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떠난 자리, 몸이 차지하다
공포의 본질 4편 7장.
― 신이 떠난 자리, 몸이 차지하다
인류 역사에서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생물학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잇는 신성한 제사 의식이었다. 외부의 물질을 나의 내부로 들이는 행위는, 곧 '내 몸이라는 신전(Temple)에 무엇을 들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영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전의 문인 '입'을 통제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중요한 계율이었다.
역사적으로 모든 고등 종교는 엄격한 금기(Taboo)를 가지고 있다. 유대교의 코셔(Kosher), 이슬람의 할랄(Halal), 힌두교의 소고기 금지, 불교의 육식(중국 대승불교에서 정착된 교리)및 오신채(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興渠)등의 자극적인 채소) 금지 등은 대표적 금기들이다. 이 까다로운 규칙들은 현대 영양학이나 위생 관념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흔히 돼지고기 금기를 두고 뜨거운 사막 기후에서의 '부패와 기생충 감염 위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냉장 시설이 없던 고대에 치사율 높은 질병을 유발하는 돼지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수천 년을 이어온 이 강력한 종교적 혐오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생태학적 생존 본능과 인지적 분류 체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분석했듯, 중동의 척박한 환경에서 돼지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식량 경쟁자였다. 소나 양이 인간이 못 먹는 풀을 먹고 젖과 털을 주는 반면, 잡식성인 돼지는 인간이 먹을 곡물과 많은 양의 물을 탐냈고 이동 생활에도 부적합했다. 즉, 고대 중동인들에게 돼지사육은 경제적으로 부적합한 행위였다.
여기에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분류학적 모호함'을 더한다. 인간은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 대상을 불길하게 여긴다. 구약성서 레위기의 분류법에 따르면, 땅의 짐승은 소나 양처럼 '굽이 갈라져 있고' 동시에 '새김질'을 해야 정결하다. 하지만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 즉 분류의 경계를 교란하는 기만적인 존재였다.
결국 돼지는 위생적으로는 질병의 근원이었고, 생태적으로는 인간의 식량을 약탈하는 적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신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부정한 괴물'이었기에 식탁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힌두교의 소고기 금지 역시 돼지고기만큼이나 강력한 금기다. 흔히 힌두교도들이 소를 숭배해서 먹지 않는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처절한 생존의 경제학이 숨어 있다.
고대 인도 농경 사회에서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다. 암소는 인간에게 단백질(우유)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어머니'였고, 수소는 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트랙터'이자 '엔진'이었다. 게다가 소의 배설물은 땔감과 비료로 쓰이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만약 기근이 들었다고 소를 잡아먹는다면, 당장은 배를 채울 수 있겠지만, 농사를 지을 동력을 잃어 결국 온 가족이 굶어 죽을 수도 있게 된다. 즉, 소를 먹는 행위는 미래의 생산 수단을 파괴하는 자살 행위였던 것이다.
이 절박한 생존의 법칙은 종교적 율법으로 승화되었다. 소는 '가우 마타(Gau Mata, 어머니 소)'이자 우주의 질서(Dharma)를 수호하는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소고기를 먹는 것은 어머니를 살해하는 패륜이자, 공동체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는 가장 끔찍한 범죄로 규정된 것이다.
유대교(코셔)와 이슬람교(할랄)가 공통적으로 '동물의 피'를 엄격히 금지하는 것 또한 깊은 종교적 공포와 맞닿아 있다. 고대인들에게 피는 곧 생명(Soul) 그 자체였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가 빠져나가면 생명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생명은 인간이 창조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오직 신의 영역이었다. 인간이 살기 위해 고기를 먹을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생명(피)까지 취하는 것은 신의 권한을 침범하는 불경한 행위였다.
따라서 그들은 도축할 때 단번에 경동맥을 끊어 고통을 줄이고, 체내의 피를 완전히 빼내는 의식을 치렀다. 이것은 단순한 요리법이 아니다. "고기(육체)는 인간이 취하지만, 피(생명)는 신에게 돌려드립니다"라는 두려움과 경외의 선언이다.
불교에서의 금기 역시 독특한 점을 시사한다. 불교는 살생을 금하기에 육식을 피하지만, 여기에는 윤리적 이유 외에도 '정신적 오염'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
동물이 도살당할 때 느꼈을 극심한 공포와 분노가 고기에 잔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맑은 정신(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데, 고기에 담긴 '탁한 에너지'가 수행자의 내면을 어지럽힌다고 보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양파) 등 다섯 가지 매운 채소인 '오신채(五辛菜)'의 금지다. 보통 채식주의자들은 환영하는 이 채소들을 스님들은 왜 피할까?
스님들은 답한다. "이것들을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음욕)이 동하고, 날로 먹으면 화(성냄)를 돋운다."
