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진화하는 거대 파놉티콘

by Mind Thinker

공포의 본질 5편 [발명된 죽음] 3장.


제3장. 지옥

- 진화하는 거대 파놉티콘


1. 영토 없는 제국


인류의 지성사가 축조해 낸 공간 중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가학적인 건축물을 꼽자면 단연 ‘지옥’일 것이다. 이 붉은 제국은 지구상 그 어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위도와 경도가 없고, 물리적인 영토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옥은 지난 수천 년간 수십억 인간의 뇌리에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가장 공포스럽게 각인된 실재하는 영토였다.


사람들은 지옥을 육체의 수명이 다한 뒤, 즉 죽음 이후에야 당도하게 될 형이상학적 세계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선의 방향을 달리하면, 지옥의 전혀 다른 본질을 보게 된다. 지옥은 사후세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철저히 ‘현세의, 현세에 의한, 현세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발명품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지배 권력에게는 풀리지 않는 난제가 하나 있었다. 국가는 시민의 신체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조직하고, 법을 어긴 자를 가두기 위해 감옥을 세웠다. 하지만 물리적 공권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왕의 칼날은 백성의 목을 칠 수는 있어도, 그 백성이 속마음으로 왕을 저주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행동은 처벌할 수 있어도, 생각과 욕망은 법의 사정권 안에 가둘 수 없었다.


지옥은 이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탄생했다. 세속의 권력이 인간의 ‘물리적 신체’를 가두는 감옥을 만들었다면, 종교적 권력은 인간의 ‘내면’을 가두는 지옥을 설계했다.


지옥이라는 설계도는 단순하지만 잔혹하다.

“죽음 이후에도 심판은 끝나지 않으며, 육체는 영원히 처벌받는다.”

이 무시무시한 기본값(Default)이 설정되는 순간, 인간은 법과 도덕이 닿지 않는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 안에서도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시공에서도, 누군가(신)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옥은 감시자나 카메라 없이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무형의 통제 장치가 되었다. 때문에 지옥은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호기심만이 아니라 공포라는 감정이 권력의 하부 구조로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규명하는 정치·문명사적 시각으로 탐구해야 한다.



2. 잔혹한 형벌의 전시장


지옥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그곳이 단지 악인들의 소굴이어서가 아니라 인류가 고안해 낸 육체적 고통의 무한 전시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설계도면의 커다란 모순과 마주한다. 신학적으로 영혼은 비물질이다. 영혼에는 신경계와 뇌가 없기 때문에 통증을 전달할 수용체도 없다. 논리적으로 영혼은 불에 타지도, 얼지도, 찢기지도 않아야 한다. 빛이 유리를 통과하듯, 물리적 형벌은 영혼을 그저 스치고 지나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인류의 종교사는 이 논리적 모순을 무시하고, 영혼에게 기어이 가상의 육체를 입혀놓았다. 공포는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만 학습되기 때문이다. 살이 타는 냄새,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피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옥의 설계자들은 영혼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그 형벌의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육체적(Somatic)으로 구현했다.


인류사의 지옥도를 펼쳐보면 그곳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학적인 고문 실험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테의 '신곡(Divina Commedia)'은 서양의 대표적인 지옥 안내서다. 단테가 묘사한 지옥은 죄의 무게에 따라 형벌의 물성이 달라지는 정교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탐욕스러운 자들은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서 튀겨지고, 폭력적인 자들은 끓는 피의 강물(Phlegethon)에서 익사한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깊은 지옥인 코키투스(Cocytus)다. 배신자들은 불이 아니라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머리만 내놓은 채 갇혀 있다. 이는 영원한 고립과 냉기라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기피하는 감각을 극대화한 것이다.


동양의 상상력은 더욱 해부학적이고 반복적이다.


불교의 팔열팔한(八熱八寒) 지옥 중 등활지옥(等活地獄)의 작동방식은 섬뜩하다. 옥졸들이 죄인의 몸을 칼로 회를 뜨듯 잘라내 죽이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살이 다시 돋아난다. 그리고 죄인은 부활하자마자 또다시 찢기고 잘려 죽는다. 이것은 고통의 강도뿐만이 아니라 반복에도 초점을 맞춘 설계다.


흑승지옥(黑繩地獄)에서는 달궈진 쇠줄로 몸을 묶고 목수처럼 톱으로 썬다. 여기서 톱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죄인의 신경을 천천히 끊어내는 극상의 고문 기구다.


이슬람의 지옥 ‘자한남(Jahannam)’은 고통에 가장 민감한 말초신경을 태우는 공포를 설계했다. 코란은 지옥의 형벌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의 피부가 불에 타 없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들에게 새로운 피부를 입혀줄 것이다. 그들이 고통을 온전히 맛보게 하기 위해서다.” (코란 4장 56절)


고대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통각 신경이 피부에 밀집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경이 타버리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므로, 신은 친절하게도 신선한 새 피부(신경)를 다시 만들어 주며 고통을 지속시킨다.


