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겨움의 정치학

본능 위에 쓰인 문화의 문법

by Mind Thinker


공포의 본질 4편 4장.


제4장. 역겨움의 정치학


1. 역겨움의 해부


입은 항문과 더불어 인간의 신체 중 외부와 내부가 통하는 가장 적나라한 구멍이다. 인간은 이 구멍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외부의 물질을 내 몸 안으로 들여와 피와 살로 바꾼다는 것은, 자칫하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위험’을 허락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은 최후의 검문소를 세운다. 독이 든 것, 썩은 것, 병원균이 득실거리는 것이 들어올 때, 몸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혀는 쓴맛을 감지해 거부 신호를 보내고, 식도와 위장은 요동치며,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토해낸다. 이것이 역겨움의 원초적 기원, 즉 '생물학적 면역 반응'이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역겨움은 단순히 ‘상한 음식’이나 ‘독초’에 대한 본능적 회피 반응에 머무르지 않는다. 문명화된 인간의 구역질은 본능 위에 덧씌워진, 철저히 학습된 ‘문화적 감정’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문화적 기제로 설명한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인간은, 역설적으로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를 끊임없이 불안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는 바퀴벌레를 주면 잡아서 호기심에 입으로 가져간다. 아기는 아직 무엇이 깨끗하고 더러운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겨움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에서 "지지, 저건 더러운 거야"라는 부모의 말과 사회의 금기를 통해 뇌에 각인되는 ‘후천적 감정의 문법’이다.


이 문법은 생존을 넘어 관념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실험 심리학자 폴 로진(Paul Rozin)의 연구는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피험자들 눈앞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고압 멸균 처리해 세균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무균 상태의 바퀴벌레’를 주스에 잠깐 담갔다 빼자, 피험자들은 단호하게 주스 마시기를 거부했다. 위생적으로 그 액체는 여전히 깨끗한 주스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 속에서 그것은 이미 ‘바퀴벌레의 역겨움이 녹아든 주스’로 변질된 것이다. 즉, 위생적으로 완벽해도, 의미가 더러우면 몸은 구역질을 한다.


같은 논리로,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단백질 덩어리라도 그것이 ‘쥐 고기’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지 않고 굶기를 선택한다. 최고급의 맛있는 향이 나는 카레가 변기 모양의 그릇에 담겨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완벽하게 살균된 그릇이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먹지 않는다. 이때의 거부감은 단지 위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관념이, 우리의 뇌가 ‘이것은 음식이 아니다’, '오염되었다'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즉, 역겨움은 혀끝의 미각이 아니라, 머릿속의 관념이 결정한다. 우리는 입으로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가 주입한 의미를 먹는다.




2. 질서의 위반, 벗어나면 불결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역겹다고 느끼는가? 애인의 머리칼은 사랑스러운데, 국밥위에 머리칼이 떠 있을 때는 왜 혐오스러운가?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는 그녀의 명저 '순결과 위험(Purity and Danger)'에서 이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그녀에 따르면, 더러움이란 물질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Matter out of place)'라는 것이다.


신발이 신발장에 있을 때는 단정하고 깨끗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식탁 위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럽다'고 느낀다. 흙은 정원에 있을 때 자연이지만, 침실에 있으면 오물이다. 침(Saliva)은 입안에 있을 때는 아무런 거부감을 느낄 수 없는 생명의 액체지만, 몸 밖으로 흘러나와 컵에 담겨 있다면 다시 마실 수 없는 혐오스러운 액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범주 위반(Category Violation)’이 주는 공포다. 세상은 수많은 사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은 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모든 사물에 이름과 자리를 정해두었다. 이를 ‘질서(Order)’라 부른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 그 경계선을 침범하거나,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상태(액체도 고체도 아닌 끈적이는 점액질,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 음식인지 생물인지 꿈틀거리는 산낙지 등)로 나타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과 혐오를 느낀다.


역겨움은 단순한 위생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계가 정해놓은 질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경보 시스템이다. 경계가 무너진 곳, 분류가 불가능한 모호함이 있는 곳에서 인간은 혼돈을 느낀다. 인간이 무언가를 뱉어내는 행위는, 독을 뱉는 것이 아니라 내 세계를 교란하는 혼돈을 뱉어내고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경건한 의식'이다.



3. 식탁 위의 국경


이 질서와 분류의 기준은 문화마다 다르다. 때문에 식탁은 견고하고 배타적인 국경선이 된다. 한 문화권에서 최고의 별미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구토를 유발하는 오물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인에게 삭힌 홍어는 톡 쏘는 암모니아 향이 일품인 귀한 음식이다. 우리는 그것을 발효라고 부른다. 하지만 발효 문화가 익숙지 않은 서구인에게 그것은 그저 부패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생선 시체일 뿐이다. 그들에게 삭힌 홍어의 냄새는 화장실 냄새와 동급으로 인식된다.


