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죽음
대중문화, 특히 공포 영화는 죽음을 어떻게 디자인하는가?
화면 속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실의 죽음, 특히 현대 사회의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종종 지루하고, 느리고, 지극히 건조하다. 중환자실에서의 임종은 영화처럼 비장한 유언이 오가는 극적인 순간이 아니다. 그곳에는 기계적인 경고음, 소독약 냄새, 배설물의 악취, 그리고 의료진의 사무적인 사망 선고가 있다. 이것은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그리고 감정적으로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비영화적 사건이다.
그래서 미디어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스펙터클(Spectacle)이라는 이름으로 조작하고 가공한다. 영화감독들은 관객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죽음의 순간을 줌인(Zoom-in)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증폭시키며, 피의 색깔을 더욱 선명한 붉은색으로 보정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죽음을 자극적인 시각적 향연으로 탈바꿈시킨다.
[공포의 본질]은 앞서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을 다루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고귀한 ‘신전’으로 숭배하지만, 그 얇은 피부 아래 감춰진 장기와 뼈와 같은 적나라한 내부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난도질 영화(Slasher Movie)나 좀비 영화 같은 하위 장르들은 이 신체 혐오를 이용한다.
여기서 보여주는 죽음은 삶의 존엄한 마무리가 아니라, 영혼 없는 육체의 해체이자 내부의 적나라한 전시일 뿐이다. 전기톱이나 도끼가 살점을 파고드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희생자의 영혼이나 고통스러운 눈빛보다, 잘려나가는 뼈 마디들과 쏟아져 나오는 붉은 유기물의 물성에 더 집착한다. 이 순간 관객은 마구잡이로 해체되어 가는 인체의 메커니즘을 숨죽여 지켜보며 생물학적 충격에 압도당한다.
이 잔혹함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고유한 이름과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단지 외부의 물리적 타격에 의해 찢어지고 뭉개지는 연약한 고깃덩어리로 전락한다. 그렇게 공포 영화는 인간의 몸을 성소에서 도축장의 고기로 순식간에 격하시켜 버린다.
비평가들이 호러 영화를 두고 ‘죽음의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 of Death)’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내밀한 작동 방식이 포르노와 놀랍도록 닮아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가 사랑이라는 복잡한 감정과 인격적 관계를 거세한 채 성행위를 오직 기계적인 피스톤 운동과 특정 부위의 클로즈업으로 환원하듯, 이러한 영화들은 죽음을 생애의 마감이라는 장엄한 서사에서 분리해 오직 단백질의 해체 과정으로 환원한다.
영화 <쏘우(Saw)>나 <데스티네이션> 시리즈, 그리고 최근 OTT 플랫폼을 통해 더욱 정교해진 고어 콘텐츠들을 보면 그 점이 명확해진다. 여기서는 '누가' 죽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어떻게' 해체하느냐가 핵심이다. 관객은 서사보다 신체가 파괴되는 물리적 메커니즘에 집중한다. 두개골이 압력에 의해 분쇄되는 파열음, 동맥이 끊기며 솟구치는 선혈의 시각적 자극.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제거하고, 오직 ‘파괴되는 물성’만을 남겨놓은 죽음의 포르노다.
사람들은 화면 속, 잘리고 뜯겨 나가는 인간을 목격하며 서늘한 ‘생물학적 실재(The Real)’와 마주한다. 나의 자아와 정신이 사실은 뼈와 근육, 붉은 체액이라는 유기물 위에 위태롭게 얹혀있을 뿐이라는 사실. 결국 죽음의 포르노그래피는 인간을 고귀한 인격체가 아닌, 언제든 분해 가능한 유기적 부품으로 환원함으로써, 인간을 기괴한 시각적 쾌락과 서늘한 존재론적 허무 사이에 가두어버린다.
결국 공포 영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단지 살인마나 귀신에 의한 일차원적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몸이 언제든 ‘주체(Subject)’의 지위에서 ‘사물(Object)’의 지위로 추락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강등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그녀의 저서 <공포의 권력>에서 ‘비체(Abject)’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비체란 ‘나(주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물건(객체)’도 아닌, 그 경계가 모호하게 허물어진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벗겨진 피부 조각, 고름, 잘린 손톱, 혹은 한 움큼의 머리카락... 이것들은 방금 전까지 나의 일부였으나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더 이상 내가 아니지만 여전히 나의 흔적을 담고 있는 기괴한 ‘이물질’로 변한다. 주체와 객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에 걸려 있는 이 물질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교란한다. 그리고 이 비체의 정점에 시체(Corpse)가 있다.