즉, 이 식재료들이 가진 강한 향과 에너지가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자극하여, 고요해야 할 수행자의 마음을 '폭동'처럼 흔들어 놓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불교에서 음식 금기는 신의 명령이라기보다, 나의 정신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철저한 자기 검열의 결과다.
이처럼 인류에게 금기(Taboo)란 단순한 식사 규칙이 아니라, 거친 자연과 혼돈으로부터 공동체의 생존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세운 필사적인 '울타리'였다.
히브리어로 '거룩함(Kadosh)'의 어원이 '구별됨'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은 금기를 통해 본능대로 먹어치우는 짐승과 구별되고, 신의 질서를 따르는 문명인은 야만과 구별되어야 했다. 그 구별의 가장 확실하고 매일 반복되는 표식이 바로 음식이다.
분류의 경계를 허무는 기만적인 돼지를 거부함으로써 인지적 '질서'를 수호하고, 생산 수단인 소를 먹지 않음으로써 공동체의 '미래'를 도모하며, 자극적인 오신채를 피함으로써 본능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을 증명한다. 즉, "우리는 이것을 먹지 않는다"는 선언은, "우리는 본능을 통제하고 사회적 약속을 지키는 문명인이다"라는 정체성의 확인인 것이다.
이때, 음식은 단순한 영양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기호(Sign)이자 세계관이 된다. 금지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탈이 나는 위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합의한 분류 체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생존 규칙을 위반하는 위험한 도박이다.
때문에 금기를 어기는 행위는 곧 ‘오염(Pollution)’으로 간주된다. 내가 속한 세계의 질서가 깨어지고, 신의 보호막 밖으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원초적 공포. 입은 그 신성함(질서)과 속됨(혼돈)을 가르는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인간은 그 앞에서 언제나 두려움과 경외를 느끼며 숟가락을 들어야 했다.
금기(Taboo)가 '무엇을 먹지 말라'는 소극적 규율이라면, 금욕(Asceticism)은 '먹는 행위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신에게 다가가려는 적극적 투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구도자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위장이 가득 차면 정신은 혼미해지고, 혈관에 영양이 넘치면 육체의 욕망이 날뛴다는 사실을. 배부른 사자는 사냥하지 않듯, 배부른 인간은 신을 찾지 않는다. 포만감은 인간을 나태하고 둔감하게 만들지만, 굶주림은 감각을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밥그릇을 엎었다. 그들에게 배고픔은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육신의 두께를 얇게 깎아내어 영혼을 투명하게 만드는 신성한 연금술(Alchemy)이었다.
기독교의 초기 사막 교부들에게 식탐(Gluttony)은 7대 죄악 중 하나였다. 그들은 식욕을 모든 욕망의 뿌리이자 '악마가 들어오는 통로'로 보았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도 결국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탐했기 때문이 아닌가. 따라서 수도사들은 거친 빵과 물만으로 연명하며, 위장이 비어있을 때 찾아오는 육체적 현기증을 신성한 영적 체험으로 환치시켰다. 뇌가 포도당 부족에 시달릴 때 발생하는 환각이나 비몽사몽의 상태는, 그들에게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접신의 순간으로 해석되었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굶주림으로 인한 케톤체(Ketone bodies)의 생성과 호르몬 변화가 뇌를 각성 상태로 만들어, 신비 체험을 유도한 것이다.
이슬람의 라마단(Ramadan) 역시 이 원리를 극대화한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이 극한의 금식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식욕, 갈증)를 차단함으로써 오직 신(Allah)만을 갈망하게 만드는 장치다. 무슬림들에게 공복의 고통은 징벌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내 몸으로 기억하는 공감의 훈련이자, 나의 육체적 본능을 의지의 발아래 꿇어앉힘으로써 신을 향한 경외심(Taqwa)을 증명하는 영적 승리의식이다.
동양의 종교들은 한발 더 나아가, 굶주림을 통해 생사(生死)의 경계를 넘으려 했다. 불교는 수행자들에게 오후불식(午後不食)을 권한다. 과식은 수면욕과 성욕을 부추겨 맑은 정신(Sati)을 흐리기 때문이다. 불교는 탐식이 많은 고통의 근원이라 가르치며, 적게 먹는 것이야말로 집착을 끊고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보았다. 힌두교의 요기(Yogi)들 또한 단식(Upavasa)을 통해 몸속의 독소와 함께 업(Karma)을 태워 없애려 했다. 그들에게 먹는다는 것은 업보의 사슬을 잇는 행위였기에, 단식은 윤회의 고리를 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자이나교의 '산타라(Santhara)'다. 이는 곡기를 완전히 끊고 물조차 마시지 않은 채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수행이다. 자살과는 다르다. 이것은 육체라는 낡은 옷을 가장 경건하게 벗어던지는 행위이자, 물질세계에 대한 완전한 무집착을 실현하는 최고의 성취로 여겨진다.
