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통로, 입에서 장까지
공포의 본질 4편 3장.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선언은 오랫동안 인간을 ‘생각의 존재’로 규정해 왔다. 플라톤 이래 서구의 사유는 인간을 정신과 몸으로 갈라 세우고, 정신을 존재의 본질로, 몸을 부속으로 취급하는 이원론의 계단을 오래도록 쌓아 올렸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그 뿌리 깊은 믿음을 근대적 언어로 다시 조립해, 흔들리지 않는 명제로 굳혔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슬픔이나 기쁨, 공포는 머릿속에서 발생하는 추상적인 정신 활동이며, 몸은 그 결과를 뒤늦게 따라오는 수동적 도구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 신경과학은 이 위계를 근본부터 뒤집는다. 감정은 뇌의 독백이 아니라, 몸의 아우성라는 것이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신체 표지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을 통해 감정의 발생 순서를 재정의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정은 몸에서 먼저 시작된다. 외부 자극에 반응해 심장, 근육, 내장, 호르몬이 먼저 움직이고, 뇌는 그 신체 상태를 해석한 뒤 비로소 ‘감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즉, 감정은 몸의 반응에 대한 뇌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산길에서 뱀과 마주친 순간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저것은 뱀이다, 뱀은 독이 있다. 위험하다. 그러므로 피해야 한다’라는 논리적 추론을 거친 후 도망치지 않는다. 그런 사고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동공은 확장되고, 심장은 요동치며, 근육은 수축하고, 소화기관은 멈춘다. 이는 생존을 위한 자율신경계의 즉각적인 반사다. 뇌는 이 급격한 신체의 변화(두근거림, 긴장, 식은땀)를 감지하고, 그 신체 상태에 사후적으로 '공포'라는 이름을 붙인다. 즉,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떨리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이처럼 감정의 실체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체 감각이다. 심장 박동, 내장의 수축과 이완, 피부의 온도 변화, 호르몬의 분비... 이 모든 내부 장기의 감각이야말로 감정의 진짜 원재료다. 우리가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 그것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심장과 위장이 뇌에 통증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생물학적 신호다.
그렇다면 이토록 예민한 몸의 감각은 외부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
세상의 자극이 내 몸 깊숙한 내장 기관까지 도달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그곳이 바로 ‘입’이다. 눈과 귀는 세상을 관찰하지만, 입은 세상을 물리적으로 부수어 몸 안으로 들여보낸다. 입은 외부의 물질(음식)을 내부의 살과 피(신체)로 바꾸는 변환 장치이자, 외부의 세계를 가장 내밀한 신체 감각으로 치환하는 최전선이다. 우리가 입을 통해 느끼는 맛과 식감은 단순한 미각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몸의 내부로 진입해서 감정이 되는 첫 번째 신호다.
이 신호를 가장 먼저 받아내는 곳, 입을 통과한 세계가 도착하는 곳이 위와 장이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속이 쓰리다’ 거나 ‘배가 아프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시험이나 발표를 앞두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거나,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몸이 떨리고, 입맛이 사라지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뇌가 근육과 심장으로 혈액을 몰아주기 위해 소화기관의 작동을 강제로 멈추는 ‘교감신경의 활성화’ 때문이다. 뱃속이 뒤틀리는 그 느낌은, 당신의 몸이 지금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는 명확한 감정 신호다.
장은 단순히 음식물을 소화하기 위한 튜브가 아니다. 장은 ‘제2의 뇌(The Second Brain)’다. 우리 몸의 신경세포는 뇌에 가장 많지만, 그다음으로 많은 곳이 바로 장이다. 약 1억 개 이상의 신경세포가 장벽에 촘촘히 박혀 있으며, 이들은 뇌와 거대한 고속도로인 미주신경(Vagus Nerve)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장-뇌 축(Gut-Brain Axis)’이다.
놀랍게도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핵심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95%는 뇌가 아니라 장에서 만들어진다. 행복감, 안정감, 수면을 관장하는 이 물질이 뱃속에서 생성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기분, 감정을 뇌가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기분은 생각보다 훨씬 덜 이성적이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땀을 흘리며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을 받는 것은, 통각을 자극해 뇌가 엔도르핀을 분비하게 만드는 생화학적 보상 작용 때문이다. 우울할 때 초콜릿이나 탄수화물과 같은 단 음식을 찾는 것은, 장내 미생물이 뇌에 ‘세로토닌을 빨리 만들어내라’고 보내는 화학적 협박에 가깝다. 따라서 '기분이 나빠서 먹는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정확히 말하면, 장과 뇌가 주고받는 신경 신호가 불협화음을 낼 때, 사람들은 그 불쾌한 감각을 덮기 위해 음식을 몸에 투입하는 것이다. 식탁은 뇌의 이성적 선택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라 장내 미생물과 신경계가 감정의 화학전을 벌이는, 생화학적 전장(戰場)이다.
