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삶에의 애착이 드리운 그림자
공포의 본질 5편(발명된 죽음) 1장
[공포의 본질]은 지금까지 긴 여정을 통해 공포의 여러 얼굴을 벗겨왔다. 1편에서 공포가 실재가 아니라 기억과 문화가 직조한 ‘이야기(Narrative)’임을 확인했고, 2편에서는 문화가 주입한 ‘코드(Code)’임을 보았다. 3편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인간을 사유하지 못하는 ‘좀비’로 만들었음을, 4편에서는 그 억압된 공포가 어떻게 ‘식탁과 몸’을 통해 비틀린 방식으로 분출되는지를 목격했다.
이야기, 문화, 시스템, 몸. 이 모든 공포의 갈래들이 결국 향하는 단 하나의 종착지가 있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두려움의 원형이자, 그 어떤 도구로도 완전히 해석할 수 없는 검은 구멍. 바로 ‘죽음’이다.
우리가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생존의 위협(굶어 죽음) 때문이고, 고립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적 매장(사회적 죽음) 때문이며, 질병을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의 소멸(생물학적 죽음) 때문이다. 즉, 모든 공포는 ‘사라짐’에 대한 저항의 변주곡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누구든, 인간은 죽음을 모른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이라는 하얀 공백(The Void) 위에 ‘공포’라는 가장 자극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제 우리는 그 마지막 그림을 해체해야 한다. 공포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기 위해서.
현대인은 매일 죽음을 목격한다. 아침 뉴스에서는 사고 현장의 사망자 숫자가 데이터로 송출되고, 점심시간에는 스마트폰으로 유명인의 부고 기사를 클릭하며, 저녁에는 영화 속에서 좀비들과 타자들이 찢겨 나가는 장면을 소비한다. 병원에는 시신 안치실이 있고, 도심 외곽에는 추모공원이 들어선다. 그렇게 죽음은 너무나 흔하고, 명백하며, 일상적인 현실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죽음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그 모든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었다. 우리는 사망 직후 고인의 식어가는 육체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장례식장에서는 국화꽃 너머의 영정사진을 마주한다. 손끝에 닿았던 차가운 체온과 사진 속의 멈춰버린 미소. 그 감각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죽음을 직접 겪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나는 '죽음 그 자체'를 경험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생명이 떠난 육체라는 물질'을 관찰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상실감'이라는 산 자의 감정을 겪었을 뿐이다. 이것은 나의 죽음 자체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생존자로서 타인의 죽음을 관찰한 사건에 대한 경험이다.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는 죽음을 세 가지 인칭으로 구분했다. 3인칭 그의 죽음. 이것은 통계수치나 뉴스 속의 사건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거나, 건조한 유감만을 느낀다. 그리고 2인칭 너의 죽음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의 죽음이다. 이것은 찢어지는 고통과 상실감을 주지만, 여전히 이것은 '남겨진 나의 삶'의 문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1인칭 나의 죽음. 이것이야말로 진짜 죽음이다. 그러나 장켈레비치는 단언한다. "1인칭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라고.
이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죽음이란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죽음이 도래하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명제, '내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왔을 때 나는 없다'는 말은 이 존재론적 엇갈림을 정확히 꿰뚫는다.
문법적으로도 "나는 죽었다"라는 문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이 문장을 발화하는 주체가 이미 과거 시제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오직 '죽어가는 과정(Dying)'뿐이다.
공포는 바로 이 논리적 모순의 틈에서 태어난다. 뇌는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정보로 처리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은 반드시 온다. 뇌는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요리를 해야 하는 요리사처럼 당황한다. 뇌에게 있어 '입력값은 없는데 결과값은 도출해야 하는'이 논리적 오류 상황은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다. 그래서 뇌는 이 정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장 강력한 경고 신호를 생성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의 본질이라 믿고 있는 '공포'다. 즉, 죽음 공포는 실재하는 위협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뇌의 인식론적 오류가 만들어낸 버그(Bug)다.