이 모든 종교적 금식의 본질은 결국 '동물성(Animality)에 대한 인간 정신의 승리'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어 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다. 그러나 꼬르륵거리는 위장의 아우성을 의지로 제압하고, 숟가락을 놓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금욕주의자들은 믿었다. 육체를 학대하고 비워낼수록, 그 빈자리에 신성이 차오른다고. 그들에게 굶주림은 결핍이 아니라 역설적인 충만이었다. 내가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금식은 나의 의지가 나의 본능보다 우위에 있음을 선포하는, 가장 육체적이면서도 가장 비물질적인 기도였다.
현대 사회에서 신의 권위는 추락했다. 종교의 율법은 낡은 것이 되어 도서관 구석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식탁 위의 종교적 엄숙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건강'과 '웰빙(Well-being)'이라는 세련된 과학의 옷을 입고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부활했다.
오늘날의 '클린 이팅(Clean Eating)' 열풍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깨끗하게 먹는다'는 표현 자체에 이미 종교적 순결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대인은 과거의 사제들처럼 음식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있다.
가공식품, 글루텐, 설탕, GMO, 트랜스지방은 현대판 '부정한 음식'이다. 이것들은 과거의 돼지고기처럼 우리 몸(신전)을 오염시키는 독(Toxin)이자 악(Evil)으로 규정된다. 반면 유기농 채소, 슈퍼푸드, 해독 주스, 닭가슴살은 현대판 '성찬'이다. 이것들을 섭취함으로써 우리는 몸 안의 독소를 배출하고(회개하고), 정결한 상태(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맥락에서 '디톡스(Detox)'는 현대인의 회개 의식이다. 현대인은 주말에 치킨과 맥주로 폭식(죄)을 저지른 뒤, 월요일부터 해독 주스를 마시며 몸을 정화하려 한다. 간헐적 단식이나 저탄고지와 같은 식단은 수도사의 금식 수행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신을 만나기 위해 굶었지만, 지금은 '더 나은 나', '최적화된 신체', '영원한 젊음'을 만나기 위해 굶주림을 견딘다는 점뿐이다.
건강염려증(Hypochondria)을 넘어, 건강한 식습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건강식품 강박증(Orthorexia Nervosa)'이라는 새로운 병명이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식탁이 병원이 아니라 성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순수한 음식을 먹으면 나도 순수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주술적 믿음이 깔려 있다.
신은 죽었지만,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형태가 '과학'과 '건강'이라는 현대적 외피를 쓰고 식탁 위로 옮겨왔을 뿐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여전히 매 끼니 엄숙한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다. 과거의 신전(Temple)은 '몸'으로, 경전(Scripture)은 '영양학'으로,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Priest)는 '의사와 트레이너'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죄(Sin)의 자리는 '칼로리'가 차지했다.
이제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시험지다. 당신이 무엇을 먹느냐는 당신이 얼마나 자기 관리에 철저한지, 얼마나 윤리적인지(비건, 공정무역 등), 그리고 얼마나 세련된 계급적 취향을 가졌는지를 증명하는 성적표가 되었다. 이 새로운 교리 안에서 비만은 질병을 넘어선다. 그것은 게으름과 무절제, 자기 통제 실패라는 '도덕적 타락'의 징표이자, 현대판 주홍글씨다.
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감정의 매커니즘은 중세 시대와 소름 끼치도록 일치한다. 다이어트 중 몰래 치킨을 먹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그것은 깊고 끈적한 죄책감(Guilt)이다. "나는 의지가 약한 인간이야", "내 몸을 더럽혔어"라는 자책은, 계율을 어긴 신자가 느끼던 종교적 수치심과 일치한다. 그들은 헬스장이라는 고해소에서 땀을 흘리며 속죄의 고행을 치러야만 비로소 용서받았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반대로 식단을 완벽히 통제하고 체지방률을 한 자리로 깎아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도덕적 우월감 그 자체다. '나는 내 본능을 정복했다'는 이 오만한 자부심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선택된 자들에게만 부여하는 새로운 구원(Salvation)의 증표다.
신은 떠났지만, 심판관은 여전히 식탁 위에 앉아 있다.
현대인은 매 끼니, 숟가락을 들 때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저울 위에 올라선다. 내가 먹는 이 음식이 나를 구원할 생명수인지, 아니면 나를 타락시킬 금단의 열매인지 끊임없이 검열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며 느끼는 공포의 실체다. 현대인은 단지 살이 찌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이성이 육체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패배감, 통제력을 잃고 타락의 구덩이로 굴러떨어질지 모른다는 '자기 붕괴'의 공포. 우리는 그 오래된 원초적 두려움에 쫓겨, 오늘도 맛없는 샐러드를 씹으며 구원을 갈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