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미역 Jul 09. 2018

제주흑돼지, 아무리 맛있어도 이틀 연속먹기는 그렇죠

시작은 늘 그랬듯이 예기치 않게,


나이 지긋한 중늙은이 셋이서 평소처럼 저녁에 모여 술을 마시다가 그중 누군가에 의해 음식 타박이 시작되었고, 급기야는 그 불길이 찍 소리 없이 술병 옆에 다소곳이 앉아 술시중을 들고 있던  죄 없는 안주에게 옮겨 붙었습니다. 

"얘는 맛이 왜 이래", "생긴 건 또 어째 이 모양이야", "그러면서 비싸기는 쯧쯧쯧". 

아무리, 시간은 많고 세상은 넓은데 할 일은 없는(나 말고 두 명은 나름 바쁜 사람들이다) 늙은이들이라도 만나면 최소한 모이는 이유나 핑계쯤은 한 가지씩 들고 나오기 마련인데, 그 날은 그 어떤 마셔야 하는 근거(홧김에, '월드컵 준비를 뭐 저따위로 해서 온 국민을 스트레스받게 해! 저녁에 모여서 한 잔 하자. 열난다')나 정당성(흥분해서, '야! 대단해, 역시 저력이 있더라, 세계 1위 독일을, 축하해야지, 저녁에 만나야지')도 없이 만났음이 분명합니다.

입으로 먹고 살아가는 처지들이라 맛없는 안주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아무 말 대잔치는 풍성하고 오래갑니다. 이런 분위기에, 이왕에 올라와 있던 불쌍한 안주를 밀어내고 재수 없이 대타 안주거리로 술상에 오르면  어느 누구, 어느 것  가리지 않고 뼈도 못 추립니다. 

역시 평소와 같이 급하게 달아올랐다가 뭣 때문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도 서서히 열기가 식더니 결론으로 빠르게 달려갑니다.

"그럼 다음번 만날 때에는 뭐 먹을까?" 

나 말고 다른 두 늙은이의 평균 몸무게는 90Kg입니다.

아! 그 날 술상에 오른 것은 불쌍한 돼지였습니다. 

"맛있는 돼지나 한 번 먹어 볼까?" 내가 알기로는 나를 비롯한 저 뚱뚱이 늙은이들, 분명히 맛있는 돼지들을 여러 번 먹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태 먹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처럼 "한 번 먹어볼까?"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여태까지의 논쟁은 돼지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맛없는 돼지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 술안주론 돼지 만한 게 없지." 더 가증스러운 나는 이렇게 맞장구를 칩니다. 

이제 급반전이 일어납니다. 여태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돼지가 이제는 찬탄과 미식의 대상으로 급변합니다. 돼지는 마침내  다양한 대체재들과의 비교 끝에 국적별로, 품종별로, 부위별로 해체되어 분석이 되고, 그런 다음에는 지역별 분류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언제라는 기준이 더해진 끝에 최종적으로 제주도 흑돼지로 낙점이 됩니다.

그렇게 결론이 나자, 다들 그 맛을 아는 늙은이 셋은 주위 사람에게도 다 들릴만큼 침을 한번 크게 꿀꺽 삼킵니다. 그리고는 제주도 가는 모든 것들, 일정을 비롯해서 장소, 호텔 및 항공편 예약 등을 내게 맡겨버리고는 뚱뚱이 친구들은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주 흑돼지 이틀 연속 먹기 여행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제주행 비행기 날개에 걸린 무지개, 엄청난 두께의 흑돼지, 태풍이 온다는데 글쎄.


놀 복이 있는 자, 하늘도 못 막는다.


