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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HereUs Apr 22. 2021

순도 100%의 빌런은 없다

빌런을 피하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

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에너지를 얻는, 이른바 ‘외향형 인간’이다. MBTI를 처음 해 본건 2000년도 초반이었는데, 첫 검사 이후 10여 년 간 나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ENFP였다. 미국 살이 5년 차에 해본 검사에서는 ESFJ였다. 외향형 인간으로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는 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사적인 모임이야 만나는 사람 수를 줄이거나 일대일로 만나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회사에서 만나는 소위 ‘빌런’들은 내 마음을 힘들게 했다. 


자아 성찰이 취미이자 다른 사람의 말속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아채는 나는, 빌런들이 무심코 던지는 화살 같은 말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고칠 곳이 없는지 살펴봤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 ‘빌런 질량 보존의 법칙’으로 바뀌는 동안 꾸준히 여러 책과 글들을 읽으며 빌런의 유형을 파악하고, 빌런 별 대처방법을 수집한 적도 있었다. 많은 조언들은 공통적으로 일반인인 당신은 빌런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해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니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의문이 남았다. 어딜 가도 빌런이 있다면서, 어디까지 도망쳐야 하는 거지? 접촉을 최소화한답시고 파티션 너머에 있는 팀 동료와 한마디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빌런을 찾아내 상호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다음으로 찾은 조언은, 빌런에게 웃으며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거였다. 은근히 뼈가 있는 말로 내 마음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내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어 빌런에게 용감히 맞설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매일 밤 이불속에서 빌런이 나를 공격하던 그 순간을 반복 재생시키며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하고 싶은 말을 꺼내서 연습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런 연습은 실전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용기 내어 소리가 된, 연습했던 그 말은 머릿속 상상한 장면과 너무나 다르게 흘러갔고, 빌런의 공격성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날이면 이불속에서 그 장면들을 떠올려보다가 어쩐지 화가 났다. 할 말 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나 자신이 미워졌다. 



나의 사고와 감정, 행동 패턴을 파악하는 것은 마음챙김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이때 일어나는 신체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할 것을 강조한다.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라는 것이다. 얼굴이 빨개지거나, 목이 조여 오는 듯한 답답함이 일어날 때, 자신의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 그 자리를 벗어나 가벼운 산책, 호흡 등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마주하기를 권한다. 문제는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 생각보다 일상에 자주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사에게 결재 서류를 내밀고 나서 아픈 말을 들었다고 심호흡을 하거나 사무실을 박차고 나갈 수는 없다. 아이가 어질러놓은 방을 보며 치우라고 했는데, 도끼눈을 뜨고 대들 때 방을 나서는 것은 기싸움에서 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사회변혁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 중, 내 안의 의식하지 못한 편견(implicit bias)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질문 던지기가 있다. 인종차별, 성 불평등 이슈를 보면서 쯧쯧쯧 하는 사람인 나, 나는 얼마만큼 선한 사람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 던지기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하버드 연구 팀은 Project Implicit이라는 이름으로 새 내 안의 편견을 측정할 수 있는 온라인 검사인 Implicit Association Test (IAT)를 개발했다. 인종, 남녀, 장애, 신체 이미지,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내가 생각하는 나와 검사 결과를 통한 나의 생각을 비교해 볼 수 있게 하는 무료 자가진단 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나도 몇 개의 검사를 해보았는데, 동양인에 대한 편견 진단 검사에서 내가 백인에 대한 우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검사 결과를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사회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많은 강연에서 이 IAT 검사가 언급되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검사 결과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 안에 존재했던 편견을 깨닫고 자괴감에 빠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강연 시작 전 ‘불편할 수 있음’ 혹은 ‘불편함에 익숙해지기’를 강조하기도 한다. 나를 마주 보는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반발감, 백 래시(back lash)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다. 


정체성 이론 중 내게 가장 와닿았던 건, 정체성이라는 것이 평면적인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을 이루는 조각이라는 설명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 한국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모태신앙인, 여성, 기혼자, 아이 엄마, 워킹맘, 뒤늦게 타향살이를 선택한 이민자 등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질 집단에 가면 그 집단내에 소속된 사람임을 표현하기 위해 해당 집단의 신분증을 제시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땐,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기도 한다.

