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재구성되는 것이라 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다 다르다.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사람 수 만큼의, 혹은 기억하려고 시도하는 횟수만큼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기억을 믿지 않아." 라고 그녀는 말하곤 했다.
기억을 믿지 않는 그녀가 지난 일을 이야깃거리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전 친구들은 하나 둘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옛날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나오고 나면 대화 소재가 바로 궁해지곤 했으니 서로 재미없는 만남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날은 특별한 기억을 만난 날이었다.
서점주인 C는 그날의 오후를 이렇게 기억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토요일 오후. 신간소설에 고개를 박고 있던 C는 서점 문에 달아놓은 풍경 소리에 고개를 든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구석의 서가로 걸어간다. 구석의 낮은 서가에는 그림책들이 배가되어 있다. 서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야 책을 보기가 수월할 텐데 그녀는 선 채로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어떤 책, 정확히는 그 책의 표지에 꽂혀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무 말 없이 책을 집어 든다. C에게로 걸어와 책과 현금을 내민다. C는 말없이 책값을 계산해준다. 그녀는 들어왔던 동선을 거꾸로 하여 문으로 걸어간다. 다시 풍경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힌다. 그 사이 들어온 바깥바람에 입구 쪽 게시판에 꽂아둔 서점소식지가 살짝 팔랑인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이야기다. 특별한 사건은 그녀가 서점 문 밖으로 나온 시점부터 시작된다. 서너 걸음 쯤 걸어 나왔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치고 지나간다. 너무 힘이 없어서,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모르고 지나갈 정도다. 고개를 돌려 노인의 얼굴을 본 그녀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동상처럼 그 자리에 멈춰선 그녀를 뒤로 하고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간다. 노인의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잠시 후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노인의 뒤를 따라 간다. 노인은 골목에서 골목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러다 막다른 골목. 골목 끝의 집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느라 돌아선 노인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과 만난다. 흐리고 힘없는 시선이 묻는다. "누구신지..." 그녀는 할 말을 찾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노인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문을 닫아걸고 안으로 들어간다. 낡은 1층 양옥집의 대문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단정한 문패가 걸려 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의 저자와 같은 이름이다. 그녀는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선다. 기억이 사라진 어머니가 만든 그림책을 들고, 천천히 골목을 걸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