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진화, 욕망을 넘어서다
공포의 본질 3편 5장
1978년, 조지 A. 로메로는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에서 좀비가 더 이상 무덤에서 기어 나오는 괴물이 아니라, 쇼핑몰로 몰려드는 소비자라는 상징적 장면을 제시했다. 좀비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고 그저 ‘쇼핑몰 안을 맴도는 것'만으로 불안한 사회의 자화상이 되었다. 그곳은 단지 피난처가 아니었다. 잠재된 기억 속에 있는 소비의 성지였고, 삶이 펼쳐지는 장소가 아니라, 삶을 흉내 내는 의미 없는 반복의 무대였다.
그런데 좀비는 왜 쇼핑몰로 모여드는가? 영화는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다만 등장인물의 말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이 장소가 그들에게 중요했을 거예요. 살아 있을 때, 여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으니까요.>
이 한 마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쇼핑은 단순한 소비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 행위를 통해 삶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상징적 의식임을 드러낸다. 쇼핑몰은 단지 상품을 파는 장소가 아니라, 소속감과 감정, 기억, 권위, 계급, 욕망을 상징하는 현대사회의 성전이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자들은 그 신전 속으로 다시 진입하려 한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침입이 아니라, 기억으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 움직임이며, 내면 깊이 뿌리내린 현대적 믿음의 구속 때문이다.
성전에서 좀비들은 쇼핑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계산대에 서지도 않는다. 그저 몰(mall) 안을 끝없이 맴돌 뿐이다. 이 행동은 기능적으로는 아무런 효용도 목적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 죽음보다 깊이 잠재된 삶의 궤적을 무감각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이동하고 바라보기만을 반복 재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인의 모습도 같다.
쇼핑이 더 이상 자신만의 감정이나 판단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소비의 기억과 감정이 중독성을 유발한다는 것.
반복되는 소비 행위가 기괴한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
‘소비가 곧 나다’라는 현대적 경전의 DNA가, 죽음 이후에도 유전된다는 것
좀비는 욕망하지 않지만, 욕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의 동선을 따라 걷는다. 그들은 의식을 잃었지만 행동은 내재된 기억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그들은 감각 없이 움직인다. 남은 것은 오직 반복되는 동작과, 정체성이 빠져 나간 껍질뿐이다. 좀비는, 자본의 명령에 따라 소비로 자기를 증명하려 했던 인간들이, 죽은 뒤에도 그 행위를 반복하는 주체 없는 유령들이다.
'Dawn of the Dead'는 좀비와 인간을 같은 공간, 즉 쇼핑몰 안에 병치함으로써 두 존재 사이의 경계를 해체한다. 인간은 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좀비는 몰 안을 목적 없이 배회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 존재의 차이는 흐릿해진다. 쇼핑몰은 점점 생존의 공간이 아니라, 의미 없는 반복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되고, 그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는 같은 리듬 속에서 움직인다. 이제 쇼핑몰은 더 이상 풍요의 상징이 아니다. 그곳은 변질된 욕망만으로 가득했던 소비의 종말을 드러내는 도시의 무덤이 되었다.
그리고 좀비는 그 무덤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배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지 않고 현대인들이 만든 성전인 쇼핑몰의 숭배자, 소비의 유령이 되었다.
소비는 욕망의 언어였다. 자본은 그 욕망을 자극하고 확대했으며,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삶과 존재를 증명했다. ‘갖는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이었고, 소유는 삶의 기쁨이자 이유이며,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욕망은 무한히 충족될 수 없었다. 과잉 소비는 욕망을 무한히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것은 자본의 무한 확장에 장애가 되었다. 이에 자본은 욕망의 구조를 변형시켰다. 자본은 소비와 소유에 욕망을 중독시켰고, 욕망은 점점 특별한 의미 없이 단순한 자극만으로도 소비가 가능 상태로 진화했다. 이에 욕망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닌 것이 되었고, 감정은 시스템의 반응 패턴에 흡수되었으며, 소비는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실행되었다.
