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되기를 거부하는 망령들
죽음은 철저한 물리학적 그리고 생물학적 사건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생명은 에너지를 사용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이고, 죽음은 에너지가 흩어지며 무질서(엔트로피)가 극대화되는 상태다. 심장이 멈추면 혈액 순환이 끊기고, 세포는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괴사하며, 육체는 박테리아와 미생물에 의해 탄소, 질소, 수소, 인으로 분해된다. 이렇게 생명 시스템은 종료된다.
그리고 자연계의 그 어떤 동물도 이 종료 버튼을 부정하지 못한다. 사바나의 사자는 사냥한 가젤의 시체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체는 떠나간 영혼의 빈집이 아니라,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고기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명백한 생명의 마침표를 쉼표로, 혹은 도돌이표로 억지로 바꾸려 한다. 인간은 죽음을 물리적 해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단절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확장의 결과물이 바로 ‘유령’이다. 사람들은 흔히 유령을 초자연적 현상이나 미지의 공포로 인식하지만, 엄밀히 말해 유령은 ‘인지적 오류(Cognitive Error)’이자, ‘시간의 체증(Indigestion of Time)’이다.
4편에서 상한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해 구토감을 느끼는 인간의 육체를 보았듯, 인간의 뇌는 죽음이라는 거대하고 충격적인 정보를 제대로 소화(이해, 수용)하지 못했을 때 일종의 정신적 역류를 일으킨다.
죽음은 ‘과거 완료형’이어야 한다. 하지만 뇌가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사건은 식도에 걸린 떡처럼 ‘현재 진행형’으로 고착된다. 유령은 바로 이 막혀버린 시간, 즉 소화하지 못한 과거가 뱉어낸 ‘기억의 토사물’이다. 죽은 자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산 자가 그들을 보내지(소화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화하지 못한 기억은 어떤 과정을 통해 눈앞의 형상으로 나타나는가? 이 과정을 진화심리학은 ‘과민성 행위자 탐지 기제(HADD, Hyperactive Agency Detection Device)’라고 말한다. 원시 인류에게 숲속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생사가 걸린 신호였다. 그 소리가 바람 소리인지 맹수 때문인지 불확실할 때, 뇌는 일단 '저건 의도를 가진 존재(맹수)다'라고 가정하도록 진화했다. 그래야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의미 없는 패턴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편집증적 습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생존 본능이 ‘시간의 체증’과 만나면 치명적인 문제(Bug)를 일으킨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 마음이 공허해 있을 때, 창문이 덜컹거리면 뇌는 바람이라는 물리적 원인보다 그가 돌아왔다는 심리적 이유를 먼저 탐색한다. 뇌는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가장 익숙한 정보(죽은 자의 얼굴)를 허공에 덧씌운다.
결국 유령은 외부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신호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 뇌의 편집증적 습관(HADD)과, 죽음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시간의 체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홀로그램이다.
우리는 앞에서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낳은 슬픈 괴물, ‘좀비’를 목격했다. 좀비와 유령은 둘 다 죽었으되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죽지 않은 자(Undead)’라는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 둘은 마치 거울 안팎의 존재처럼 정반대의 생존 방식을 취하고 있다.
거울 밖의 존재가 영혼 없이 서성이는 육체라면, 거울 안의 존재는 육체를 잃고 갇혀버린 영혼이다. 이 대조는 인간이 죽음을 대할 때 느끼는 공포가 두 가지 경로로 분화됨을 보여준다. 하나는 ‘정신을 잃은 육체(좀비)’에 대한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잃은 정신(유령)’에 대한 공포다.
좀비는 ‘영혼이 소거된 육체의 과잉’ 상태다. 그들에게는 사고(Thinking)도, 기억(Memory)도, 자아(Self)도 없다. 남은 것은 오직 생물학적 충동, 즉 ‘식욕’뿐이다.
