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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시대의 비극

감정 없는 연결이 만든 존재의 공허

by Mind Thinker

공포의 본질 3편 7장



1. 초연결의 비극


21세기의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알림음과 진동을 통해 누군가와 접촉한다. 이 연결은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무너뜨렸지만, 역설적으로 감정의 깊이와 의미, 그리고 흐름도 함께 지워버렸다. 메시지, 이모티콘, 실시간 반응은 마치 서로의 마음을 곧바로 읽어내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감정은 대개 맥락을 잃은 조각들로 파편화되어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감정을 내용이 아니라 신호로 처리한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환희는 각각의 고유한 체험이 아니라, 전송 가능한 데이터 패킷으로 압축된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시간은 불과 1초도 채 되지 않으며, 상대방이 처한 구체적 상황이나 감정의 깊이는 전송 과정에서 증발한다. 이때 감정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유통된다. 시장에서 상품이 등급별로 분류되어 팔리듯, 감정 역시 알고리즘이 분류하고 추천하는 범주 속에 갇힌다.


이런 디지털 환경은 감정 평준화, 획일화 현상을 가속한다. 사람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심지어 분노와 불안의 순간에도 미리 정형화된 문장과 비슷한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감정 표현의 팔레트가 극단적으로 축소된 것이다.


더 이상 감정의 표현은 개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유한 행위가 아니다. 대신, 플랫폼이 미리 준비해 둔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소비 행위로 변질된다. 슬픔은 울음 이모티콘으로, 기쁨은 웃는 이모티콘으로 치환된다. 이는 마치 레스토랑의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르듯,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 없이 가장 적합해 보이는 '기호'를 선택하는 행위와 같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이 빚어낸 고유한 감정의 '느낌'은 사라지고, 모든 감정은 하나의 얇은 감정의 화면 아래 덮여버린다. 애도의 슬픔과, 축하의 기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호만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감정의 평준화로 공감이 사라진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식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동일한 기호로 표준화되면, 그 감정의 배경과 맥락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누군가의 슬픔이 어떤 깊은 상실에서 비롯되었는지, 피로한 하루의 일시적 우울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남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슬픔’이라는 표식뿐이다.


디지털 연결이 확장될수록, 현대인은 더 많은 사람과 접촉하지만 더 적은 감정을 느낀다. 그 안에서 흐르는 감정은 점점 얕아지고 균질해진다.


이처럼 감정의 본질이 희미해지는 순간, 인간은 감정의 주체라는 자리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 공허함 속에서 타인과의 감정적 교감이 끊어지는 근원적인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좀비로의 진화가 이미 현대인의 DNA안에서 조용히 시작된 방식이다.



2. 기억의 외주화와 자아의 단절


감정이 표준화될 때, 그 파장은 단순한 ‘느낌’의 영역을 넘어 기억의 본질적 구조까지 뒤흔든다.


감정과 기억은 뇌 속에서 서로를 강화하며, 자아를 구성하는 두 축이 된다. 어떤 사건이 강렬히 기억되는 이유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에 동반된 감정의 강도 때문이다. 첫사랑의 고백, 중요한 시험에서의 실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 모든 장면은 감정이 강하게 각인되었기에 선명하게 남는다. 기쁨과 슬픔, 공포와 환희 같은 감정은, 기억에 온도와 색을 입히고 그 색채를 뇌 깊숙이 새겨 넣으며 자아의 시간적 정체성을 만든다.


그런데 현대인은 기억의 저장과 회상을 점점 외부 장치에 의존한다. 사진, 동영상, SNS 타임라인이 과거를 기록하고 분류하는 '외부 기억 장치' 역할을 대신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검색'한다. 그 과정에서 사건은 감정과의 연결을 잃는다. 기억이 데이터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의 경험이 아니라, 접근 가능한 정보로 변질된다.



이렇게 외주화 된 기억은 안전하게 보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아와의 연결을 느슨하게 만든다. 자아는 '내가 겪었다고 느끼는 것' 위에 세워지는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희미해진 기억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던 내적 서사의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외부 기억 장치는 기억의 서열까지 인간 대신 결정한다. 알고리즘은 어떤 사진을 '추억'으로 다시 보여줄지, 어떤 사건을 방치할지 결정한다. 알고리즘의 기준으로 과거의 사진과 영상들들을 '몇 년 전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제시하거나, 특정 이벤트를 '추억'으로 타임라인에 띄운다. 반면, 기준에 맞지 않는 수많은 평범한 순간들은 조용히 잊히도록 방치된다. 인간은 이 서열에 순응하며, 점점 더 '기억의 주인'이 아닌 '기억의 소비자'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인간은 점점 더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추억 목록’을 나의 진짜 기억처럼 받아들인다. 내 삶에서 중요했던 순간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중요하다고 간주한 순간이 시간의 앞자리에 놓이게 된다. 그 결과, 기억의 주체는 나에서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외부의 설계에 의해 재편된 기억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온전하게 재구성할 능력을 상실해 간다.



감정이 사라진 기억, 맥락이 잘린 과거는 인간을 공허한 존재로 만든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감정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연속성을 잃은 허상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아의 단절이 초래하는 공포는, 감정 없는 연결 속에서 살아가는 '좀비'의 존재론적 공포와 맞닿아 있다.


좀비는 죽지 않았지만, 자아를 잃은 채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지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계속한다.