내 안의 편견을 인식하고, 내 마음 안에도 빌런의 조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처음엔 정말 불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빌런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빌런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본 이 사람이 정말 빌런인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빌런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은 24시간 동안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인가? 



드라마 <D.P.> 를 보며 '빌런'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선임인 황장수, 전역하는 날 사과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는 끝내 조석봉 일병을 비웃고는 돌아선다. 황장수의 뒷모습을 보며 쌓인 분노는 다른 선임이 너무나 익숙하게 괴롭힘을 시도하자 터져버리고만다. 조일병은 탈영해 황장수를 납치하고, 자신이 괴롭힘을 당했던 그 장소로 데리고 온다. 조일병을 잡기위해 특수임무부대가 투입된다. 모두가 그를 악마로 보고 있던 그 순간, 안주호 이병의 한마디가 조일병을 잠시나마 인간으로 돌아오게 한다.


“봉디쌤!!!!”


그 한마디에 조일병의 기억이 살아난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아꼈던 미술학원 선생님이었던 봉디, 조일병의 눈빛이 흔들리자 안 이병은 재빨리 덧붙인다. 제자가 입시에 성공했다고, 그 친구를 만나서 인사를 제대로 들으라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 특임대가 들이닥쳤고 조 일병은 그렇게 잠시나마 찾았던 ‘봉디 쌤’의 자아를 내던지고 자신을 망가뜨린 고참에게 복수하는 탈영병으로 자신의 모습을 굳히고야 만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여러가지 마음을 가지고 산다. 살면서 마주하는 순간마다, 그 많은 마음 중에 어떤 마음 하나가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행동을 지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는 행동, 내던져진 말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고 만다. 


황장수를 비롯한 선임들이 괴롭힐 때 화내고 싶지만 눌러참은 조 일병을 보고 그들은 ‘이래도 되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준다. 꾹꾹 눌러참은 그 화가 결국 밖으로 터져나와 보초 교대를 하던 다른 선임을 때리고, 탈영을 해서 황장수를 찾으러 가자 이번에는 ‘위험한 놈’이라고 부르며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해 그를 사살하려 한다. 


극한 상황에서 잠시나마 조 일병의 눈빛을 돌려놓은 건 조 일병 안에 있는 ‘봉디 쌤’을 알아봐주고 불러준 안 이병의 마음이었다. 비록 안 이병의 이런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지만, 이 장면이 내 마음에 깊게 남았다.


조롱과 멸시, 갈라치기, 패거리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아직도 한 줌 남은 다정함과 선의를 발견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사람은 2D가 아니라 4D다. 때로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주는지가  우리 안에 있는 여러가지 마음 중 어떤 조각을 꺼내서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 같다.


못된 사람이라고, 나쁜 놈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전에, 그 사람의 숨겨진 ‘착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사람의 ‘착한 나’를 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편 가르기, 갈라치기, 프레임 씌우기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순도 100% 빌런은 없다라고 말이다. 우리가 빌런이라고 낙인찍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어쩌면 상처 받은 어린아이의 조각이 존재할 수도 있다. 어딘가에선 시민1의 얼굴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마음속 갖고 있던 히어로의 조각이, 누군가를 만나 갑자기 발현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빌런을 모두 해치울 수도, 언제까지 도망갈 수도 없는 이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본다. 


첫째로는 빌런이 내 마음속 예민 버튼을 누르지 않도록, 그 버튼을 파악하고 최선을 다해 그 버튼이 눌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그 버튼이 눌리는 순간, 내 안의 빌런이 깨어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둘째로는 빌런 안의 다른 마음의 조각들을 발견해주고, 인정해주는 일이다. 당신 안에 상처 받은 어린아이가 존재하는군요, 그러나 당신은 시민1이라는 조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하면 적어도, 빌런의 마음속 버튼이 내 앞에서 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도망갈 이유가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빌런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에게, 순도 100%의 빌런은 없다고,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빌런 한 조각쯤은 마음속에 담고 사는, 그냥 인간일 뿐이라고 넌지시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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