4편에서 우리는 육체가 어떻게 음식을 탐닉하고 배설하는지를 다루었는데, 좀비는 그 육체적 기능만이 극대화된 존재다. 그들은 배가 불러도 먹고, 장기가 썩어가도 씹는다. 이는 3편에서 분석했듯, 자본주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무한 소비의 주체이자, 생각 없이 노동하고 소비하는 현대인의 비극적 은유다.
좀비의 공포는 물리적이고 공간적이다. 그들은 쇼핑몰을 점거하고, 거리를 메우며,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 그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질량(Mass)’으로서 산 자를 압박한다. 좀비에게는 개성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떼(Crowd)로 존재한다. 이는 '나 또한 저 무의미한 군중 속의 하나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개별성 상실’의 공포를 자극한다. 좀비는 죽음 이후에 ‘의미’는 사라지고 끔찍한 ‘기능’만 남을까 봐 두려워하는 인간의 불안을 형상화한다.
반면, 유령은 ‘육체가 소거된 정신의 잉여’ 상태다. 유령에게는 위장이 없다. 따라서 식욕도, 배설의 욕구도, 부패에 대한 걱정도 없다. 대신 그들에게는 ‘할 말(Logos)’이 남아 있다.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차이다. 좀비가 입을 벌려 물어뜯으려 한다면, 유령은 입을 벌려 말하려 한다. “나는 억울하다.”, “나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다오.”...
유령은 육체라는 거처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멸하기를 거부하는 ‘기억과 감정의 덩어리’다. 좀비가 본능만 남은 짐승에 가깝다면, 유령은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다. 그들은 생전의 기억, 원한,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것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때문에 좀비가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것과 달리, 유령은 언제나 ‘단독자(Individual)’로 나타난다. 그들은 각자 고유한 사연과 이름을 가지고 우리 앞에 선다.
이 차이는 두 존재를 퇴치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좀비는 물리적인 존재다. 따라서 그들을 막는 방법 또한 물리적이다. 벽을 세우거나, 뇌 기능을 정지시키거나, 육체를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한다. 이렇게 좀비와의 싸움은 ‘물리학적 전쟁’이다.
하지만 유령에게는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벽을 통과하고, 칼을 휘둘러도 베이지 않는다. 유령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령은 산 자의 뇌 속 시냅스 사이에 끼어 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장’이자, 사회적 맥락 속에 부유하는 ‘기호(Sign)’다. 어떤 물리적 힘으로도 이 문장을 파괴할 수는 없다. 문장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문법에 맞는 ‘마침표’를 찍는 것뿐이다.
즉, 유령과의 싸움은 ‘해석학적 전쟁’이다. 그들이 왜 돌아왔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굿(Ritual), 해원(解寃, Resolution), 진상규명 등과 같은 마침표를 찍어주어야만 유령은 비로소 사라진다. 좀비는 태워 없애야 할 무의미한 ‘잔해(Debris)’에 불과하지만, 유령은 남은 자들이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의미(Meaning)’로 다가오는 것이다.
좀비는 '미래가 없는 현재'만을 탐욕스럽게 사는 존재다. 반면 유령은 '과거가 되기를 거부하는 현재'에 갇힌 존재다. 인간이 좀비를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존엄이 ‘고깃덩어리’로 전락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고, 유령을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삶이 끝나도 해결하지 못한 감정이 ‘찌꺼기’처럼 남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공포의 본질은 이렇게 육체의 과잉(좀비)과 정신의 잉여(유령)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왜 어떤 죽음은 한 줌의 재가 되어 깔끔하게 잊히고, 어떤 죽음은 악귀가 되어 산 자의 방문을 두드리는가? 프로이트는 그의 기념비적 논문 '애도와 우울(Mourning and Melancholia)'에서 이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유령의 탄생 여부는 ‘심리적 소화’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애도는 리비도(정신적 에너지)를 죽은 대상으로부터 서서히 거두어들여, 새로운 대상으로 옮기는 ‘이별 연습’이다. 사람들은 충분히 울고, 충분히 슬퍼함으로써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를 기억이라는 안전한 ‘추억의 서랍’에 넣고 닫는다. 이것이 잘 소화된 죽음이다. 소화된 음식물이 영양분이 되어 내 몸의 일부가 되듯, 잘 애도한 죽음은 흡수되면서 내면을 성숙하게 한다.