도교의 지옥은 여기에 사법적 심판의 공포를 더한다. ‘시왕(十王)’이 다스리는 지옥 법정은 죄인의 혀를 뽑거나(발설지옥), 거울을 통해 자신의 죄를 강제로 시청하게 한다(업경대). 이것은 육체적 고통에 수치심이라는 정신적 고통을 결합한, 매우 고도화된 형벌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 잔혹한 상상력들조차 결국 ‘인간의 육체’라는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자신이 경험해 본 감각 너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점을 태우는 유황불, 뼈마디를 얼리는 혹한, 혀를 뽑아내는 쇠갈고리, 식도로 들이붓는 끓는 납물, 척추를 썰어내는 톱날... 이 모든 살벌한 도구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상의 고문실과 도살장에서 빌려온 것들이다.


즉, 지옥은 신이 창조한 초월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신경계가 수집한 감각 경험을 바탕으로, 고통의 강도만을 무한대로 증폭시켜 재구성한 가상의 무대일 뿐이다.


그런데 현실의 고문실과 지옥 사이에는 생물학적 자비라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현실의 육체는 고통이 임계점을 넘으면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인간은 기절하거나, 혼수(昏睡) 상태에 빠지거나, 끝내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탈출한다. 죽음은 고통의 끝이자, 피고인에게 허락된 마지막 도피처다.


하지만 지옥에는 이 생물학적 안전장치가 제거되어 있다.


지옥의 설계자들은 죄인들에게서 실신(失神)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자비를 압수했다. 그곳에는 기절도 없고, 죽음의 종착지도 없다. 신경은 타들어가지만 의식은 명료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지옥이 가진 공포의 정점, 즉 죽을 수 없는 상태다.


어떤 면에서 소멸은 축복이다. 소멸하면 고통도 주체와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옥은 소멸을 영원히 유예시키고, 고통은 무한히 연장한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태.'


이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공포의 종착점이다. 지옥의 설계자들은 영생이라는 인류의 가장 간절한 소망을 살짝 비틀어, 영원한 고통이라는 가장 강력한 협박 도구를 완성해 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선언,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저주였다.


3. 보이지 않는 감옥, 심리적 파놉티콘


왜 인류 문명은 이토록 끔찍한 가상공간을 필요로 했을까? 신학의 대답은 영혼의 구원이겠지만, 정치공학적 시선은 다르다. 그 시선 속 지옥은 지배자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공간이다.


지배 권력의 입장에서, 피지배층을 물리적으로 감시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성벽을 높이 쌓고, 곳곳에 형리(刑吏)를 배치하고, 반란을 제압할 군대를 유지하는 일은 국가 재정을 갉아먹는 하마였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물리적 감시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촘촘한 감시망이라도 사각지대는 존재하며, 감시자의 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범죄와 모반은 언제나 싹트기 마련이다.


때문에 권력자들에게는 감시자가 없어도 작동하는 감시 체계, 즉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통제 시스템이 절실했다. 그래서 심판의 교리 즉, 신의 눈을 만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신은 보고 있다. 그리고 신은 반드시 심판을 한다.”


이 믿음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기본값(Default)으로 자리 잡는 순간, 사회는 거대한 전환을 맞이한다. 외부에 있던 감시자가 인간의 의식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골방에 혼자 있을 때조차 죄를 짓지 못한다. 현실의 감시자는 따돌릴 수 있어도,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전지전능한 시선’은 따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은 벽돌 한 장 쓰지 않고 건설된,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장 완벽한 감옥이 되었다.


이 구조는 파놉티콘(Panopticon, 원형 감옥)의 설계원리와 일치한다. 파놉티콘의 중앙 감시탑은 어둠에 숨어 있기 때문에, 죄수들은 간수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설계의 핵심은 실제 감시 여부가 아니라, 언제든 감시당할 수 있다는 시선의 비대칭성이었다. 이 불확실한 공포 때문에 죄수는 결국 스스로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신이 실제로 나를 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고, 행동을 교정한다. 즉, 지옥을 믿는 인간은 죄수이자 동시에 간수가 되는 것이다.


이 자기 검열 의식은 세속의 법보다 훨씬 더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 국가의 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처벌한다. 칼을 휘두르지 않는 한, 살인 충동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감옥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옥의 법은 ‘생각’까지 처벌한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교리는 권력이 인간의 가장 내밀한 상상력과 무의식까지 통제하겠다는 정신에 대한 계엄령이나 다름없다. 지옥은 행위 이전에 범죄의 의지 자체를 꺾어버리는, 가장 고도화된 내면의 검열 장치였다.


그렇게 지옥은 현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거대 구조물이 되었다.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지옥은 신앙의 영역을 넘어 계급과 윤리를 지탱하는 핵심 기둥으로 기능했다.


세금과 십일조를 거부하는 것, 불효하는 것, 왕권과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것 등은 영원한 고통의 지옥불에 떨어질 대죄로 규정되었다. 권력은 지옥 공포를 이용해 체제에 대한 순응을 ‘신의 뜻’으로 포장했다.