셋 중 몸무게가 좀 더 가볍고 여행 다니기를 많이 좋아하는 늙은이는 집에 와서 순발력을 발휘합니다. 올해에만 벌써 세 번째가 되는 그 섬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경험을 토대로, 사명감에 입각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열정 어린 폭풍 검색과 비교, 검토 및 뚱뚱이 친구들의 동의를 받는 과정까지 거쳐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가성비 높은 2박 3일의 일정이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지금 장마기간 중이라 지리하게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하고는 있지만,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에 비는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하지만 강한 바람을 몰고 다니는 태풍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 여행은 연기되거나 아니면 취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태풍이 올라오고 있답니다. 공교롭게도 제주도 이박삼일 일정에 필요한 모든 것들의 예약을 완결 짓고, 그 결과를 뚱뚱이 친구들에게 전달하고 난 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름도 어려운 쁘라삐룬이라는 태풍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겁니다. 

그 후 이틀간 태풍의 진로를 예의 주시하며, 서로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는 기대 섞인 "괜찮을 거야"를 얼마나 남발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세상일이 어디 기대했던 대로, 원하는 쪽으로 움직여 줍니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더 많음을 충분히 경험한 나이들입니다. 하지만 예약을 취소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게, 제주 왕복 항공권을 유류할증료와 공항사용료까지 다 합쳐서 42,000원이라는 KTX 서울행 편도 값도 안 되는 충격적인 가격으로 예약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일정 변경이나 취소는 불가합니다. 그럴 경우 100% 손해를 본다는 얘깁니다. 이틀 동안 묶을 호텔도 저가로 예약한 대신, 취소 불가의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에, 일정 변경이나 취소는 예약금 전액을 날리게 됩니다.

태풍이 점차 북상함에 따라 비행기 결항의 확률은 높아지고, 많지는 않지만 일부 항공편은 결항 및 지연이 되고 있다는 자막이 '용용! 약 오르지' 하고 놀리는 것처럼  수시로 TV 화면 아래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곤 합니다. 항공사에선 무슨 속셈인지, 평소와 다름없이 탑승 시 주의사항과 휴대 금지 물품 항목들을 잔뜩 적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출발 당일 오전에, 항공사에선 비행기 출발 시간이 20분 지체되었다는 문자를 어제 보낸 것만으로는 충분한 사과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전화까지 해서 여직원이 상투적인 코맹맹이 소리로 연신 미안하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알고 싶은 출발 가능 여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답을 못합니다. "네 고객님, 얼마나 걱정이 되십니까...... , 하지만 저희도 지금으로서는 딱히 뭐라고...." 

어쩝니까. 두 명의 뚱뚱이 영감과 한 명의 조금 덜 뚱뚱한 영감은 일단 공항으로 갑니다. 일말의 기대는 3시간 전까지 결항이라는 통보가 안 왔다는 점과, 혹시나 하는 희망은 어제,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았다는 겁니다. 비록 거기가 아닌 여기 부산의 날씨지만 말입니다. 



생각 보다 잘 걷는 뚱뚱이 영감들, 올레 15-B 구간을 역방향으로 걸으면서


근데, 그런데 말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출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태풍은 분명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비행기가 뜨리라는 확신이 더 굳어지는 겁니다. 비행기 출/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에도 일부 항공기의 연발착 안내와, 오키나와행/발 여객기들을 제외하고는 결항되는 항공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날씨는 점차 맑아지더니 이제는 구름 사이로 해까지 보입니다. 당연히 바람도 잠잠해지고 말입니다. 태풍의 징조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평소 같은 날씨입니다. 사실 항공기 결항과 호텔의 노쇼(no show)와 관련된 문제들은 사전에 문의해 본 결과, 천재지변으로 인한  경우에는 금전상의 손실을 거의 보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아놓은 상태라 별 문제가 없습니다. 뚱뚱이 친구들에게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예약 당사자인 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보다는 내가 더욱더 간절히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뜨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용감한 항공사의 수심 가득한 표정의 풀이 죽어 보이는 승무원들과 함께 심장에 털 난 일부의 승객들만을 싣고 멋도 모르는 항공기는 제주를 향해 날아갑니다. 예상대로 좌석의 2/3 정도는 비었는데, 그 빈 좌석들은 대부분이 앞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취소나 일정 변경 시 전액 내지는 일부 환불이 가능한 좌석들은 거의 비어 있고, 우리들처럼 환불 및 일정 변경 불가의 조건으로 저가로 항공권을 구매한 승객들만 좌석을 채우고 있습니다. 빈자리 때문인지, 아니면 태풍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승무원들은 맥 빠진 표정이고 기장의 안내방송은 성의 없이 들립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문제고, 우리는 오랜만에 보는 빈자리 그득한 항공기에 느긋하게 기대앉아서 저녁에 먹을 돼지고기 생각에 여념이 없습니다.