그런데, 시체는 왜 그것을 대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아니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우리는 이성적으로 시체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시체 앞에서 본능적인 거부감과 뒷걸음질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이유는, 시체가 삶과 죽음, 인간과 사물의 경계, 그 모호한 위태로움 위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시체는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더 이상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책상이나 돌 같은 완전한 사물로 취급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인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불분명한 정체성이 우리의 인지 과정에 혼란을 주고, 그 혼란은 곧 공포와 혐오로 전환된다
더 깊은 차원에서 시체는 인간의 미래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거울이다.
방금 전까지 나와 대화하고, 웃고, 미래를 설계하던 한 사람이 심장이 멈추는 찰나, 신속히 처리해야 할 유기적 폐기물로 급격히 전환되는 상태. 시체는 인류가 쌓아 올린 ‘인간의 존엄’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반증이다. 시체 앞에서 “인간은 고귀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믿음은 힘을 잃는다. 그곳에는 의식과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 부패하기 시작한 단백질, 그리고 가릴 수 없는 악취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체를 대면하며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나의 지성과 감정, 공들여 쌓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사실은 언젠가 썩어 문드러질 고깃덩어리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었다는 사실을.
따라서 시체가 주는 근원적 공포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나의 존재 가치가 한순간에 생물학적 물질로 환원되는 존엄의 파산을 목격하는 데서 온다. 인류문명이라는 거창한 서사가 물질이라는 건조한 사실 앞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 인간은 깊은 실존적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참을 수 없는 역겨움과 존재의 허무를 견딜 수 없었기에, 인류는 장례라는 은폐 장치를 발명했다.
냉정하게 말해 장례의 본질은 사후 세계의 안녕을 비는 추모 이전에, 죽음이 지닌 비참한 물성을 산 자의 시야에서 격리하는 위생적, 심리적 처리 과정이다. 인류는 사체를 날것의 상태로 자연에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체가 부패하는 유기물의 상태로 삶의 영역을 오염시키기 전에 복원과 격리라는 이중의 방어막을 세웠다.사체를 다시 인격체로 보이게끔 하는 형태적 복원과, 사체를 산 자의 공간으로부터 영구히 분리하는 공간적 격리. 인류는 이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죽음이라는 비정한 실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온 것이다.
현대의 병원 장례가 택한 방식은 정교한 눈속임이다. 장례지도사는 시신을 닦아내고 최고급 수의를 입히는 염습(殮襲)을 통해 사체를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복구한다. 굳어버린 관절을 펴고 벌어진 입을 다물게 하며, 창백한 안색 위로 생기 있는 색조 화장을 덧칠하는 행위는 죽은 자만을 위한 배려가 아니다. 썩어가고 있다는 생물학적 사실을 지우고, '그의 육체는 잠들었고 영혼은 하늘에 갔어.'와 같은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산 자들의 필사적인 연막이다.
이러한 은폐의 욕망은 문화권마다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었다. 티베트의 조장(鳥葬)은 사체를 독수리에게 내어줌으로써 부패의 과정을 가장 신속하게 생략하는 공격적 정화 방식이며, 인도의 화장(Ghat)은 불의 에너지를 빌려 육체를 단숨에 기화시킴으로써 혐오스러운 물성을 소거하는 의식이다. 수천 년 전 피라미드의 미라 역시 부패라는 실재를 거부하고 영원한 조형물로 남으려 했던 인류의 저항이었다.
결국 관이나 무덤이라는 물리적 장벽은 시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죽음의 악취와 비체의 모호함이 산 자의 질서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심리적 격리벽에 가깝다.
그렇게 인류는 장례라는 고도로 연출된 무대를 통해 죽음이라는 ‘비체’를 안전한 거리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등 뒤로하고, 다시 안전한 일상의 질서로 복귀할 명분을 얻는 것이다.
파괴된 육체를 전시하는 공포 영화의 반대편에는, 죽음을 미학적으로 덧칠한 낭만화된 죽음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백조의 노래(Swan Song)’라고 부른다. 평생 울지 않던 백조가 죽기 직전에 단 한 번,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생을 마감한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이다.
문학과 예술, 특히 19세기 낭만주의와 현대의 멜로 영화는 이 ‘백조의 노래’를 죽음의 표준으로 만들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의 비올레타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면서 피를 토하는 대신,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며 우아하게 쓰러진다. 현대의 대중 매체 역시 이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다. 스크린 속 주인공들은 임종의 순간, 삶의 모든 지혜를 담은 명징한 유언을 남기고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고요히 눈을 감는다. 심장이 멈추는 찰나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외양과 평온한 미소는 죽음을 장식하는 중요한 미장센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묘사는 죽음을 삶의 아름다운 완성이자 숭고한 드라마의 종착점으로 그려낸다. 관객은 화면 속의 죽음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실제 죽음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정교하게 가공된 슬픔이라는 감정의 소비에 가깝다. 냄새, 고통, 그리고 비참함이 소거된 이 멸균된 이미지는 우리에게 "나의 죽음도 저렇게 우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착각을 심어준다.
