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감은 어떻게 윤리가 되는가
공포의 본질 4편 5장
― 혐오감은 어떻게 윤리가 되는가
인간의 뇌, 그중에서도 대뇌피질 깊숙한 곳에는 뇌섬엽(Insula)이라는 독특한 기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본래 미각을 처리하는 중추이자, 상한 우유나 썩은 고기를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활성화되어 구역질을 일으키는, 생존을 위한 구토 관제 센터다.
흥미로운 점은 노약자가 폭행당하거나, 파렴치하고 비도덕적인 행위 등을 목격했을 때 번쩍이며 반응하는 뇌의 부위 역시 바로 이 뇌섬엽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불공정한 제안을 받았을 때 입술을 찡그리는 근육의 움직임은, 쓴맛을 보았을 때의 표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뇌는 부패한 음식과 부패한 인간을, 화학적으로는 다를지언정, 똑같이 역겨운 존재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혐오의 기원은 분명 생물학적이었다. 태초의 인류에게 역겨움은 독, 병원균, 기생충, 오물로부터 신체를 방어하기 위한 진화의 선물이었다. "우웩" 하고 토해내는 반사 작용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육체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사회적 관계가 생존의 핵심이 되면서, 인류는 이 원초적인 방어 기제를 물리적 세계에서 사회적 세계로 확장했다. 일종의 '진화적 재활용(Evolutionary Co-option)'인 셈이다. 뇌는 물리적 독소를 피하는 회로를 재사용하여, 사회적 독소를 피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도덕적 결함을 묘사할 때 미각적 은유를 사용한다. 뇌물을 받은 정치인을 보며 '더럽다'라고 하고, 억울한 판결을 보며 '신물이 난다'라고 하며, 비열하고 잔인한 범죄 뉴스를 보며 '토 쏠린다'고도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적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도덕적 분노를 느낄 때, 위장은 수축하고 입맛은 떨어지며 속은 메스꺼워진다. 도덕적 위반은 뇌에게 있어 일종의 '오염 물질'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도덕적 혐오가 가장 적나라하게 충돌하는 최전선은 바로 매일 마주하는 식탁이다. 인간의 혀는 이제 단맛, 짠맛, 쓴맛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제6의 맛인 선(善)과 악(惡)을 미각적으로 감별하기 시작했다.
앞 4장에서 다룬 역겨움이 곤충이나 내장 같은 낯선 재료를 향했다면, 5장에서 다루는 도덕적 혐오는 그 이면의 '과정'을 향한다.
마트 정육 코너에 선홍빛 고기가 진열되어 있다. 스티로폼 접시 위에 담겨 투명한 랩으로 깔끔하게 포장된 그 고기에는, 시각적으로나 후각적으로 역겨울 요소가 전혀 없다. 핏물은 닦여 있고, 털은 제거되었으며, 내장은 보이지 않는다. 위생적으로 완벽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깨끗한 고기 앞에서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을 느낀다. 그들의 뇌는 눈앞의 마블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고기가 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생략된 비명’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A4 용지보다 좁은 장에 갇혀 날개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알만 낳다 폐사하는 닭, 태어나자마자 수컷이라는 이유만으로 산 채로 분쇄기에 갈려 나가는 병아리들, 마취도 없이 꼬리가 잘리고 거세당하며 오물 위에서 평생을 보내는 돼지들.
공장식 축산의 잔혹한 영상(Footage)을 한 번이라도 목격한 사람에게, 접시 위의 고기는 더 이상 단순한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응고된 고통’이자 ‘비명의 결정체’다. 심리학자 폴 로진이 말한 '오염의 법칙'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잔혹한 학대 과정이 고기의 본질(Essence)을 오염시켰기에,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그 고기에서는 '비윤리의 맛'이 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때 느끼는 혐오감은 미각적 거부가 아니라 윤리적 거부다. 혀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 끔찍한 잔혹함을 내 몸 안으로 들여와, 나의 피와 살로 만들 수 없다." 이 선언은 인간이 동물적 본능(식욕)을 억누르고 윤리적 주체로 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현대인의 혀는 진화했다. 우리는 이제 물리적 맛을 넘어, 그 음식에 담긴 사회적 이력(Biography)을 맛본다. 부드러운 아보카도에서는 멕시코 카르텔의 탐욕과 칠레의 가뭄이 섞인 ‘피 묻은 과일’의 비릿함을, 전쟁 자금을 대는 기업의 음료수에서는 매캐한 화약 냄새를 맡는다. 달콤한 초콜릿에서는 서아프리카의 카카오 농장에서 학교도 못 가고 하루 12시간씩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들의 땀과 눈물을 감지한다. 그리고 값싼 팜유에서 인도네시아의 울창한 열대우림을 불태우고, 터전을 잃은 오랑우탄이 화상을 입은 채 죽어가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 모든 비윤리적 서사가 음식의 맛을 오염시킨다. 입은 달콤함을 느끼지만 뇌는 쓰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에 묻어 있는 가치를 먹는다. 그리고 그 가치가 내 신념과 충돌할 때, 몸은 그것을 독으로 간주하고 기꺼이 뱉어낸다. 이것은 까다로움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씹어 삼킬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슬픈 구역질이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 질문은 더 이상 단순한 취향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은 어떤 세상을 지지합니까?"라고 묻는 엄중한 정치적 질문과 동의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힘을 보여주는 장소는 광장이었다.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세상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시장 만능주의가 세계를 잠식한 현대 사회에서, 강력하고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투표소가 아닌 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이루어진다. 현대인은 매일 밥상을 위해 투표를 한다.