동시에 지옥은 사회적 모순을 일시적으로 잠재우는 강력한 마취제였다. “착하게 살면 천국 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 간다”는 권선징악의 논리는, 현실의 불평등에 신음하는 약자들에게 “지금의 고통은 죽어서 보상받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악한 영주나 탐관오리가 당장 처벌받지 않더라도, 민중은 “그는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며 분노를 유예했다.


즉, 지옥은 약자들에게는 억울함을 달래주는 진통 마취제였고, 강자들에게는 혁명을 막아주는 든든한 방어막이었다. 지옥의 공포는 법보다 빠르고, 주먹보다 강력했으며, 무엇보다 통치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지원군이었다.



4. 지옥, 신이 설계하고 자본이 완성하다


21세기에 들어 종교적 지옥의 유황불은 그 화력을 잃었다. 과학과 이성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끓는 기름 가마나 뿔 달린 도깨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류를 통제하던 그 강력한 지옥은 소멸했는가?


아니다. 지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교묘하고 세련되게 진화했다.


종교가 떠난 권좌를 자본주의가 차지하면서, 지옥은 사후세계의 경계를 넘어 현실세계로 영토를 확장했다. 과거의 지옥이 타락한 자를 심판하는 공간이었다면, 현대의 지옥은 경쟁에서 도태(淘汰)된 자를 처벌하는 냉혹한 공간이다.


심판관 또한 교체되었다. 인간의 선악을 기록하던 생명책과 생사부(生死簿)는 폐기되었고 그 빈자리를 자본이 설계한 금융 알고리즘이 꿰차고 앉았다. 신은 침묵하지만, 신용점수는 잠들지 않고 실시간으로 현대인의 생존 자격을 평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것은, 중세 시대에 파문을 당해 공동체 밖으로 추방당하는 것과 다름없는 사회적 사형 선고다.


현대인이 무의식 중에 그리고 있는 지옥도를 펼쳐보자. 그곳의 풍경은 고전적 종교화보다 훨씬 더 건조하고 기계적이며, 그래서 더 섬뜩하다.


뿔 달린 악마가 쇠창을 들고 서 있던 자리에는, 초단위로 노동자를 감시하는 AI 알고리즘과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해고 통지서가 서 있다. 죄인의 이마에 영구히 찍히던 낙인 대신, 가슴에는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비정규직 명찰과 계약직 사원증이 달린다. 죄인을 태우던 불의 강(Phlegethon) 대신, 숨만 쉬어도 통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월세와 공과금, 그리고 줄지 않는 마이너스 통장의 복리 이자가 흐른다.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가 가득했던 공간은, 타인의 SNS를 훔쳐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연결망 없는 적막과 고독이 대신 채운다.


현대의 지옥은 가상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좌표를 가지고 있다.


화려한 마천루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곳, ‘서울역의 차가운 타일 바닥’, ‘창문 없는 고시원의 곰팡이 핀 벽’, ‘폭우가 쏟아지면 잠기는 반지하 방’, ‘고독사가 발생한 고립의 공간’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펄펄 끓는 유황불의 고통이 아니라, 경제적 파산과 함께 사회적 관계가 모두 끊긴 채 서서히 말라비틀어지는 냉동(冷凍)의 공포를 겪는다.


“가난, 무능, 추락, 고립, 폐기.”


이 냉혹한 단어들은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발명한, 가장 효율적인 고문 도구들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죽어서 지옥 갈까 봐'를 두려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현대인은, '죽지 않고, 이 지옥 같은 현실에 영원히 남겨질까 봐' 두려워한다.


앞에서 우리는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을 목격했다. 그들이 느끼는 최종적인 공포는 단순히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 밖으로 밀려나 투명 인간이 되는 것, 즉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지옥은 죄인(실패자)을 죽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존엄을 박탈하고, 소비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거세할 뿐이다.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헬조선이라는 담론은 단순한 자조가 아니었다. 불교에는 쉴 새 없이 고통이 이어진다는 뜻의 무간지옥(Avici, 無間地獄)이 존재한다. 노력해도 계층 사다리를 오를 수 없고, 아무리 일해도 빚이 줄지 않는 상태. 이것이 ‘무간지옥’의 현대적 해석이다.


여기서 지옥의 설계자들은 희망의 변종이라는 형벌을 추가했다. 그것은 투기와 한탕주의라는 이름의 환각제다.


“누구는 주식과 코인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더라”, “누구는 부동산으로 수십억을 벌었다더라.”


미디어가 쏟아내는 이 극소수의 ‘성공 신화’는 지옥에 갇힌 죄수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 신화는 “너도 운이 좋다면 탈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가난을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나의 선택과 불운’ 탓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결국 현대인은 노동의 가치를 버리고 투기판이라는 가파른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자본주의적 시지프스’가 되었다.


결국 자본주의가 설계한 이 신형 지옥은,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끊임없이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게 만드는 '자존감의 감옥'이 되었다. 이곳에서 옥졸이 따로 없다. 인간은 실패한 자신을 혐오하며 스스로를 고문한다. 이것이야말로 더욱 잔혹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진화한, 21세기 지옥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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