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전부터 회사가 약속했던 육아기 단축근로 중이다. 근무시간을 하루 2시간 줄여 9시 출근, 오후4시 퇴근한다. 디지털시계를 설치해놓고, 4:00:00이 되자마자 퇴근 버튼을 누르고 컴퓨터 전원이 꺼지기 전에 사무실을 나선다. 잰걸음으로 이동해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38~40분. 나에게 4시 38분은 마의 시간이다. 아무리 달려도, 이 시간 내로 도착하긴 어려웠다. 반년 넘게 매일같이 실험하듯 뛰었다. 서울도시철도가 열차 시간표를 바꿔주지 않는 이상, 아무리 뛰어도 난 이 시간보다 빨리 아이에게 갈 수 없다.
쨋든 육아기 단축근로제도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다. 멀쩡한 제도를 쓰지 못하게 눈치주는 회사도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입사 6개월이 되자마자 얼른 시작했다. 친정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오후5시 전에 아이를 만날 수 있고, 집에 데려가 저녁을 지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니 육아의 신세계가 열렸다. 이렇게 좋은 게 있구나. 살 만 하다 이제! 감사함이 애사심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내 업무는 8시간이 아니어도 6시간 내에 충분히 끝낼 수 있으니 회사는 같은 업무량을 얻는 데 100만원 가까이를 절감하는 셈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도 애 키우는 사람은 많지만 이 제도를 쓰고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3명 정도 되어보였다. 주변을 봐도 그랬다. 나는 '이 좋은 걸 왜 안 쓰지' 하며 룰루랄라했다. 그러다 단축 후 첫 급여를 받고 '이래서 못 쓰는구나' 납득이 됐다. 2시간 단축에 월급은 100만원 가까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줄어든 급여를 마치 100% 정부가 보전해줄 것처럼 홍보하기에 철썩같이 믿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고 고용노동부에 단축근로 급여를 청구했다. 필요한 서류를 챙겨 내고 인사팀을 여러번 귀찮게한 후 노동부에서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덜 받은 돈은 100만원에 가까웠으나, 보전받은 금액은 40만원 남짓. 절반 저도밖에 입금되지 않았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하곤 단축근로 경험자에게 먼저 문의하니 '선배, 그거 원래 그래요. 쥐꼬리만큼만 줘요' 라 했다. 내 노동시간이 줄어들었는데, 40만원이라도 주니 어디냐-라며 감사하게 생각하려 했다.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가 시간에 쫓겨 종종거리지 않아도 되고, 친정 도움을 받지 않으니 갈등이 줄어드는 걸 생각하면 받지 못한 50여만원은 아쉽지 않았다. 그리고 난 매일 4시에 퇴근하고 있다.
그러다 얼마 전, 이 전세 계약이 만료되면 이사갈 생각에 이런저런 예산을 고민해봤다. 이사가고 싶은 집의 시세도 보고, 전세로 또 갈지 빚 얻어 매매를 할 수 있을지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가 단축을 하려면 계속 지금 수준의 전셋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빚을 더해 집을 사려면 그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단축근무를 포기하고 나는 돈을 더 벌어야 했다.
단축근무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있는 집들은 전세든, 매매든 빚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뜩이나 고금리시대에, 한달에 나가는 이자를 생각하면 아무리 맞벌이라 해도 두 사람 중 한사람의 월급을 받자마자 은행에 다 털어줘야 하는 상황이 왕왕 생긴다. 아이가 있어 단축근무가 절실한 가족이, 오히려 아이가 있어 보다 나은 환경의 넓은 집을 얻으려 단축근무를 할 수 없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 점심먹고 1시에 집에 오는데, 그 때를 생각하면 내가 쓸 수 있는 총 2년의 단축근무 기간(아이 한 명 당 정부는 2년까지 허용한다)을 지금 헤프게 써버릴 수 없는 노릇. 그 때를 위해 지금의 단축근무 기간을 아껴야 한다. 그때 가서 다시 전업주부가 된다면 모를까, 그런데 전업주부가 되면 또 벌이가 줄어드니 아이는 지금보다 더 컸는데, 지금보다 넓은 집은 꿈도 못꾸겠지. 결론은 내가 계속 일해야 한다는 것과, 내가 일하기 위해선 지금 단축근무를 포기하고 아이를 저녁 7시까지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게 해야 한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인 하나같이 2~5%가 부족하다. 언뜻 보기엔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막상 수혜 계층에게 현실에선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개인 (경제) 사정에 의해, 회사 사정 때문에 등등의 이유로 그렇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건 끝끝내 알 수 없는 존재다. 맞벌이를 하고, 은행에 빚을 얻어 보고,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 제도를 만들 때 의사결정 단계에 참여하면 참 좋겠다. 그래야 '어린이집에서 저녁식사도 제공하는' 병신같은 시범사업이 나오지 않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