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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탁소리 Mar 07. 2022

북극의 개념

  해무가 짙다. 덕분에 공중에 둥실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나쁘지 않다. 나는 북극으로 가고 있다. 지도도, 동행자도 없다. 이른 아침이지만 인천공항에는 제법 사람이 많다. 커피 마실 곳부터 찾아본다. 늘 가던 빵집은 이미 만원이다. 마침 한 사람이 일어난 덕분에 좌석 하나가 생긴다. 가방을 놓고 주문을 하러 일어선다. 커피만 마실 생각이었는데 달콤한 냄새에 끌려 크루아상을 집는다.      

 

  나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커피와 빵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답 없는 질문이 떠오른다. 질문이 눈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질문이 돌처럼 무거워서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지난 주말, 서점에서였을 것이다,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렇다고 행선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몰바니아라는 지명이 주는 이국적인 분위기에 홀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여권을 챙겼던가. 가방을 뒤져본다. 평소처럼 들고 나온 리넨 토트백은 아무리 봐도 여행가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글쎄, 손가방 하나만 들고 훌쩍 여행을 떠난다는 영화 <안경>의 주인공 정도라면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소박한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이 훌쩍 찾아가도 필요한 것이 이미 갖춰져 있는 단골 여행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이번 여행을 위해 챙겨 온 것은 스스로 보기에도 신원 확인이 어려워 보이는 사진이 붙은 여권뿐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커피와 크루아상을 맛있게 먹고 나서는 비행기 이륙시간이 깜박거리고 있는 전광판을 보고 서 있는 나는……가만히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둘러싸고 하루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멈추고, 여전히 한 자리에 서 있는 내 앞에 그가 나타난다. 그가 나를 보고 웃는다. 언뜻 그의 얼굴에서 서점 주인 C의 미소가 보인다. 알 듯 말 듯 한 미소. 그가 손을 내민다. 그의 손을 잡고 나는 원반처럼 돌아가는 하루에서 빠져나온다.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그를 따라간다. 그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새처럼 가볍다. 땅을 밟고 있지도 않는 것 같은 그에게 내가 딸려간다.      


  우리는 함께 타고 갈 비행기를 기다린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 장식이 하나도 없는 넓고 하얀 방이다. 한 사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바다와 절벽, 그 사이를 허허롭게 떠도는 바람 말고는. 그런 단조로움이 필요했어요. 빈 풍경. 그리고 고요함. " 단조로움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든 다른 사람이 앞의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얼거린다. "갈수록 그런 정경이 그리워질 거예요. 하늘과 그것이 반사되는 바다가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단조로운 풍경. 아직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그곳이 부르는 소리... 눈이 내리고 있다면 더 좋겠죠. 바다에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있나요? 어느 밤이었어요." 바다에 내리는 눈, 대목에서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물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북극으로 가고 있어요. 언제 도착할지는 모르겠어요. 조금씩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죠. 그곳에 가면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얼어붙은 땅 위에 서면, 하늘과 나 그리고 당신만 있겠죠. 그곳에서 우리는 고독하지도, 외톨이도 아닐 거예요. "       

  중얼거림은 서로 겹쳐지다가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문득 떨어져 나와 홀로 맴을 돌다가 하나의 원이 되어 우리를 하루의 끝으로 데리고 간다. 늦은 시간의 인천공항, 떠나는 사람보다 돌아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고단함의 냄새가 짙어진다.


  잡고 있던 그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고 나는 공항을 떠난다. 교통카드를 꺼내려고 가방에 손을 집어넣으니 얇은 책 한 권이 잡힌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여권은 140쪽에 끼워져 있었다. 나는 차 안의 온기에 뿌옇게 된 창문을 닦고, 지금쯤 아마 바다일 것으로 짐작되는 창밖을 본다. 눈이 내리고 있다. 나는 아직 북극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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