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디자인하다 (1)

죽음의 마장센

by Mind Thinker


공포의 본질 5편 [발명된 죽음] 4장


4장. 죽음을 디자인하다(1)

- 죽음의 미장센



1. 얼굴 없는 공포


미장센(Mise-en-scène)은 영화나 연극의 무대 속에 배치된 조명, 의상, 소품, 인물의 동선 등 모든 시각적 요소를 아우르는 말이다. 감독은 이 요소들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배열하여 관객이 느껴야 할 감정을 조각한다. 그런데 무대 밖 현실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욱 거대하고 집요한 미장센이 연출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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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을 꾸미고, 디자인하고, 특정한 이미지를 부여해 왔다.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이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죽음의 미장센이었다면, 그 기원은 문명이 태동하기 전 까마득한 원시의 동굴 속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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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은 시신 위에 붉은 황토를 뿌려 죽음의 창백한 안색을 생명의 색으로 덧칠했고, 고대 중국의 황족들은 육체의 부패를 거부하며 수천 개의 옥(玉) 조각을 이어 붙인 수의로 전신을 감쌌다. 바이킹은 불타는 배에 시신을 실어 죽음을 장엄한 항해로 연출했고, 현대인은 빈소를 가득 채운 국화꽃 향기로 죽음의 냄새를 지우고, 온화한 영정 사진과 검은 상복의 절제된 예법으로 죽음을 장식한다.


이처럼 죽음을 대하는 모습은 시대와 도구, 장소만 달라졌을 뿐 그 본질은 동일하다. 역사 속 인류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날것의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고 끊임없이 문화와 상징이라는 두꺼운 포장지로 겹겹이 감싸왔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그토록 집요하게 죽음을 디자인해 왔을까? 죽음 그 자체에는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죽음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인지하던 모든 감각이 소거되면서 생명 현상이 멈추는 정지 상태이자, 결국 존재의 형태가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사건일 뿐이다. 여기에는 냄새도, 색깔도, 표정도 없다. 죽음은 우리가 오감으로 포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단지 살아있음이 증발해 버린 ‘상태’에 가깝다.


인간의 뇌는 예측 불가능한 대상을 두려워하도록 진화해왔다. 눈앞에 칼을 든 강도는 무섭지만, 그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도망치거나 싸울 수 있다. 이것은 대처 가능한 공포다.


하지만 죽음은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숨어 있는 적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인 ‘나’ 자체가 증발해 버리는 절대적 소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며 생존을 도모하지만, 유독 죽음 이후만큼은 상상할 수 없다. 나(Ego)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뇌의 논리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물이 자기 자신을 비출 수 없듯이, 의식은 의식의 소멸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의 인지 구조가 닿을 수 없는 블랙홀이자, 입력값이 없는 무(無) 자체다. 싸울 대상도, 도망칠 곳도 없는 이 막막한 진공 상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원형이다.



이것이 인류가 태고적부터 죽음에 가면을 씌우는 작업에 매달려 온 이유다. 텅 비어 있는 허무의 공간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인간은 그 빈칸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공포에 형체를 부여하여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필사적인 시각화 전략. 그것이 해골이든, 검은 망토를 두른 사신이든, 혹은 평온하게 잠든 얼굴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무(Nothing)’가 아닌 ‘무언가(Something)’로 치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타협하거나 극복하려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날 인류가 소비하는 수많은 죽음의 이미지들은, 죽음의 본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얼굴 없는 공포를 견디기 위해 인류가 수천 년간 덧칠해 온 두꺼운 화장이자, 정교하게 연출된 미장센이다.



2. 인간처럼


서양의 ‘그림 리퍼(Grim Reaper)’나 동양의 ‘저승사자’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왜 하필 우리 인간과 닮은 형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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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세포 집단의 생물학적 정지이거나, 엔트로피가 극대화된 자연 현상이다. 그것은 태풍이나 지진, 혹은 바이러스처럼 의지도 목적도 없는 비인격적인 힘이어야 마땅하다. 사람들은 중력을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로 그리거나, 바이러스를 낫을 든 해골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죽음 앞에서만은 인류의 상상력이 끈질기게 작동하여, 그 모호한 현상에 기어이 팔과 다리를 붙이고 성격을 부여해 왔다.


여기에는 인간의 아주 오래되고 교묘한 심리적 방어 기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죽음을 인격체로 '격하'시킴으로써,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협상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려는 무의식적 의도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이라는 추상적 공포를 약탈자나 집행자의 모습으로 시각화해 왔다. 보이지 않는 공포에 육체를 부여하여, 최소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려는 본능적인 시도였다.


대표적인 예가 서양의 그림 리퍼(Grim Reaper)다.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며 죽음이 일상이 되었던 절망의 시기, 사람들은 죽음을 거대한 낫(Scythe)을 들고 생명을 수확하러 다니는 앙상한 해골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이 섬뜩한 이미지조차 역설적으로 인간에게는 위안이 된다. 만약 죽음이 아무런 이유도, 형체도, 의미도 없이 닥쳐오는 절대적 무(無)라면 인간은 막막한 공허에 질려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저 괴물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믿는 편이, 인과관계를 이해하기에는 훨씬 수월하다. 대항할 수 없는 허무보다는 싸울 수 있는 도망칠 수 있는 대상이 심리적으로 덜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동양, 특히 한국의 전통적 상상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죽음을 관료의 모습으로 그렸다. 검은 갓을 쓰고 명부를 든 저승사자는 괴물이라기보다 공무원에 가깝다. 그는 감정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상부의 명령을 받고 행정 절차를 집행하러 온 말단 관리다.