그렇다면 뇌는 왜 죽음을 '평온한 무(Nothingness)'가 아니라 '끔찍한 공포'로 해석하는가? 이는 인간 뇌의 핵심 작동 원리인 '예측 처리(Predictive Processing)' 구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쉼 없이 미래를 시뮬레이션(simulation)하는 기계다. 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며 바깥 풍경이 펼쳐질 것이고, 컵을 내려놓으면 탁자가 단단하게 받쳐줄 것이라는 믿음. 이와같은 예측들이 적중할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며 삶을 지속한다. 뇌는 이 학습된 본능에 따라 ‘죽음’이라는 미래 또한 시뮬레이션하려 든다. 그런데 여기서, 뇌는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에 직면한다.
뇌는 '자기가 없는 상태'를 가상적으로도 체험할 수 없다. 잠시 눈을 감고 '나의 죽음, 곧 내가 없는 상태'를 상상해 보자. 칠흑 같은 어둠이 보이는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이 느껴지는가? 좁은 관 속에 갇힌듯한 답답함이 느껴지는가? 무한의 검은 우주가 보이는가? 그것은 당신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당신은 '어두운 장소에 갇혀 있는 살아있는 나'를 상상한 것이다. 당신의 뇌는 여전히 시각 피질을 사용해 '검은색'을 보고 있고, 청각 피질을 사용해 '적막'을 듣고 있으며, 편도체를 사용해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마치 '눈(eye)으로 눈 자신을 보려는 시도'나, '카메라로 카메라 자신을 찍으려는 시도'와 같다. 카메라는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지만, 정작 렌즈 뒤에 있는 자기 자신은 찍을 수 없다. 거울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프레임 안에 넣을 수 없듯, 뇌 또한 '자신이 사라진 상태'를 인식의 프레임 안에 담을 수 없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카메라 렌즈 덮개를 닫고 셔터를 누르면 무엇이 찍히는가? 아무것도 없음(Nothing)이 찍히는 게 아니라, 검은색(Black)이라는 색깔이 찍힌다. 인간의 뇌도 똑같은 오류를 범한다. 뇌는 '의식의 전원 꺼짐'을 상상하려 할 때, 입력값이 없는 상태를 '무(無)'로 인식하는 대신 '칠흑 같은 어둠을 보고 있는 상태'로 시각화한다.
즉, 인간은 죽음을 감각의 소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각만 남은 채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는 감각'으로 오역하는 것이다. 뇌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없음'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이 '검은 감옥'이다.
과학적으로 죽음은 마취나 깊은 수면(비렘수면) 상태, 혹은 격투기에서의 실신(Knockout)과 가장 유사하다.
전신 마취를 받아본 사람은 그 상태를 경험한다. "하나, 둘, 셋..."을 세다가 눈을 뜨면 수술은 끝나 있고 회복실의 천장이 뿌옇게 보인다. 그 사이에는 어둠도, 고통도, 꿈도, 시간의 흐름도 없다. 말 그대로 '삭제된 시간'이다.
권투나 격투기에서 턱을 맞고 기절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링 위에서 쓰러진 선수는 그 이후의 타격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눈을 뜨면 심판이 카운트를 세고 있거나, 이미 경기가 종료된 후다. 관중들은 그가 처참하게 쓰러지는 것을 보며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당사자의 기억 속에서 그 시간은 통째로 잘려 나간다. 그들에게는 쓰러져 있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맞기 직전’, 그리고 ‘깨어난 직후’가 이어져 있을 뿐이다.
이것이 죽음의 가장 가까운 실재다. 죽음은 검은 어둠 속에 갇히는 답답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텔레비전의 전원 코드를 뽑는 것처럼, 인식의 회로가 끊어지는 완벽한 차단(Switch Off) 상태다. 입력값도 없고, 출력값도 없는 상태. 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데이터 없음(No Data)’이다.
하지만 뇌는 이 '데이터 없음' 상태를 공포로 받아들인다. 진화론적으로 뇌는 생존을 위해 설계되었지, 소멸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위해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뇌에게 ‘없음’은 곧 ‘정보의 단절’이고, 정보의 단절은 야생 상태에서는 곧 ‘죽음의 위기’를 뜻했다.
그래서 뇌는 죽음이라는 '무(無)'의 공간을 비워두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데이터 중 가장 부정적인 것들을 긁어모아 채워 넣었다. 고통, 추위, 고독, 질식감, 영원한 격리... 인간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죽음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뇌가 ‘알 수 없음’이라는 공백을 견디지 못해,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가져와 덧칠해 놓은 슬픈 ‘환영의 그림’ 일 뿐이다.