이제 소비는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욕망도, 감정도, 주체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단지 알고리즘에 반응하는 반복적 선택, 충족되지 않는 구매의 리듬뿐이다. 그렇게 욕망은 소비에 중독되었고, 자극만이 남은 반응 소비의 시대가 도래했다.
오늘날 소비의 주체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다.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알고리즘이며, 욕망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시스템의 계산 결과다. 현대인은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알림과 추천에 따라 자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스마트폰이 울리고, 광고에 노출된다. 푸시 알림이 할인 정보를 전하면 상품은 장바구니에 담긴다/
이 모든 과정은 욕망을 넘어선 감각의 자동화, 반사적 반응을 유도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그렇게 생각은 사라지고, 판단은 위탁되며, 반응만이 남았다.
'반응소비'의 순간적 즐거움은 곧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쇼핑 후 곧 후회한다.
'이걸 왜 샀지? 기분 전환으로 충동구매 했는데, 남는 건 허무야'
이는 현대의 소비가 욕망의 충족도 기분의 위로도 아닌 자극에 대한 자동반응으로 변질되었음을 말해준다.
자극에 중독된 뇌의 보상 시스템은 고장 난 상태다. 쾌락도, 만족도 느끼지 못한다. 오직 더 크고 강한 자극을 향한 반복 회로만이 작동할 뿐이다.
그렇게 반복된 소비는 습관으로 고착화된다. 광고, SNS, 리뷰와 좋아요, 비교와 자랑,... 은 모두 끝없는 소비 자극의 먹이 사슬이다. 사람들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구입할 타이밍이기 때문에 구매한다.
이 순간의 소비는 의사결정이 아니라 프로그래밍된 선택이다. 감정도 욕망도 판단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남는 것은 오직, 계속되는 소비뿐이다.
맛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처럼, 현대인들은 소비를 위해 질주한다. 밀치고, 움켜쥐고, 치켜들고, 물어뜯으며 포효한다.
좀비는 본능적으로 공격한다. 그들은 기쁨도 느끼지 않고, 슬픔도 표현하지 않으며,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뛰고, 덮치고, 물어뜯는다. 죽었다 일어나서 또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이 무표정의 반복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오전 7시 기상, 버스와 지하철, 업무, 야근, 편의점 맥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온라인 쇼핑, 잠들기 전 유튜브 반복 재생... ... ... ... 그리고 오전 7시 알람.../
감정 없는 반복은 인간을 좀비화시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이 인간이 감정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고유한 감정이 필요하지 않은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감정은 조건화된 반응에 가깝다. 업무 성과가 좋으면 '기뻐해야' 하고, 상사가 화내면 '불안해져야' 하며, 주말에는 '편안하게 쉬어야' 하고, 제공되는 영상 속에서 '재미와 안위'를 느껴야 한다. 그렇게 감정은 의미를 느끼는 통로가 아니라, 사전에 지정된 리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이런 구조에서 감정은 나를 표현하는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기능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능화된 감정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도
현대인은 그것을 결핍이 아닌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게 된다.
좀비는 죽었지만 살아서 움직인다.
현대인은 살아 있지만 감정 없는 하루를 반복하고 있다.
감정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 감정은 내적 경험에 의한 표현이 아니라 콘텐츠이자 상품이 되었다.
'와, 감동이야, 영혼까지 힐링, 진정성 120%, 감성 터지는데...'등의 말은 더 이상 내면에서 우러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짜 감정처럼 보이도록 기획된 문장이다.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느끼라고 설계된 느낌이다.
'감성’은 이제 마케팅 언어다. 현대의 감정은 설계된다. 그리고 그 설계는 곧, 소비 유도 알고리즘의 일부가 된다. 카페의 조명과 인테리어는 ‘편안한 감성’을 유도하고, 재생 목록의 제목은 ‘감성적인 저녁’이라 이름 붙여진다. 광고 영상은 '눈물 버튼'을 겨냥하고, 브랜드 문구는 ‘감동’을 하나의 감정 카테고리로 포장한다.