최근 유행하는 ‘웰다잉(Well-dying)’ 열풍도 냉정하게 보면 이 낭만적 환상의 연장선에 있다. 물론 삶을 잘 정리하고 품위 있게 매듭지으려는 시도 자체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웰다잉은 종종 죽음의 스펙 쌓기로 변질된다.
때로, 현대인은 죽음마저도 실패해서는 안 될 마지막 비즈니스 프로젝트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장례식의 꽃 장식을 고르고, 입관 체험을 하고,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며 자신의 죽음을 디자인한다. 이 행위의 기저에는 은밀한 강박이 숨어 있다.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거나, 가족에게 짐이 되거나, 혹은 추한 몰골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곧 실패한 죽음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낙인이다.
이것은 임종을 앞둔 자에게 가하는 또 다른 형태의 세련된 폭력이다. 환자는 육체를 해체하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소위 품위를 지켜야 하고,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안온한 미소를 보여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린다. 웰다잉이라는 구호 아래, 죽음이 지닌 근원적인 처절함은 세련되지 못한 태도로 치부되어 은폐된다.
죽음의 과정을 관리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려는 이 시도는, 죽음의 야생적 실재를 마주할 용기가 없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할 뿐이다. 죽음마저 통제하려는 인간의 모습은, 어쩌면 죽음의 야생성을 거세하려는 현대문명의 결벽증을 보여준다.
환상을 걷어낸 현실의 죽음은 대부분 아름답지 않다. 임상 현장에서 목격하는 죽음은 백조의 노래가 아니라, 거친 동물의 헐떡임에 가깝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육체와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총체적인 소멸의 과정이다. 말기 암 환자의 병실을 채우는 것은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아니다. 그곳에는 마약성 진통제로도 잡히지 않는 통증의 신음, 기도로 역류하는 분비물이 만들어내는 거친 호흡,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배설과 실금이 실재할 뿐이다.
특히 뇌 기능의 저하로 찾아오는 섬망(Delirium)은 낭만적 유언에 대한 기대를 무참히 배반한다. 죽음 직전의 인간은 종종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거나, 공포에 질려 허공을 향해 의미 없는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이것이 생물학적 육체가 맞이하는 가감 없는 종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문학적 수사도 끼어들 틈이 없다. 오직 적나라한 생체의 소멸과 그로 인한 물리적 고통만의 남겨진다.
이제 지금까지 마주했던 죽음의 얼굴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검은 망토를 두른 저승사자,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 화면 속에서 살점이 뜯겨 나가는 좀비, 그리고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우아하게 눈을 감는 멜로 영화의 연인들까지.
인류는 다양한 죽음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모든 정교한 미장센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죽음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무'를 맨 정신으로 견디지 못해 만들어낸 환영이자,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연극의 소품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다. 마치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절을 하듯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형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마음속으로 그려놓은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서 홀로 있는 아이의 심리와 같다. 아이는 방 한편에 걸려 있는 옷을 보고 귀신이라 착각하여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나 아이를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은 실재의 옷이 아니다. 어두운 방에 있는 옷이라는 불확실한 대상 위에 아이의 뇌가 덧씌운 귀신의 형상이 두려움을 유발한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그저 생명 활동의 정지라는 건조한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인류는 그 텅 빈 캔버스 위에 해골을 그리고, 낫을 쥐여주고, 때로는 아름다운 천사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그 형상들 앞에서 두려움에 떨거나, 혹은 안도한다. 즉, 인간이 소비하는 죽음의 공포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류 내면에서 투사된 것이다.
"죽음은 무언가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다는 사실"
역설적이게도 인류에게는 이 명제가 악마나 지옥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공포였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미지를 덧칠하여, 그 공포스러운 ‘없음’의 자리를 ‘있음’으로 채워 넣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인류가 수천 년간 덧발라온 이 두꺼운 화장을 지워내려 한다. 화려한 미장센이 걷힌 텅 빈 무대, 조명이 꺼지고 소품들이 치워진 그 적막한 고요 속에 무엇이 있는지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 인류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가면 뒤에는 괴물도, 천사도, 낭만적 유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인류가 탐닉했던 공포조차 거주하지 않는다. 오직 아무런 수식도 필요치 않은 차갑고 무심한 ‘실재(The Real)’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