이러한 죽음의 관료화는 죽음에 질서와 규칙을 부여한다. 죽음이 무작위적인 사고가 아니라, 정해진 수명에 따라 집행되는 행정 행위가 되는 순간, 인간은 틈새를 발견한다.


행정에는 착오가 있을 수 있고, 뇌물이 통할 수도 있으며, 인정에 호소하면 시간을 벌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옛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저승사자에게 밥과 술을 대접하고 수명을 연장하거나,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실수로 다시 살아 돌아오는 서사는 이러한 틈새를 파고든다.


그렇게 죽음을 절대자가 아닌 실수할 수도 있는 인격체로 설정함으로써, 운명이라는 거대한 벽에 아주 작은 구멍을 뚫어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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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화권에서는 죽음을 천사나 매혹적인 연인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낭만주의 문학이나 예술에서 죽음은 종종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부드러운 손길로 나타난다. '죽음과의 키스"와 같은 은유가 보여주듯, 여기서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유혹의 대상이 된다.


이는 죽음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그것을 감미로운 이별로 포장하려는 고도의 심리적 마취제다. 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아름다운 존재가 나를 데리러 온다는 믿음은 임종의 순간에 닥쳐올 고독과 고통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해골이든, 관료든, 천사든, 인간이 죽음을 의인화하는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죽음과 대화하고 싶다."


죽음이 인격체라면 인간은 그와 마주 앉을 수 있다. 신화 속 시지프스처럼 죽음을 속일 수도 있고, 영화 <제7의 봉인>의 주인공처럼 죽음과 체스를 두며 시간을 끌 수도 있다. 설령 그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적어도 내 목숨을 앗아가는 대상과 눈을 마주치고 나의 마지막 감정을 전할 수는 있다.


그렇게 죽음을 ‘저승사자나 귀신’ 혹은 '천사와 악마'로 부르는 순간, 죽음은 절대적인 소멸의 상태에서 나를 찾아온 불청객으로 바뀐다. 불청객은 껄끄럽고 두렵지만, 문을 걸어 잠그거나, 사정하거나, 혹은 쫓아내려 시도해 볼 수는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만든 수많은 죽음의 형상들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다. 그것은 운명의 침묵 앞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어 내려는 인간의 처절하고도 슬픈 생존 본능이 빚어낸 미장센이다.


3. 죽음, 명품이 되다


무대를 17세기 네덜란드로 옮겨보자. 당시는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들이 전 세계의 금은보화와 향신료를 암스테르담 항구로 쏟아붓던 황금시대(Golden Age)였다. 자본주의의 태동기, 사람들은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에 취해 있었고 욕망은 끝없이 팽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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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행했던 정물화 양식인 바니타스(Vanitas)에는 기묘한 부조화가 존재한다. 화가는 캔버스 위에 당대 최고의 부를 상징하는 사물들을 배치했다. 이역만리에서 가져온 값비싼 후추, 화려한 튤립, 은식기, 그리고 탐스러운 과일들. 그런데 그 풍요로운 욕망의 한복판에 어김없이 불길한 물건 하나가 놓여 있다. 바로 해골이다.


앞서 4편에서 우리는 식탁이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공간임을 확인했다. 바니타스 회화 속의 해골은 그 욕망에 제동을 거는 강력한 도덕적 장치였다. 그 메시지는 명확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 네가 쌓아올린 이 모든 부와 쾌락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며, 너 또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해골로 표현된 죽음은 삶의 유한함을 일깨우는 엄숙한 경고이자, 신 앞에 겸손하라는 종교적 훈계의 도구였다.


그러나 신이 떠나고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이 해골의 의미는 기괴하게 뒤틀렸다. 죽음의 상징은 제단이나 서재에서 내려와, 백화점 쇼윈도와 갤러리의 가장 높은 진열대로 자리를 옮겼다.


영국의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가 제작한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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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제 인간의 두개골에 백금 틀을 씌우고, 무려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었다. 이 작품은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더 맥퀸의 스카프에 그려진 해골 문양은 록 시크(Rock Chic)라는 세련된 이름을 달고 전 세계 패션 애호가들의 필수 소장품이 되었다.


이것은 의미의 전복(Subversion)이었다. 과거의 해골이 '재물이 덧없음'을 경고하는 장치였다면, 현대의 해골은 그 자체로 가장 비싸고 화려한 욕망의 결정체가 되어버렸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 앞에서 누구도 겸손이나 허무를 느끼지 않는다. 오직 그 압도적인 가격과 화려함에 매혹될 뿐이다. 죽음은 그렇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과시하고 싶은 ‘명품(Luxury)’으로 탈바꿈했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은 죽음의 상징을 몸에 두르고, 거실에 장식하며, 일상에서 소비하는가?


이것은 자본주의가 발명한 고도의 심리적 방어 기제, 즉 공포의 길들이기(Taming)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을 가장 두려워한다. 죽음은 통제 불가능한 절대적 공포다. 하지만 그 죽음을 ‘상품’으로 만들어 가격표를 붙이는 순간, 역학 관계는 미묘하게 변한다.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해골 무늬가 그려진 고가의 명품을 들고 결제할 때, 무의식 속에서는 '나는 죽음이라는 공포마저 구매하여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본의 전능함이 작동한다. 이것은 마치 포효하던 맹수를 사냥해 ‘박제(Taxidermy)’해 두거나, 가죽을 벗겨 화려한 모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부드러운 껍질만 남은 박제된 공포앞에서 현대인은 더 이상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야성은 주인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물이 될 뿐이다.


이렇게 현대인은 죽음을 상품으로 소비함으로써,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세련됐다”는 자아도취에 빠진다. 죽음조차 쇼핑백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이 될 때, 실존적인 공포는 잠시나마 마취되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박제(Taxidermy)된 공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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