물론 비행기가 운항고도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창공은 태풍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히려 파란빛으로 더욱더 푸르고 싱싱합니다. 제주까지는 이륙 후 40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만석의 경우에는 물이나 주스 한잔 얻어 마시고, 빈 컵 반환하면 이내 제주 상공입니다. 창가 쪽에 앉은 뚱뚱이 영감이 입을 귀에 걸고 손짓하는 창밖을 보니 무지개가 비행기 날개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를 환영하는 좋은 징조가 분명합니다. 비행기 여러 번 타봤지만 태풍이 오는 방향으로 진행 중인 비행기 안에서 무지개를 본 적은 여태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겁니다. 태풍이 불 때는 아마도 손해를 보더라도 미리 예약을 취소해 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말을 그렇게 할까


이 섬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할 때는 렌트카를, 혼자서는 버스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택시를 탈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친구들이랑 셋이서 움직이게 되니 자연스럽게 택시를 타게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면 거리가 가까울 때나, 배차간격이 최소 30분이고 길게는 한 시간 이상 되는 제주시 외곽에서 이동할 때는 택시가 경제적, 시간적으로 나은 선택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온 지가 겨우 석 달 전이고, 일 년에 평균 서너 번 정도 오는 곳이기 때문에 부산 이외에는 내게 가장 익숙한 도시일 수도 있는 곳이 제주도입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목적지를 택시기사에게 알려줍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아들 녀석들이 극찬을 했던, TV 예능프로에도 소개가 되었다는 돈*돈이라는 흑돼지 전문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이 맛있는 흑돼지 먹는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확신이 없고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남에게 권유하지 않는 체질이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예외입니다. 이전에 한 번 경험을 해봤기에 그만큼 선택에 자신이 있다는 얘깁니다.

기사님 설명을 듣고 알았지만 애초 내가 가려고 했던 집은 별관이랍니다. 원조는 돈*돈 본관이고 별관은 같은 집안에서 분점 비슷하게 운영하고 있답니다. 그러면서 그는 왜 사람들이 더 맛있는 본관을 두고 별관으로 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했고, 본관으로 가면 오늘 우리가 묵을 호텔에 더 쉽게 갈 수 있다고도 합니다. 워낙 강하게 강권하는 바람에 우리가 만약 별관을 고집한다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분위기입니다. 

나는 택시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허리를 굽혀야 하는 것도 불편하고, 어디까지 가자고 목적지를 밝혀야 하는 것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해야 하는 것 같아 번거롭습니다. 그러나 좀 더 결정적인 이유는 기사들이 간혹 말을 걸어오면서 내 생각을 묻거나, 자신의 견해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듯한 말투 및 백미러로 흘깃흘깃 보는 눈빛도 너무 싫고 또,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하거나, 아니면 너무도 일방적인 주장에 대놓고 반대해 버린 후에 조성되는 그런 어색한 분위기가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이 길을 걸었을 때의 사진, 어쩜 날씨가 그때와 붕어빵처럼 똑 같은지.