음식이 감정의 ‘현재’를 조율한다면, 음식의 냄새는 감정의 ‘과거’를 소환한다. 오감 중에서 후각만큼 기억과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감각은 없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 냄새를 맡고 순식간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장면, 이른바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뇌과학적으로 명백한 근거를 갖고 있다. 시각이나 청각 정보는 뇌의 중계소인 시상을 거쳐 대뇌피질로 이동해 ‘분석’되는 과정을 거친다. 비록 몸이 먼저 반응할지라도, 그 정보가 구체적인 ‘이미지’나 ‘소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고차원적인 처리 과정이 개입한다. 우리는 슬픈 영화를 볼 때 화면을 해석하고,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을 동반하며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후각은 다르다. 냄새는 검열을 거치지 않는 침입자다. 코로 들어온 냄새 분자는 이성적 검열관인 시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변연계로 향한다. 이곳은 기억의 저장소인 해마와 감정의 관제탑인 편도체가 서로 맞닿아 있는 영역이다. 진화적으로 후각은 생존과 직결된 감각이었기에, 판단 이전의 즉각적 반응이 필요했을 것이다. 썩은 음식의 냄새나 불에 타는 냄새는 생각할 겨를 없이 즉각적으로 공포나 회피 반응을 일으켜야 했다. 때문에 후각 신경은 뇌의 감정 센터와 직통으로 연결되어야 했다.
이 직통 연결망 때문에, 냄새는 논리를 우회하여 감정의 급소를 찌른다. 비 오는 날의 흙내음, 갓 지은 밥 냄새, 혹은 특정 향신료의 냄새는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0.1초 만에 우리를 어머니의 밥상으로, 헤어진 연인의 옷자락으로, 혹은 잊고 싶었던 트라우마의 현장으로 강제 소환한다. 시각적 회상이 ‘과거를 다시 보는 것’이라면, 후각적 회상은 ‘과거를 다시 느끼는 것’이다.
이렇듯, 냄새는 기억의 서재를 여는 열쇠다. 우리가 특정한 음식을 갈망할 때, 단지 그 음식의 물리적 ‘맛’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냄새 속에 박제된 ‘그때 그 시절의 안온함’, ‘보호받는 느낌’, 혹은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섭취하고 싶은 것이다. 후각은 망각의 늪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의 지층을 순식간에 파헤쳐, 현재의 식탁 위로 올려놓는다.
말은 감정을 표현하는 훌륭한 도구지만, 불완전하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 짓이겨진 자존심, 형체 없는 불안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다. 언어가 멈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입은 먹는 행위를 통해 말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입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말을 내뱉는 것이고, 하나는 음식을 삼키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이 두 행위는 서로 보완적이다. 내면의 것을 밖으로 '토해내지' 못할 때, 인간은 밖의 것을 안으로 '삼키는' 행위로 균형을 맞추려 한다.
우두득, 무언가를 강하게 씹는 행위는 억압된 공격성과 분노의 대리 표출이다. 상사를 들이받고 싶은 날, 사람들은 부드러운 음식 대신 질기고 딱딱한 것을 찾는다. 씹는 행위가 뇌에 주는 물리적 진동은 공격 본능을 일시적으로 해소시킨다. 반대로 부드럽고 따뜻한 음식을 삼키는 행위는 퇴행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세상이 너무 차갑고 가혹할 때, 인간은 씹을 필요도 없이 넘어가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이나 부드럽고 따뜻한 빵과 수프를 찾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젖을 빨던 유아기의 구강기적 안정감을 소환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시도이기도 하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폭식을 하거나, 반대로 입을 닫고 거식을 하는 것은 단순히 식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다. 폭식은 감정의 고통을 미각의 쾌감으로 덮어버리려는 '감각적 마취'이며, 거식은 통제 불가능한 삶에서 내 몸으로 들어가는 것만이라도 나의 의지로 통제하겠다는 '절망적 저항'이다.
입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이자, 몸과 마음이 충돌하는 최전선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순히 식단 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내 몸이, 내 장이, 내 무의식이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를 해석하는 일이다. 우리의 혀끝에 맴도는 것은 맛이 아니라, 아직 소화하지 못한 감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