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여름에 지난 길을 따라서 바위산 절벽길을 올라갔다. 왼편으로 구비도는 저곳을 넘으면 요세미티 국립공원 입구가 나오고 그곳은 해발 약 3000 미터의 높은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난간이 거의 없이 위태롭게 오르는 길이지만 흙을 가장자리에 밀어놓아서 난간 역할을 하게는 해놓았다.
저편에서 올라오는 길에 연료를 넣는데 1 갤런에 5달러였고 갑자기 강도를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캘리포니아가 원래 물가가 비싼 곳이지만 텍사스 보다 두 배도 넘게 비싸니 다음 여행에는 연료탱커 트레일러를 뒤에 매달고 와야겠다는 상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런 곳은 산간벽지라서 운반비가 당연히 많이 들지만 정도를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지난번 그랜드 캐년에 가기 전날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들이 요세미티에 왔을 때 폭포에 물이 없다고 하여 의아스러웠는데 오르면서 보니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짐작은 되었다.
게이트 레인저에게 물으니 올해 눈이 오지 않아서 계속된 가뭄으로 폭포가 말랐다고 확인을 해주었다.
해발 삼천미터 이곳에는 눈이 쌓여있어야 하고 호수는 물과 얼음과 눈이 가득해야 하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눈이 없으니 사람의 눈만 쳐다보고 떠나게 생겼다.
주차장 한가한 곳에 자리 잡고 이탈리아에서 온 염장 삼겹살 날것 판세타를 꺼내어 점심을 먹었다.
풍경이야 대략 이런 모습이고...
화강석 바위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는 곳...
바위능선을 깎아서 길을 만들었고...
지대가 높은 곳은 대체로 이런 모습으로 바위와 숲과 물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이렇게 바위를 부수어 길을 만들었으나 크게 흉하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해놓았다.
이곳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간판스타 Half Dome "둥근 지붕이 반쪽으로 잘린 것"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거리는 무척 멀지만 방문객들은 해프 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부산스러웠다.
전에는 암벽등반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시즌이 지나서 한가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늦었고 프로판 개스가 떨어져서 월마트를 찾아가기로 했는데 두 시간 반 걸리는 곳으로 가야 했고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120 번 북쪽으로 떠났다.
길은 정신없이 구불거렸고 해발 2500 미터 지점에서 해발 삼백 미터 이하로 내려가느라 구비도는 가파른 경사를 향해서 쏟아진 물이 흐르듯이 내려갔다.
길가의 수력발전소...
길이 너무 멀어서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어차피 떠났으니 Placerviille 까지 가기로 했다.
물품을 구입하고 한가한 곳을 찾아서 자고 다음날 아침 요세미티로 다시 올라오면서 이번에는 옛날 120 번 도로를 따라서 오르기로 했다.
저편에는 산허리를 따라 만들어진 길이 있고 이곳은 옛날 마차로 산을 오르내리던 벌목꾼들이 만들 가파른 길이다.
저렇게 구불거리는 길을 두 시간을 돌아야 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는데 옛날 120 번 도로는 자동차도 힘겨워 속도가 나지 않는 경사였는데 옛날에 마차에 나무를 싣고 비포장 산길을 어떻게 다녔는지 상상이 잘 안되었다.
이곳에는 옛날 포교사가 파견된 예배당이 있었고 산에서 나무를 베는 벌목공, 사냥꾼, 광부 들을 대상으로 전도한 것으로 보였고 1849년이 써있는 것으로 보아 새클라멘토 인근에서 발생한 골드 러시 때 동부에서 대량의 개척자들이 몰려들면서 이곳도 많은 사람이 유입된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산골에는 지형이 좁아서 새로 개축할 수 없는 옛날 마을이 그대로 있는데 보기에 불편했으나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있었다.
한 시간이 흘러서 저지대에서 2'000 미터를 넘게 올라왔더니 귀가 먹먹하였고 이곳에 표지판이 있어서 아예 쉬어가기로 했다.
계곡에 있는 안내센터까지 내려가는 길이며...
깊고 깊은 계곡이 눈 아래 펼쳐졌다.
계곡 아래 평지는 무척 넓었지만 인근에서 몰려온 방문객들이 번잡스러울 정도로 많아서 차를 세우기 쉽지 않았다.
주차를 하고 안내센터까지 1 킬로미터 가량 걸어가 지도를 얻고 하이킹을 떠나기로 했는데 레인저 할머니 말하기를 Half Done 그곳은 쇠사슬이 끊어져서 오를 수 없고 아래까지만 통행이 가능하다고 일러주었다.