반면, ‘우울(Melancholia)’은 이 소화 과정이 실패했을 때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 즉 ‘심리적 체증’ 상태다. 사고나 범죄처럼 죽음이 너무 갑작스럽고 끔찍하거나,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풀지 못한 애증이 남아있을 때, 남겨진 자의 자아는 대상을 놓아주기를 거부한다. 상실을 인정하는 순간 닥쳐올 고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무의식은 극단적인 방어 기제를 선택한다. 대상을 밖으로 떠나보내는 대신, 입을 벌려 그 대상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를 ‘내사(Introjection)’라 부른다.
내사는 일종의 ‘심리적 식인 행위’다. '네가 내 안에 들어오면, 너는 죽은 게 아니라 나와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이야'라는 무의식적 믿음이다. 그러나 문제는 삼킨 대상이 내면에서 소화되지 않은 채 썩어간다는 점이다. 위장이 이물질을 거부하며 구토감을 일으켰듯, 자아는 이물질(죽은 타인)을 견디지 못하고 병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삼킨 죽음은 사라지지 않고 나의 무의식 안에서 기생한다. 내 안의 목소리가 죽은 자의 목소리로 변조되어 들리고, 나의 죄책감이 죽은 자의 형상으로 투사된다.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이 섬뜩한 환청은 사실 유령의 말이 아니다. 내가 삼킨 타인이, 나의 자아를 갉아먹으며 내지르는 ‘자기 비난’의 목소리다.
즉, 유령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삼킨 타인이 나의 피부를 찢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유령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산 자의 병든 자아가 만들어낸 ‘증상(Symptom)’이다.
이 증상은 개인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크 라캉의 관점에서 유령은 ‘상징계(The Symbolic)의 구멍’이다. 인간 사회는 법, 언어, 장례 의식과 같은 ‘상징계’를 통해 죽음을 처리한다. 의사가 사망 진단서를 쓰고, 장례 지도사가 염습을 하고, 유가족이 삼일장을 치르는 일련의 과정은 죽음을 ‘사회적 질서’ 안으로 안전하게 편입시키는 거대한 소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면 죽음은 ‘사건’이 아닌 ‘기록’으로 남고, 유령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 학살, 대형 참사, 묻지마 살인과 같은 죽음은 이 시스템으로 설명되지 않는다.'착하게 살던 내 딸이 왜 하필 거기서 죽어야 해?' 이 질문에 대해 사회, 법, 종교가 합당한 대답을 내놓지 못할 때, 상징계라는 견고한 벽에는 구멍이 뚫린다. 그 뚫린 구멍을 통해, 언어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공포,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진실, 즉 ‘실재(The Real)’가 튀어나온다.
인간은 이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구멍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유령이다.
한국의 전통 귀신들이 대부분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이나 떠돌이 ‘객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 시대의 유교적 상징계에서 ‘여성’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야 완성되는 존재였다.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여성은 시스템 내에 안착할 자리가 없는 ‘잉여’다. 그들은 상징계의 문서인 족보에 오르지 못하고 배제된다. 시스템이 설명하지 못하고 뱉어낸 이 잉여들은, 질서 바깥을 떠돌며 밤마다 문을 두드린다. 나를 설명해 달라'고, '내가 앉을 자리를 달라'고.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참사 이후 도시 곳곳에서 목격되는 서늘한 공포는, 그 죽음들을 아직 사회적 언어로 충분히 해명하고 애도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유령은 사회의 견고해 보이는 구조가 사실은 실패했음을 알리는 섬뜩한 경고등이다. 상징계가 죽음을 처리하지 못해 구멍이 뚫렸을 때, 유령은 그 구멍을 통해 현실 세계로 침입하여 사회구조를 교란한다. 그러므로 유령을 없애는 방법은 퇴마 의식이 아니라, 그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합당한 언어와 정의를 찾아내어 뚫린 구멍을 다시 꿰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