‘감성 굿즈, 감동 영상, 힐링 베이커리’… 이 모든 감정들은 인간이 느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느낄 것처럼 구성된 소비 경험이다. 감정은 이제 콘텐츠의 일부이고,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의 핵심이다. 즉, 감정은 더 이상 삶의 반응이 아니라 구매를 유도하는 정서적 장치가 되었다.
그렇게 감정은 선택 가능한 상품으로 전락한다.
/ 오늘은 어떤 감정을 살까, 지금 내 기분에는 어떤 콘텐츠가 어울릴까 , 꿀꿀한 기분을 바꿔 줄 무언가가 필요해.../
이제, 감정은 내가 만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소비하는 상품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 소비가 치유가 아니라 내면 깊숙한 정서 에너지마저 추출당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착취는 세밀하고 반복적이며,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감정 콘텐츠를 반복 소비하면서 실제 감정의 자발성은 사라지고, 반응은 학습되고 훈련된다.
감동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감정은 이미 콘텐츠 기획자가 설계한 반응 구조에 포함된 것이다.
슬픔을 다룬 영상에 ‘눈물 버튼’이라는 댓글이 붙고, 누군가의 고백에는 ‘감동’ 이모티콘이 반복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감정을 경험해서 느끼지 않고 연출하게 된다.
리뷰에 적는 감정 표현조차도,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정서적 포장지가 된다.
/이 베이커리는 정말 힐링이에요. 이 영상 덕분에 울었어요. 강추./
이러한 감정 추출은 곧바로 수익화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음챙 산업과 자기 위안을 제공하는 콘텐츠, 감정 중심 브랜딩이 있다. ‘자기 위로, 정서 회복, 감성 충전’이라는 이름 아래 '불안한 사람에게는 마음 챙김 어플을, 지친 사람에게는 힐링 굿즈(감성 자극 소품)와 촉감 콘텐츠를, 외로운 사람에게는 브이로그(생활기록 영상)와 감성 카페'를 추천한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감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가격을 매기고, 그 가격을 반복 구매하게 만든다. ‘감정을 돌본다’는 산업의 언어는 실은 감정을 자극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마케팅 구조다. 그 구조 속에서 감정은 더 이상 내면의 경험이 아니라 경험처럼 보이는 콘텐츠로 재포장된다. 결국, 사람들이 ‘치유’라고 믿고 반복하는 소비는 정서적 회복이 아니라 정서적 착취의 은밀한 회로일 수 있다
좀비는 웃지 않는다. 울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향해 움직이고, 괴음을 내지르며, 팔을 휘젓는다. 그 동작은 마치 감정을 가진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좀비는 감정의 기원은 잊고 그것의 흔적만 남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지만 팔을 뻗어 포옹의 자세를 취하고, 미워하지 않지만 공격의 몸짓을 반복한다. 이것은 내면 없는 정서의 기계적 재현일 뿐이다.
오늘날의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인은 감정을 소유하고 발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포장하고, 소비하고, 과장해서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관리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감정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시하고 연기하고 팔기 위한 자원이 되었다.
때문에 그 감정이 진짜일 필요가 없다. 그럴듯하게 보이면 된다. 그 순간, 인간은 좀비처럼 감정의 본질을 상실한 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된다. 그때 인간은, 감정을 그저 콘텐츠로 소비하는 완성된 좀비로 진화한다.
이제, 이 시대에서 감정은 더 이상 사적인 정서나 내면의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공유되고, 비교되며, 상품화되고, 소비되는, 기업의 자산이 되었다.
인스타그램의 행복한 일상, 유튜브의 눈물 나는 감동 영상, 브이로그의 감성적인 하루, 리뷰 속 기분 좋은 소비 후기...
이 모든 감정은 실제로 느낀 감정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럴듯하게 보이는가'이다.
감정은 이제 사유화된 콘텐츠이며 동시에 시장화된 코드다. 그리고 그 감정이 반복 소비될수록, 자아는 내면을 잃고 정서적 껍데기만 남긴 채, 텅 빈 기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