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by 묘연

“엄마. 엄마. 엄마~.”

동화책을 같이 읽다 말고는 나는 도대체 어딜 다녀온 것인가.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아득했던 정신이 차려졌다.

아이가 책에 그려진 물고기를 가리키며 신나 하는 동안 나는 온통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지만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엄마.

불러도 대답 없는 엄마가 아이 눈엔 어떻게 보였을까.

엄마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눈을 봐주고 이야기를 들어줄 때까지 아이는 연신 엄마를 불렀다.

“왜. 왜! 왜!!!”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대답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맘에 들지 않았다.

세상 신기한 듯 물고기를 보며 엄마에게도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픈 아이와 다르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는 일들...

일단 아이와의 책 읽기가 끝나면 어질러놓은 집을 치워야 하고 밀린 설거지와 빨래를 해야 한다.

그게 끝나면 인터넷으로 식재료를 사야 하고 식재료를 사기 위해서는 냉장고를 한번 스캔해야 한다.

일단 있는 재료로 아이의 식사를 챙겨야 하고 내 식사도 해야 한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이사 갈 집의 부동산 시세를 확인해야 하고 봄부터 다닐 수영장도 알아봐야 하고 은행 업무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쓰레기통도 비워야 한다.

이 많은 일들을 잠시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마치 매일 숙제 검사를 받아야 하는 학생처럼 나는 억지로 억지로 꾸역꾸역 이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오늘의 일이 끝난다고 해서 내일 쉴 수 있는 일도 아닌 일들.

그런 일들이 오늘은 왠지 더욱더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하필,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지금. 그 일들을 생각했고 그 무거움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아이에게 퉁명스러운 대답을 뱉고 말았는지...

아이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물고기 저 물고기를 가리키며 신이 나 있었다.


걱정과 근심 없이 자신의 느낌대로 살아가는 아이가 갑자기 부러워진다.

억지로 해야 할 일들에 질질 끌려 사는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하루하루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나가고 점점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은 물고기가 나오는 책을 읽고 싶었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뽀로로가 나오는 티브이를 보고 싶었고 부엉이 인형과 강아지 인형을 번갈아 가지고 놀고 싶었다.

그리고 꼭 그렇게 했다.

순간을 즐기는 삶. 능동적인 삶. 자유로운 삶.

내가 언젠가 그토록 바라던 삶을... 아이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뭘 먹을지 생각을 한다거나 책을 보면서 밀린 은행 업무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하는 행동들을 온전히 즐기면서 그 순간을 모두 즐긴다.

그렇게 자유롭게 자신의 순간을 즐기는 아이가 난 왜 이토록 부러운 걸까.

어쩌면 아이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내가 해야 할 일보다도 더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알든 모르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자기 앞에 펼쳐진 것들을 집중하며 온전히 느낀다.

나는 이런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온전히 집중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아니 내 삶에서 이렇게 순간을 온전히 즐겼던 적은 또 몇 번이나 있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즐겁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모든 게 신기하고 신나 했다.

마치 삶은 이렇게 사는 거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소중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게 아이는 다시 나를 이 순간으로 부른다.


“엄마!”

“그래. 엄마 여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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