3. 감정의 자동화와 설계화


감정은 원래 예측 불가능한 생리·심리적 반응이었다. 인간의 뇌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기억 속 사건과 현재의 상황, 신체의 미세한 변화를 종합하고 해석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감정이란 항상 개인의 해석과 맥락이 개입하는 주체적인 체험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 속에서 감정은 점점 자동 반응 시스템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현대인은 감정을 느끼기 전에 행동한다. 화면 속 자극적인 이미지, 짧은 영상, 분노를 유발하는 기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클릭하고 공유하며 댓글을 작성하게 만든다. 이때 감정은 마치 반사신경처럼 작동한다. 충분히 곱씹고 해석할 시간은 사라지고, 자극에 대한 즉각적이고 반사적 반응을 자신의 고유한 감정으로 간주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감정은 더 이상 내면에서 숙성되는 체험이 아니라, 외부 자극에 따라 자동으로 발생하는 프리셋 반응(미리 설정된 반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핵심은, 이런 자동 반응의 조건을 누가 정하느냐는 것이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인간의 취향과 관심사, 그리고 분노의 지점을 학습한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간의 감정 반응을 유발하는 자극을 치밀하게 배치한다. 광고 문구, 뉴스 배열, 추천 영상의 순서까지, 모든 것이 인간의 감정 반응 패턴을 강화하도록 설계된다. 감정은 이제 개인의 자산이 아니라 외부가 투자하고 수익을 회수하는 자원이 된다. 인간의 감정은 플랫폼의 성장을 위한 연료가 되고, 인간은 그 연료를 무의식적으로 제공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설계 과정이 반복되면,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정말로 ‘나’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설계된 감정 패턴이 오래 축적되면, 그것은 인간의 감정 회로 속에 내재화된다. 특정한 상황에서 웃거나 분노하거나 무심해지는 패턴이 이미 외부의 손에 의해 각인된 것이다. 이때 감정은 창발적 체험이 아니라, 외부 설계도를 따라 작동하는 프로그램과 다름없다.


결국, 자동화되고 설계된 감정은 자율성을 잃는다. 인간은 여전히 ‘느끼고 있다’고 믿지만, 그 느낌은 이미 기획된 시나리오의 일부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마주한 근원적인 공포이며, 좀비로 진화한 감정 반사의 실체다.


좀비는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그 욕망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인간 또한 무언가에 반응하지만, 그 감정이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렇게 감정의 주체성을 잃은 인간은, 점점 더 좀비에 가깝게 진화해 간다.



4. 신경 좀비 – 소멸되는 자기 인식


감정이 자동화되고 외부에 의해 설계되는 상황이 반복되면, 그 영향은 뇌 깊숙한 곳까지 뻗어간다. 자기 인식을 담당하는 전전두엽과 감정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전측 대상피질의 회로는 점점 반응성을 잃어간다. 뇌는 효율성을 위해 불필요한 회로를 정리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외부 설계에 의해 동일한 감정 반응만 반복되면 뇌는 복잡한 내면 해석 과정을 '쓸모없는 절차'로 간주하고 차단해 버린다.


이런 변화는 곧 감정 인식 능력의 저하로 이어진다. 이를 알렉시시티(alexithymia, 감정 인식 불능)라 부른다. 알렉시시티 상태의 사람은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분노와 불안, 슬픔과 피로가 서로 뒤섞여, 명확히 어떤 감정인지 가려내지 못한다. 때문에 “그냥 답답하다”,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와 같은 모호한 진술이 늘어난다.


이때 감정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의해 해석되지 않는다. 뇌는 감정 신호를 언어와 서사로 충분히 변환하지 못하고 대신 편도체나 자율신경계와 같은 원초적 반응 경로를 통해 감정을 처리한다. 그 결과, 감정은 구체적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신체적 긴장(가슴 두근거림, 목의 답답함, 어깨 결림)이나 행동 패턴(습관적 손톱 물기, 무의식적 한숨)으로만 표출된다.


이 상태에서는 감정이 ‘나의 경험’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신체 반사로 느껴진다. 결국, 감정과 자아 사이를 연결하는 해석의 다리가 끊어지고, 감정은 살아 있지만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유’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은 디지털 환경에서 더욱 가속된다. 사람들은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자동으로 선택된 이모티콘을 누르고, 추천된 댓글 양식을 그대로 복사하며, 알고리즘이 제시한 감정의 서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결국 뇌는 '내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을 외부에 위임하게 된다. 이렇게 뇌의 자기 인식 회로가 무력화되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내 것’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좀비 은유는 여기서 가장 또렷해진다. 좀비는 움직이고 반응하지만, 그 행동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웃고 화내고 울지만, 그 감정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인식을 상실한 인간은 외형상 여전히 ‘살아 있는’ 듯 보이나, 내면에서는 자아와 감정의 연결이 끊어진 빈 껍데기로 변해가는 것이다.


자기 인식의 소멸은 시간 속에서 나를 이어주는 내적 서사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느낀 것을 해석할 수 없다면, 나는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할 수 없다. 그 순간, 인간은 이미 좀비로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연결의 홍수 속에서 고립되고, 감정의 풍요 속에서 공허해진다. 감정은 신호로 축소되고, 기억은 외주화 되며, 감정 반응은 설계된 패턴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자기 인식의 통로가 무너진 인간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허상’으로 변해 간다. 좀비는 허구의 괴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조용히 진화 중인 미래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공포는, 바로 이 변화가 너무도 매끄럽고, 너무도 익숙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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