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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에 집착하는 여행자가 영국에서 살아남은 방법

by 뚜벅이는 윤슬 Feb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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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일간 세계여행을 하면서 가장 통제한 건 식비였다. 교통비, 입장료, 투어 비용은 사실상 아끼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출 구분 유일하게 한계 없이 아낄 있는 음식에 쓰는 돈이었다. 극단적으로는 아예 굶을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여행하는 동안 저녁은 투어 프로그램에 사가 포함되어 있거나 가족들과 함께 여행했던 크로아티아를 제외하고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을 발견했을 서럽기도 했지만, 최대한 많은 도시를 가고 싶은 욕심이 크긴 했는지 기어코 여행 마지막까지 저녁을 잘 참았다.

저녁 외에는 나라마다 상황마다 각기 다른 음식(혹은 음료로)으로 최대한 배는 채우면서 돈은 조금 지불하는 조합으로 식사했다. 


그럼 저녁은 먹고 아침을 거르면 되는 거 아닌가. 아침을 굶고 다니는 현대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더 낫지 않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 현대인에 나는 예외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저녁을 거르는 것과 별개로 꼭 아침 식사는 해야 했다. 아침 식탁에 어떤 음식이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침에도 당면, 햄이 가득 들어있는 부대찌개에 공기 뚝딱하고 등교했다. 상추쌈에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다. 아침에 먹는 없는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저녁은 굶어도 아침은 굶는 여행자가 것이다. 

해외에서 아침을 챙겨 먹는 방법은 나라마다 달랐다. 미국에서는 시리얼을 사서 우유를 부어 먹었고, 캐나다와 태국에서는 호스텔 조식으로 해결했다. 호주에서는 마트에서 호주산 소고기를 사서 소고기 샐러드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 외에는 대부분이 빵이었다. 특히 여행 코스에 유럽 국가가 가장 많았던 만큼 가장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빵으로 아침 끼니를 해결했다. 빵은 베이커리에서 구입할 때도 있었지만 90%는 마트에서 구입했다. 마트 빵이 가장 저렴했다. 개당 0.8유로도 안 하니 한국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가격이다. 

식비를 아끼는 데에 마트 빵은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해줬다. 특히 영국에서는.


 오전 출근 시간대나 점심시간대에 마트 혹은 역사 내 베이커리에 가면 직장인이나 학생들로 북적이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모두가 똑같이 샌드위치 하나, 음료 하나, 쿠키 과자와 같은 간식 하나를 집는 모습이 Ctrl+C Ctrl+V를 연상케 한다. 이 이색적인 장면은 영국의 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름은 'Meal Deal(밀 딜)'. 마트나 편의점 혹은 베이커리에서 만날 있는 조립식 세트 메뉴다. 샌드위치와 같은 빵이나 샐러드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스낵 코너에서 과자 혹은 과일을 선택하고, 음료 코너에서 하나를 선택해 저렴한 세트 가격에 있다. 세트 가격은 3~5파운드 사이. 영국은 특히 음료 가격이 비싼 편인데 Meal Deal을 이용하면 사실상 주스와 같은 음료는 0원에 가깝다. 외식 물가가 비싼 나라라 Meal Deal은 현지인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식사 옵션으로 자리 잡았다. 

아침식사에 집착하는 여행자에게도 고마운 세트 메뉴였다. 매일 아침, 숙소를 나오면 가장 먼저 마트로 향했다. 크루아상 같은 빵이나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여행 다니면서 마실 물을 고르고, 요거트나 과자까지 야무지게 손에 끼워 계산대로 향했다. 그렇게 3파운드에서 4파운드 사이를 내고 휴대용 장바구니에 구입한 것들을 넣었다. 그대로 킹스크로스역으로 직진! 킹스크로스역에는 벤치가 많은데 그중 작은 테이블이 붙어 있는 벤치가 항상 고정석이었다. 그곳에서 매일 저렴하게 산 Meal Deal 세트를 뜯어먹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빵을 먹고 우유를 마시는 건 영국 한정 아침 루틴이었다.

심지어 영국의 마트 빵은 언제나 훌륭했다. 크루아상은 버터를 많이 넣은 건지 고소했다. 항상 겉은 바삭하고 모양도 먹음직스럽게 부풀려져 있었다. 뺑오쇼콜라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뺑오쇼콜라를 이 가격에 먹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더 자주 선택했다. 샌드위치도 여러 번 사 먹었다. 한국 편의점처럼 영국 마트의 샌드위치도 종류가 다양했기 때문에 질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치킨 다음 날은 햄. 골라 먹다 보니 오히려 여행 기간 내 모든 Meal Deal 선택지를 먹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국내 도입이 시급한 문화라고 생각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영국을 여행하는 동안 하루의 시작을 책임져준 세트 메뉴는 한 나라의 랜드마크 같은 추억이 됐다. 영국 하면 Meal Deal!  매일 아침 같은 마트에서 빵을 고르고, 같은 벤치에서 식사를 하면서 영국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경험할 수 있었다. 현지 직장인들이 바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그 흐름 속에 한 조각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여행지에서의 식사는 배를 채우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 체험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행자의 일상 중 하나가 된다.

한국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볼 때면 영국에서 샌드위치를 고르던 시간들이 종종 떠오른다. 아끼려고 선택한 방식이 이렇게나 꼬리가 긴 추억이 됐다. 유명 식당에서 그럴싸한 메뉴를 먹지 못하는 게 당시에는 종종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이제 와서 깨닫는다. 화려한 레스토랑보다 평범한 마트에서 사 먹은 한 끼가 더 깊은 기억을 남긴다. 가난한 여행을 해서 다행이다.


먹었던 Meal Deal의 일부. 치킨 샐러드 샌드위치가 맛있어서 두 번 연속으로 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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