나는 저렇게 확신에 차서 뭔가를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냥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암말 않고 데려다주면 좋을 텐데, 혹시나 잘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친절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됩니다. 동석한 뚱뚱이 친구들은 어떤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표정들을 보니까  그들의 속내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돈*돈 본관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 마다 맛있는 돼지고기에 대한 평가기준들이 있듯이 내게도 그런 기준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육즙입니다. 속살에 배어 있는 육즙은 고기의 감칠맛과 촉촉한 식감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굽는 기술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육즙의 진정한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고기를  구워주는 집을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는 살코기와 기름의 혼합 비율인데, 이 비율이 적절하지 않으면 고기가 퍼석한 맛을 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기름져서 조금만 먹어도 느끼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불맛입니다. 이는 돼지고기 특유의 기름진 냄새와 맛을 잡아 주며, 적당히만 구워지면 약간의 탄내가 고기에 배어 담백한 맛을 배가시켜 식욕을 돋우는 역할을 합니다. 으뜸은 질 좋은 숯불입니다만 연탄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연탄의 경우에는 가스 냄새를 조절하기 힘들어 자칫하면 노약자들은 미약하게나마 중독 증세를 일으켜 식욕을 떨어뜨릴 수가 있습니다. 최악은 가스불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망쳐버립니다. 만약 가스불 앞에 앉게 된다면 맛있게 먹는 것은 포기하고 허기를 채우는데 만족해야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제 주관적인 관점이고, 이런 조건들이 완벽하게 갖춰진 집에서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 대신 택시 기사의 강권에 의해 방문하게 된 돈*돈 본관입니다. 기사님이 적극 추천할 만큼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한 모든 것들이 잘 갖춰진 집입니다. 일단 고기 자체가 여태껏 내가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합니다. 아마도 4cm는 족히 넘을듯한 두툼한 고기 덩어리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고기는 아무나 구울 수가 없습니다. 연탄불을 제외하고는 앞서 제가 언급한 조건들을 모두 갖추었으며, 원래 가려고 했던 돈*돈 별관에서 고기 굽는 청년의 자기네 가게와 고기에 대한 자부심 섞인 수다에 질겁한 경험이 있는 터라 고기 구워 주는 아주머니의 과묵함이 고기 맛을 더 좋게 해줬음은 물론입니다. 뚱뚱이 친구들도 연신 엄지 척을 하며 상당히 만족해합니다. 뭔들. 

흑돼지를 맛있게 배부르게 먹고 나서, 그리고는 호텔 로비에 있는 편의점에서 각자 왕뚜껑 컵라면과 컵 짬뽕을 한 개씩 먹고서야 두 명의 뚱뚱이 영감과 약간 덜 뚱뚱한 영감이 모두 엄청나게 큰소리로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지난번의 사진