죽음은 미래의 사건이다. 10년 뒤일지, 내일일지, 5분 뒤일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두려워하는가?
죽음은 미래 어느 시점의 사건이지만, 공포는 철저히 '현재의 감정'이다. 인간은 시간을 직선적(과거-현재-미래)으로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 비상한 능력은 문명을 건설하는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예정된 종말’을 미리 당겨와서 겪게 하는 저주가 되었다. 뇌는 멀리 있는 미래의 죽음을 포착하여, 그것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위협으로 간주한다. 몸은 안전한 현재에 머물러 있는데, 정신은 이미 파국적 미래에 가 있는 이 ‘시차의 부조화’ 상태가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 상태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고 정의했다. 그는 죽음을 삶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외부 사건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떠받치는 내부 조건으로 보았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다. 언제든 다시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명백한 ‘끝’이 있기에 시간은 희소해지고, 희소하기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은 절박한 가치를 지닌다. 하이데거에게 불안이라는 죽음에 대한 자각은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함몰된 삶에서 벗어나 나의 진짜 삶을 살게 만드는 실존적 동력이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 생산적인 실존적 불안을 용납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관점에서 죽음은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와 생산을 중단시키는 불필요한 위험요인이자 비용일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죽음이 주는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고, 대신 그 자리를 ‘관리 가능한 상품’들로 재빨리 채워 넣는다.
이 ‘죽음의 상품화’ 과정은 교묘하다. 보험 회사는 가장의 죽음을 존재의 소멸이라는 철학적 사건이 아니라, ‘남겨진 가족의 경제적 빈곤’이라는 금융 문제로 치환한다. 상조 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음을 삶의 엄숙한 마침표가 아닌, 최고급 수의와 리무진을 소비하는 ‘마지막 쇼핑’으로 전락시켰다. 심지어 노화방지(anti-aging) 산업은 노화와 죽음을 자연스러운 섭리가 아닌, 자기 관리의 실패이자 정복해야 할 ‘질병’으로 규정한다. 즉, 자본주의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사건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제적 문제’로 격하시킴으로써 공포를 판매한다.
이러한 자본의 구조는 치명적인 인지 왜곡을 낳는다. 현대인은 죽음을 ‘삶의 형태를 완성하는 경계선’이 아니라, ‘막아야 하고, 늦춰야 하며, 보상받아야 하는 재난’으로 인식한다. 죽음은 ‘평온한 안식’이 아니라 ‘자산의 손실’이나 ‘피해야 하는 재난’이 된다. 이것은 미래를 주체적으로 선취(先取 , Pre-emption)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공포에 현재를 저당 잡히는 꼴이다.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이미 와 있는 삶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죽음 공포는 ‘시간 왜곡의 산물’이다. 당신이 느끼는 심장 박동, 거칠어진 호흡, 식은땀은 죽음이라는 실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뇌가 시뮬레이션한 가짜 미래에 몸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10년 뒤의 죽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머릿속에서 상영되고 있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재난 영화’를 보고 떨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 밤마다 우리를 잠 못 들게 하고, 건강염려증 환자로 만들고, 불로장생을 꿈꾸게 만드는 그 공포의 대상은 실재가 아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주체의 소멸)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세상에서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들은 엄밀히 말해 죽음의 속성이 아니라 ‘삶의 속성’이다. 죽음 이후에는 고통도, 망각에 대한 인지도, 분리의 슬픔도 없다. 그것을 느낄 ‘나’라는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이 거대한 공포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한 뜨거운 애착이 만들어낸 그림자'다. 삶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삶이 끝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뇌가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짙고 거대한 괴물의 형상을 하게 된다.
결국 죽음 공포란, 뇌의 모의실험 실패가 낳은 오류이자, 타인의 죽음을 보며 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투사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며, 삶을 놓지 않으려는 본능이 만들어낸 슬픈 방어기제다.
인간은 죽음을 모른다. 그리고 ‘모른다’는 사실이야말로, 죽음을 공포로 채우지 말아야 할 이유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일 뿐이다. 그 문 뒤에 괴물이 있다고 소리치는 것은, 문을 열어보지 않은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이제, 우리는 그 허상의 껍질을 벗기고 공포가 사라진 자리, 그 텅 빈 캔버스 앞에 서서 나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