반대로 프랑스인의 ‘블루치즈(푸른곰팡이를 번식시켜 숙성한 치즈)’나 이탈리아의 ‘카수 마르주(구더기가 들어있는 치즈)’를 보라. 그들에게는 미식의 정점이지만,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곰팡이가 핀 우유 덩어리이거나 벌레가 기어 다니는 썩은 음식일 뿐이다. 영국의 ‘블랙 푸딩(선지 소시지)’이나 아시아의 곤충 요리는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야만적인 식습관으로 비친다.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발효 청어)’ 역시 마찬가지다. 캔을 따는 순간 진동하는 악취는 누군가에게는 고향의 향수지만, 누군가에게는 생화학 테러다.


이처럼 ‘발효’와 ‘부패’의 차이는 화학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가 만들어낸 사회 의식의 합의다. 자신이 속한 문화가 허용하고 통제할 수 있으면 ‘발효’되어 맛있는 것이고, 허용하지 않으면 ‘부패’한 역겨운 것이 된다. 그런면에서 인간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합의한 기호를 먹는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역겨움은 강력한 소속감의 도구로 작동한다. 같은 혐오감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질서 안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어떻게 저런 징그러운 걸 먹지?"라는 말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우리는 정상이고 저들은 비정상이다'라는 배타적 정체성의 확인이다.


한 사회의 인간은 어릴 때부터 특정 음식을 역겨워하도록 훈련받음으로써, 집단의 경계 안에 안착한다. 식탁 위에서 끊임없이 '먹을 수 있는 우리'와 '먹을 수 없는 그들'을 가르며 보이지 않는 성벽을 쌓는다.



4. 혐오의 정치학, 너는 오물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미각적 혐오가 사람에 대한 혐오로 전이될 때 발생한다. '먹지 못할 음식'에 대한 혐오감은, 그것을 먹는 사람들을 '인간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무기가 된다. 이를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투사된 혐오(Projective Disgust)'라 불렀다.


역사적으로 지배 집단은 피지배 집단이나 소수자를 차별할 때, 언제나 그들의 식습관과 냄새를 공격했다. 나치는 유대인에게서는 마늘과 양파 썩는 내가 난다며 코를 막았다. 나아가 그들을 쥐나 기생충에 비유하며 질병을 옮기는 더러운 존재로 취급했다. 식민지 시대 서구인들은 원주민들이 동물의 살과 내장을 생으로 먹거나 피를 마시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야만이라 규정하며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 하려 했다.


'마늘 냄새가 난다', '카레 냄새가 진동한다', '개나 벌레를 먹는다'와 같은 비난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이는 상대방을 문명화되지 않은 존재, 위생적으로 불결한 존재, 나아가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혐오의 수사학이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라고 믿는다. 따라서 '당신은 역겨운 음식을 먹는다"라는 말은 곧 '당신은 역겨운 존재다'라는 낙인과 같다. 상류층이 서민의 음식 냄새를 맡으며 코를 막는 행위는, '너와 나는 섞일 수 없는 다른 종족이다'라는 계급적 선언이기도 하다. 영화 <기생충>에서 돈 많은 사장이 운전기사가 풍기는 '지하철 타는 사람들 특유의 냄새'를 역겨워하는 장면은, 혐오가 어떻게 계급을 나누는 물리적 장벽이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혐오감은 타자를 내 세계 밖으로 밀어내는 가장 효율적인 감정 장치이다. 논리적인 설명이나 법적 제재보다, 역겹다는 감정이 타인과의 접촉을 더 완벽하게 차단하게 한다. 분노는 상대방과 싸우게 만들지만, 역겨움은 상대방을 피하게 만든다. 역겨움은 타인과의 접촉을 원천 봉쇄하고, 공감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더럽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상대방을 인간으로 대우할 의무를 면제받는다. 오물을 치우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더러운 것을 피하듯,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역겨움의 대상으로 만들고 피하며 밀어낸다.


이것이 인종차별, 계급 차별로 작동하고 때론 제노사이드(대량학살)가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겨움은 단순한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비인간으로 만들어 배제하는 잔혹한 권력의 문제다.



5. 뱉는 것이 나를 말한다.


결국 역겨움은 경계선이다.

내 몸 안으로 들일 것인가, 뱉을 것인가.

내 세계 안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추방할 것인가.


우리가 특정 음식을 거부할 때, 단순히 맛없는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음식에 묻어 있는 낯선 문화, 낯선 계급, 그리고 낯선 타자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뱉어내는 행위는 나의 순결함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자, 때론 타자를 오염원으로 규정하는 폭력이기도 하다.


아이가 쓴맛을 뱉어내며 자아를 형성하듯, 사회는 타자를 뱉어내며 집단의 결속을 다진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먹는지보다, 무엇을 ‘절대로 먹지 않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무엇을 보며 코를 막고, 무엇을 보며 구역질을 하는가.


입은 먹는 기관이면서 동시에 뱉어내는 기관이다. 그리고 그 입의 행위가 나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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