’의 이야기는 소소한 행복감으로 마무리되었다. 여인의 시선이 거울을 벗어나 강사에게로 향했다. 강사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강생들이 진심이 담긴 박수를 보냈다. 무거웠던 서점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강사는 다시 참석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강사의 시선은 네 명의 얼굴을 지나 C에게서  멈췄다. C도 앞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옆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C는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딱 집어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 전 모습을 감춘 Q작가 이야기라는 것을 적어도 한 사람은 알아보았다. C는 오랜 친구였던 Q가 가끔씩 들려준 본인의 사연에 자신의 기억을 더해 그녀가 한때는 가까이 지냈던 지인들과 갑자기 연락을 끊게 된 이야기를 풀어냈다. 미스터리 파일처럼 제법 흥미롭게 이어진 이야기의 말미에 깊은 연민과 허무의 색조가 더해지자 참석자들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쉬는 시간. 서점 주인 C는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던 여인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여인에게 커피를 건네며 C가 말을 걸었다.      

    “제 이야기가 혹시 언짢으셨으면...”

    “저는 알아요.”

    “예?”

    “Q작가를 안다고요. 기억으로 밀봉해버리셨네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요….”


   아차 싶었다. 봄날, 꿈같은, 이 대목에서 정신줄을 놓고 만 것이다. 어쩌자고 그 친구를 끌어들인 걸까. 잠시 후 강사는 두 번째 시간을 시작했고 이야기는 다른 이에 의해 이어졌지만 서점 주인 C의 머리는 뒤죽박죽 되어 집중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들과 나눈 말들, 함께 보낸 시간들…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흐릿해져서 그중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어디까지가 실제 일어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말고는 다 흐물흐물 가짜 같았고, 유일하게 확실한 순간마저도 다음 순간이 되면 꿈처럼 흐릿해졌다.


  모든 소리가 멎고 이야기가 멈춘 시간이 되어서야 C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번 강좌의 제목이 '봄날 꿈같은 이야기 나누기'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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