태풍을 몰고 오는 바람은 뚱땡이 영감들도 춤추게 한다


발음하기 힘들고 기억하기도 힘든 이름을 가진 태풍이 접근한다고, 그리고 거기로부터 쁘라삐룬의 향후 진로가 결정된다는 섬에서 배부른 첫날밤을 보낸 세 명의 중늙은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찍 눈을 떠고선 TV 드라마 등을 통해서 눈에 익은 전형적인 영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눈을 뜨자 말자 머리맡의 물을 더듬어 마시고, 팬티 차림으로 화장실을 가고, TV 리모컨을 들고 침대 모서리에 꾸부정히 앉아 의미 없이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대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며칠 전부터 월드컵과 함께 기상예보로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태풍이 이 섬으로 정말로 다가오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늘 아침 태풍의 영향이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그냥 평소의 제주처럼 그렇게 바람이 좀 불고, 약간의 비가 내리고, 또 자주 그렇듯이  흐립니다. 제주에서 한라산을 볼 수 없는 여러 날 중의 전형적인 어느 날입니다. 일단 섬에 상륙한 이상 우리들에겐 태풍으로 비가 억수같이 퍼붓거나, 미친 듯이 바람이 불거나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면 그냥 퍼질고 앉아서 비와 바람과 흑돼지를 안주 삼고, 한라산을 소주잔에 채워 제주를 즐기면 됩니다. 일부러 그려려고 섬에 오지 않기에 어쩔 수 없는 그런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지길 술을 좋아하면서도, 걷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뚱뚱이 친구들도 나처럼 내심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날씨는 올레길을 걷기에 아주 최적입니다. 약간 내리던 비는 곧 그칠 것 같고, 날은 흐려서 볕에 탈 염려 없고, 바람은 조금 심하게 불어서 7월의 한낮을 걸어도 전혀 더위를 느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은 모든 것의 중심에 흑돼지가 있습니다. 첫날 숙소는 흑돼지 전문점 돈*돈과 가까운 곳이고, 둘째 날의 숙소도 *돈이라는 협재 해수욕장 앞의 나름 유명한 흑돼지 전문점 인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걷는 올레길도 자연히 *돈으로 향해가는 코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레길 15구간은 A와 B 두 개의 코스로 나눠져 있습니다. 원래는 한림항에서 출발해서 내륙 쪽 마을과 산길로 고내포구까지 가는 경로인데, 그 후에 해변길을 따라 걷는 새로운 경로가 생겨서 전자를 15-A, 후자를 15-B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전을 고려해서 비바람이 심한 날은 B구간은 가급적 피해고 대신 A구간을 걸으라고 권고하는 표지판도 있지만, 지난번에 혼자 B구간을 걸었을 때도 지금보다 비바람이 더 심하게 부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흑돼지에 목숨을 걸고 태풍을 뚫고 여기까지 왔기에, 흑돼지로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15-B 구간을 역방향으로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뚱땡이 영감들을 고려해서 전체 구간의 2/3 정도만 걷기로 합니다. 이 구간은 역으로 걸을 때는 우측으로  바다를 두고 걷는데, 전 구간에 걸쳐 전혀 오르막이 없고 중간에 산책로를 잘 조성해 두었기 때문에 초보나 체력이 약한 노약자들이 걷기에 좋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노약자에 속합니다. 



올레 15-B 구간의 마스코트, 마침 가지고 있던 소세지를 한 개 맛있게 받아먹고선.




걷기는 제주 한담 해변 봄날 카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애월 일대에 몰려 있는 카페촌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태풍주의보가 내려져 있고 바람이 제법 심하게 부는 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도, 길도 한산합니다. 시원해서 걷기는 딱 좋습니다. 한담 해안 산책로를 거쳐 곽지 해수욕장을 지나 과물 노천탕을 둘러보고, 금성천 때문에 많이 둘러서 금성 포구에 당도합니다. 지난번 비바람이 칠 때도 그렇게 많이 떼를 지어서 먹이 활동을 하던 갈매기들이 웬일인지 한 마리도 안보입니다. 정말로 한 마리도. 태풍 때문이겠죠. 귀덕 궤물 동산을 지나 해변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해녀 양성을 위한 한수풀 해녀학교가 나옵니다. 그러면 한림항을 지척에 두게 됩니다. 물론 보이지는 않지만. 

전망 좋은 정자에 앉아 또 쉽니다. 벌써 세 번째인가 봅니다. 지난번 혼자서 이 길을 걸을 때는 지금 보다 더 긴 거리를 걸었는데도 여기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왔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를 지어 걸으면서 여러 번 쉬는 것도 나름 재미있고 괜찮습니다.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는 뚱뚱이 영감에게 담배도 한 개비 얻어 피우고, 물도 마시고 껌도 씹으며 수다도 떨어보고, 그때 못 봤던 풍경들도 덤으로 볼 수도 사진으로 담을 수도 있고, 올레길은 놀멍 쉬멍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애초의 내 계획은 한림항에서 점심을 먹고, 좀 쉬다가 협재까지 걸어서 가는 것이었는데 뚱땡이 영감들의 상태를 보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도 오랜만에 걸어서인지 아니면 그들에 대한 동류의식 때문인지 급속히 지쳐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의지의 조사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항상 그 자리. 매생이가 더 많이 들어간 보말 칼국수


갯강구처럼


셋 다 면을 좋아하고 술은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합이 맞아 몰려다니겠죠. 만장일치로 국수를 먹기로 합의를 보고, 지난번에 혼자 왔을 때 저녁으로 먹었던 해물탕 맛에 실망하여 아쉬움을 달래려 근처에 있던 칼국수집을 찾았다가 일찍 문을 닫아 맛을 못 봤던 그 집, 한*칼국수로 향합니다. 맛집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집답게 15라 적혀 있는 대기번호표를 들고 한참을 기다리다, 참이슬을 곁들여 보말 칼국수를 맛있게 먹습니다. 