채식주의, 공정무역 커피, 동물복지 달걀, 친환경 포장재를 선택하는 행위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투표다. 나의 돈이 잔혹한 도살장이 아닌 윤리적 농장으로 흘러가기를, 나의 한 끼가 아동 착취 기업이 아닌 공정한 조합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투표'인 것이다. 반대로 특정 기업의 제품을 먹지 않겠다(불매운동)는 선언은, 부도덕한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유권자의 탄핵 소추안과 같다.
여기서 혐오감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 사회적 연대의 강력한 동력이 된다. 공장식 축산에 대한 집단적 혐오,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공유된 분노, 기후 위기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우리는 같은 것을 혐오한다'는 사실만큼 강력한 결속력은 없다. 사람들은 같은 메뉴를 고름으로써, 같은 도덕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식구(食口)'이자 '동지'임을 확인한다. 이제 식탁은 사적인 휴식 공간이 아니다. 나의 신념을 전시하고, 타인의 신념을 확인하며, 세상을 보는 가치가 충돌하는 치열한 이념의 전장(Battlefield)이다. 메뉴판의 강령을 보며 입은 도덕을 맛본다.
하지만 모든 도덕에는 그림자가 있다. 혀가 도덕적이 될 때, 식탁에는 위계(Hierarchy)가 생긴다.
"나는 유기농 채소와 방사유정란만 먹어. 공장식 고기나 가공식품은 입에 대지 않아. 동물복지 축산농장의 고기만 골라 먹어" 이 말은 "나는 환경을 생각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깨어있는 시민이다"라는 건강한 자부심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타인을 향한 잣대가 될 때, 그것은 "너는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를 먹는구나"라는 은밀하고도 오만한 경멸로 변질되기도 한다.
게다가, '윤리적 식탁'을 차리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동물복지 인증 고기는 일반 고기보다 두 배는 비싸다. 유기농 채소 또한 별도의 매대에서 비싼 값으로 판매한다. 게다가 무엇이 윤리적인지를 공부하고, 신선한 재료를 다듬어 요리할 수 있는 별도의 시간도 필요하다.
즉, '클린 이팅(Clean Eating)'을 실천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장을 보고, 건강과 도덕을 담은 재료를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 역설적으로 경제적 자본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자들의 특권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쁜 일용직 노동자, 신선한 식재료를 파는 마트가 없는 '식품 사막(Food Desert)'에 사는 빈곤층, 육아와 야근에 시달려 요리할 시간이 없는 맞벌이 부부, 매일 주어지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학생과 직장인에게 3,000원짜리 햄버거와 편의점 도시락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들에게 "지구를 위해 채식하세요", "동물복지 식품을 섭취하세요. 공정무역 제품을 쓰세요"라는 말은 공허한 도덕적 설교일 뿐이다.
그런데 '깨어있는 미식가'들은 종종 이 맥락을 소거한 채 혐오의 눈빛을 보낸다. 정크푸드에 대한 혐오는 곧 '가난하고 게으른 삶에 대한 혐오'로 교묘하게 치환된다.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저런 걸 먹는구나.' '지구가 아파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 고기나 탐식하는 무지한 사람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듯, 취향은 계급을 구별 짓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계급적 구별 짓기는 명품 가방이나 외제차보다 먼저 '윤리적 소비'에서 벌어진다. 부유할수록 더 날씬하고, 더 친환경적이며, 더 도덕적인 식탁을 가질 확률이 높다. 그 특권을 도덕성으로 포장하여 타인을 '윤리적으로 무지하고 불결한 존재'로 낙인찍을 때, 도덕적 혐오감은 세상을 정화하는 정의가 아니라 타인을 배제하는 계급적 무기가 된다.
도덕적 혐오가 진정한 윤리가 되려면, 그 끝은 타인에 대한 배제가 아니라, 그들이 그러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분노와 공감이어야 한다.
음식은 외부의 물질이 나의 몸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방식이다. 따라서 먹는 행위는 내가 세상과 맺는 관계의 방식을 의미한다.
인류의 혀는 이제 맛을 느끼는 감각 기관을 넘어, 세상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까다로운 심판관이 되었다.
이 진화한 혀는 상한 음식을 뱉어내듯, 부당한 노동을 뱉어내고, 잔인한 도살을 뱉어내고, 파괴된 환경을 뱉어내려 한다. 이것은 분명 인류의 도덕적 진화 과정이다. 당장의 미각적 쾌감보다 보이지 않는 타자의 고통을 먼저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특유의 윤리적 능력, 즉 '공감의 미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도덕적 혀가 가진 양날의 검을 직시해야 한다. 도덕의 혀가 뱉어낸 혐오가 구조가 아닌 개인만을 향할 때, 식탁은 폭력의 장으로 변질된다. 때문에 도덕의 혀는 '무엇을 먹지 않는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누군가는 그런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가(구조)'를 질문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혐오는 정크푸드를 먹는 사람이 아니라 정크푸드 외에는 선택지를 주지 않는 기형적인 식품 산업 시스템을 향해야 한다. 구조를 향한 분노는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혐오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혐오는 도덕과 함께 독선을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