아래쪽 폭포를 가는데 한국서 온 패키지 여행자들이 울긋불긋한 차림으로 단체로 걸어왔고 그들 가운데 부인과 아이와 함께 온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니 전라도 이리시 근교에서 미국을 처음 방문했다고 한다. 1978년도 이리시 화약열차 폭발사고 때 그곳에 있었고 즉시 구조작업을 하러 친구들과 시내로 달려간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해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놀랐다.
나의 눈이 잘못되었는지 하여간 연세가 60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이제 40세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모른 체 하였다. 하마터면 내가 형님으로 모셔야 할 정도로 보였는데 꽤 젊은 사람이었고 전라도 억양이 그대로였다. 버스가 잠시 서서 다녀오라고 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곧 돌아가야 한다며 서운해하였지만 패키지 여행객의 운명이니 다른 방법은 없다.
왁지지껄 하게 한국사람 목소리가 가득하였고 물줄기가 끊어진 폭포를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만드느라 이방인들은 쫓겨나듯이 하였다.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고 가이드가 따라온 것도 아닌데 모두 어떻게 알고서 폭포로 모여들었는지 궁금했고 이곳에서 셔터를 마구 눌러대더니 시간이 되었다며 돌아가자고 서로를 부르고 곧 떠났다.
차량이 길가 곳곳에 진 치고 주차장은 가득히 메웠으므로 번잡스러워서 조용한 곳으로 하이킹을 떠나기로 했다.
곳곳에는 가벼운 차림의 소풍객이 들끓었고 숲을 나가서 위쪽의 폭포가 있는 트레일로 떠났다.
먼 곳의 해프 돔을 샅샅이 훑어봐도 인적은 보이지 않았고 차를 움직여 가기에는 너무 복잡해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
산길을 가는 곳에 무수히 많은 작은 바위에는 암벽등반 연습을 하는 젊은이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바위를 오르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송진가루를 연신 손끝에 바르며 오르고 있다.
다른 곳에서도 여럿이 바위에 오르는 연습을 하는데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애를 먹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실력을 갖춘 사람이 나서서 시범을 보이며 독려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려오기는 쉬워도 오르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 암벽등반으로 45년 전 초보자로 따라다닐 때 생각이 났으며 그때는 선배들이 끌어올려주던 시절이고 그들의 가르침에 의해 내려오던 시절이었는데 열악한 장비에 맨몸으로 밧줄을 하나씩 메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암벽등반에 필수인 크레타 신발도 없이 일반 등산화로 바위를 오르던 때와 비교하면 이들의 장비는 호사의 극치였다.
위쪽 요세미티 폭포까지 왕복 7마일을 다녀오기로 했다.
도중에 다른 팀들이 연습을 하고 있기에 잠시 쉬면서 구경을 하는데...
옆에 있던 친절한 처자가 바위를 오르기 위해 사대에 섰는데 결국 오르지 못하고 포기하고 내려왔다.
일행은 열심히 바위를 오르기 위해 애를 쓰는데 두 녀석이 일어나더니 서로 껴안고 주둥이를 마구 부딪치기에 느끼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옛날에도 저런 것들이 있기는 했으나 사회적 편견이 심해서 숨어서 GR 하였는데 이제는 대놓고 동성연애를 하는 판국이 되었다.
옆에 동료들은 익숙한지 아무도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고 두 녀석은 흐릿한 눈동자를 치켜뜨고서 부딪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튀어서 이단옆차기로 질러야 마땅하지만 미국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동성연애자들이 갖가지 요상한 차림으로 퍼레이드를 하고 동성연애자를 차별하면 형사범으로 구속되는 판국이니 모른 체 하는 것이 상수이며 가장 좋은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내게 결정권이 있으면 재심이 없이 판결문을 낭독하고 즉시 작두질을 명령하는 포청천이 되어...
그러나 세상은 급격히 변하여 저들도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저들의 앞에서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고 퍼레이드 맨 앞에서 걸으며 저들의 표를 구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니 한국서도 동성연애자들이 거리로 나와서 권리 주장을 한다는데 지들끼리 알아서 할 것이지 뭐 잘 낫다고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거리로 나올 것은 뭐냐...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파렴치한 것들이 사회의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으며 예전에는 거리로 뛰쳐나온 홍등가 것들이 판치고 몇 년 전에는 중들이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패싸움을 벌이더니 이제는 옛날에 멸망당한 줄 알았더니 숨어서 모습을 감추었다가 꿈틀거리며 소돔성과 고모라성 후손들까지 기어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