오늘 하루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 올레라고 명명된 길 위에서도, 파라솔이 철거된 예쁜 해수욕장 모래사장을 지나면서도, 피항해 온 선박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있는 부둣가를 걸으면서도, 오늘도 여전히 입도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 비양도행 도선 선착장 앞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처음 보는 그들을 여기 작은 칼국수집에서 다 만났습니다. 아니 애초부터 어쩌면 그들과 우리들 모두는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계획과 달리 걷는 것 대신 택시를 타고 도착한 협재의 숙소에서는 시간이 이르다고 입실을 거부합니다. 조기 입실을 위해서는 시간당 5천 원이 추가된답니다. 야박하다고 욕했던 유럽의 호텔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새벽 4시 반에도 입실을 시켜 줬던 미얀마 몰레미야인의 신데렐라 호텔에 늦었지만 감사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경험 처음인데, 젠장.



태풍 주의보 속의 협재 해수욕장


전체 구간 중 추자도와, 그 외 한 두 개의 구간을 제외하곤 제주 올레길을 거의 다 걸어 본 사람으로서 평가한다면, 제주 제일의 바다로는 협재를 꼽고 싶습니다. 옥빛의 물색이 곱고, 모래 또한 부드럽고 그 색이 희어서 병풍처럼 둘러 선 야자수 나무들과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동남아의 휴양지를 무색하게 하고, 야트막한 모래 언덕이 바닷물을 가로막고 있어 모래를 밟기 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가까이 비양도를 마주 하고 있어 언제든 아름다운 섬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시 협재에서의 최고는 일몰 때 석양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노을입니다. 여러 번 여기를 왔었지만 어느 때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또 어느 때에는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제대로 된 노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뭘하고 있다가 이렇게 잽싸게들 나왔을까


어럽쇼! 태풍이 온다더니 바람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들고, 비는 아침 한때 잠시 내리더니 아예 종적을 감추어, 여태 지나온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으로 그나마 태풍의 존재를 인정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구름을 뚫고 해까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에서, 그 어디서 여태껏 숨죽이고 있었는지 모를 그들, 남녀노소 구별 없는 사람들이, 마치 썰물 때나 아니면 파도가 훔치고 지나간 갯바위 틈새에서 떼 지어 몰려나오는 갯강구들처럼 어느 순간에 그 하얀 모래 위를 뒤덮고 있습니다. 나는 태풍인데도 태풍 같지 않은 날씨가 신기한 것보다, 바뀐 날씨로 인해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카드섹션 하듯 희디 흰 모래사장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 그 거짓말 같은 광경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습니다.

입을 벌리고 있어선지 현기증이 나더니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세 명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느꼈을 겁니다. 제주도 흑돼지에 대한 나의 눈을 뜨게 만들어준 고마운 집이 지금 가는 협재 해수욕장 입구의 *돈입니다. 

많지 않은 내 친구들 중에는 뚱땡이들이 많나 봅니다. 이 집을 처음 알게 된 그날도 배불뚝이 내 친구와 저가 항공기를 타고 방어를 먹으러 온 김에 하루 시간을 내어 올레길을 걷던 중이었습니다. 뚱뚱이 아저씨들은 그런 실수를 좀처럼 안 하는데 그날은 어쩌다가 점심을 걸러서 배가 고파 저녁에 방어를 먹을 계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늦은 오후에 여기서 흑돼지를 양껏 맛있게 먹고서는 심봉사 눈뜨듯이 흑돼지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세 시간 뒤 위대한 두 명의 부산 중늙은이들은 예정에 있던 방어회 먹는 저녁 일정을 한치의 오차 없이 정상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돈 흑돼지고기 전문점, 앞으로 찾아갈 일 없을 듯.


주인이 젊고 잘 생겼기 때문인지 우리가 찾아온 고깃집 *돈에는 유독 젊은 여자 손님들이 많습니다. 이건 오늘만의 현상이 아니고 내가 이 집을 처음 찾은 5년 전쯤부터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가게 안의 모든 테이블을 거의 빼곡히 채우고 있는 손님들 모두 젊습니다. 허연 머리에 평균 이상의 균형 잡히지 않은 몸매를 한 채로 고기를 기다리는 손님들은 우리 말고는 단연코 이 안에는 없습니다. 슬그머니 눈치가 보이려 할 즈음에 주문한 고기가 나왔는데, 바빠서 그런지 잘생긴 주인 총각은 우리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전처럼 곰살맞게 옆에 서서 정성스럽게 고기를 구워주지도 않고, 뭔가 홀대받는다는 느낌이 조금 듭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고기를 앞에 둔 우리 뚱뚱이 친구들의 반응입니다. 아마도 제주 전역의 흑돼지 가격은 협정이 되어 있는 듯 여기도 같은 중량에 가격이 같습니다만, 고기 자체의 비주얼부터 어제 먹었던 돈*돈 돼지의 압도적인 위용에 영 미치지 못합니다. 거기다가 고기 굽는 순서도 잘못되었습니다. 목살과 오겹살이 함께 나오면 먼저 목살부터 굽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로 알고 있는데, 이 친구들은 오겹살부터 먼저 굽고, 한참 뒤에 목살을 다른 화로에서 구워서 내어 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두 분의 표정이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내가 일찍이 이 집에서 제주도 흑돼지 오겹살에 맛을 들인 탓에 가족여행을 오든, 겨울에 방어를 먹으러 오든 반드시 여길 들러서 돼지고기를 먹고, 주위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광고도 했는데 솔직히 지난번에 와서 돈*돈의 돼지를 먹어본 후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여기보다 거기가 더 낫습니다. 여기 *돈의 흑돼지도 분명 평균 이상은 되는데, 우리의 친구들에게 문제는 어제의 그 흑돼지가 너무 맛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괜히 내가 머썩해집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합니다.

"제주 흑돼지, 아무리 맛있어도 이틀 연속 먹기는 좀 그렇제..." 

아무 말이 없다는 건, 그렇다는 의미겠죠. 하루 늦게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숯불에 잘 익어 맛있어 보이는 흑돼지들을 구박하면서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나 말고 다른 뚱뚱이 친구들이 서로 마주 보며 이구동성으로 외칩니다. "어제 만큼 안 시키길 잘했지, 흐흐흐" 



태풍 속 협재 해수욕장의 노을


그러고 나서 우리 셋은 지나가는 동네 주민에게 물어서 물어서 찾아간 그 동네의 맛집에서 돼지 국수를 한 그릇씩 맛나게 먹었더랬습니다. 제주는 돼지판입니다. 주위에 온통 돼지들 뿐입니다. 그래서 돼지가 돼지를 돼지처럼 탐합니다.

배가 불러 잊고 있던 우리들에게, 제주는 태풍을 무릅쓴 열정에 감복한 듯, 큰 선물을 줍니다. 어쩌다 보니 뭍에서 이 섬으로 5년 연속 넘어와서 어떤 해는 머물기도 했었고, 또 어떤 해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기도 했었던 이 협재 바다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아름다운 노을을 던져 줍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석양이 부리는 그 조화를 태풍이 불어오는 이 와중에 말입니다. 

이번 방문에 우리들에게 유독 관대했던 제주는 돌아가는 길에도 큰 선물을 줍니다.

한라산과 백록담의 민낯을 보여 줍니다.



횡재한 느낌, 한라산 그리고 백록담


매거진의 이전글 비바람과 함께 한 제주 올레 15-B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