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작동하고 있는가?
공포의 본질 3편 6장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 마르크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
공포는 언제나 실체보다 먼저 떠돈다. 공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으로 현실을 압박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유령’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혁명의 기운이었고, 그 유령은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더 이상 공산주의 유령은 떠돌지 않는다. 21세기 지구에는, 감정도 판단도 멈춘 채 생산과 소비를 반복하는 인간의 그림자, 진화한 자본주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은 살아 있으나 죽은 상태이고, 죽었지만 작동하는 신체를 가진 이중의 기호다. 이 이중성은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현대인은 살아 있지만 감정은 기계처럼 작동하고 있고, 스스로를 느끼기보다 시스템의 요구에 응답하는 ‘사용자’로 살아간다.
이제 자본주의의 유령은 좀비로 진화해 세계를 떠돌고 있다.
당신은 정말로 살아 있는가, 아니면 작동하고 있는가?
당신의 감정은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알고리즘에 의해 조율된 반응인가?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일정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라 정의했다. 이 짧은 정의는 자본주의의 핵심을 명확히 드러낸다. 노동자는 ‘노동’ 자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 동안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 즉 노동력을 판매한다. 노동력은 상품이 되어 시장에 전시되고, 자본가는 그것을 연, 월, 일 단위로 구매한 후, 성과로 환산하여 관리한다.
이때 거래되는 것은 인간 존재 전체가 아니다. 자본은 ‘노동 가능성’을 구매한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유지하고 측정하기 위해, 신체, 시간, 감정, 인지력, 회복력 같은 비가시적인 요소들까지 점점 노동력의 구성 요소에 포함하기 시작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단지 근육을 움직이는 기능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중력, 창의성, 감정 표현력, 회복 탄력성, 심지어 자기 정체성까지 노동의 일부로 제공해야 한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웃는 간호사의 표정, 콜센터 상담원의 차분한 목소리, 크리에이터의 정서적 진정성, 브랜드와 정체성을 결합한 SNS 콘텐츠 창작자의 이미지까지, 이 모든 것이 계약 가능한 ‘노동력’이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본은 인간을 단일한 기능 수행자가 아닌, 복합적으로 작동 가능한 유닛(unit)으로 다룬다. 이때, 노동자는 점점 더 측정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며, 정서적으로도 조절 가능한 존재로 변형된다. 자본주의는 인간 신체의 보이지 않는 측면들인 기분, 감정, 집중력, 동기, 자세 같은 것들까지 수치화 가능한 자산으로 간주하고, 그 수치를 기준으로 시장의 구조를 재구성해왔다.
이제 신체는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기록되고, 평가되며, 거래 가능한 자산이다. 스마트워치는 수면 시간을 측정하고, 기분 추적 앱은 하루의 정서를 점수화하며, 생산성 앱은 집중 시간을 수치로 환산한다. 이렇게 인간의 몸은 점점 디지털화된 자기 관리의 플랫폼이 되어간다.
이 변화는 ‘자기 관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부과된다. 스스로의 신체를 관리하고, 감정을 조절하고, 인지 능력을 훈련하고, 정체성을 브랜드화해야 하는 존재. 즉, 지속 가능한 계약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존재가 오늘날의 이상적인 노동자로 간주된다.
현대의 노동자는 단순히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 전체를 상품의 일부로 분할하여 판매한다. 신체는 작동 가능성과 성과로, 감정은 응대력과 충성도로, 정체성은 브랜드 스토리로 환산된다. 그 결과, 인간의 삶 전체가 점차 상품의 논리 안으로 흡수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형의 끝에서, 자본주의는 하나의 완성된 인간형을 상상한다. 지치지 않고, 감정적 소진 없이, 질문하지 않으며 작동하는 이상적인 인간. 바로, 자본이 꿈꾸는 진화된 노동자, 좀비라는 기호다.
좀비는 죽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의식이 없지만, 여전히 움직이며 정해진 욕망을 따라 반응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도, 죽음의 자격도 없다. 그들은 단지 움직임을 연장하기만 하는 존재다.
이 존재의 역설은 오늘날 자본이 만든 신용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그대로 투영된다. 현대인은 살아 있지만, 죽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채무의 미해결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용 사회는 경제의 체계이자 감정의 바탕이다. '나는 빚을 졌다'는 말은 단순히 돈을 갚아야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도덕적 책임과 정서적 연대 그리고 사회적 의무까지를 내포한다. 빚은 단지 자산의 마이너스가 아니라, 한 인간이 타인과 맺고 있는 부채 관계의 감정적 자각도 포함한다. 때문에 빚이라는 단어에는 숨은 의미들이 있다.
나는 누군가(가족, 공동체, 회사, 사회, 국가...)의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
나는 아직 내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나를 포기할 수 없다.
이러한 감정은 삶을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책임의 연장선으로 만들고, 인간을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는 감정적 인질 상태로 만든다. 좀비가 시스템에 의해 죽지 못한 채 작동하듯, 인간도 채무의 구조 안에서 살아 있어야만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본주의는 인간을 ‘신용’이라는 기준으로 등급화한다. 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고유한 경험이나 가치가 아니라, 수치화된 데이터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 수치(신용 점수)는 다음을 결정한다.
어디서 살 수 있는가
어떤 조건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떤 고용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
누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어떤 인간으로 분류될 것인가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점수를 매기고, 인간은 그 점수를 유지하고 보완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이렇게 자본은 삶을 권리에서 경제적 의무로, 삶의 방향을 개인의 결정에서 계약과 조건의 문제로 전환시켰다.
이제, 삶은 더 이상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복잡한 채무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는 경제적이고 윤리적인 의무가 되었다.
너는 부모에게 받은 만큼 갚아야 한다.
국가 시스템의 혜택을 받았으니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대출과 보험의 순환 속에 있으니 살아 있어야 한다.
네가 죽으면 남은 가족이 피해를 입게 된다.
이러한 말들은 죽음을 개인의 종결이 아니라 사회적 실패로 만든다. 자본은 삶을 계약적 의무로 전환시키고, 그 의무를 감정과 윤리의 언어로 포장한다. 결국 삶은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책임의 항목들, 즉 살아야만 하는 이유들의 체크리스트가 되어 버린다.
이처럼 신용사회는 살기 위해 감정을 억제하고 계약을 이행해야 하는, 죽을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 존재가 진화한 좀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과잉된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감정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과잉된 소비와 생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극의 잔상이다.
/감동 영상, 분노를 유발하는 기사와 영상, 눈물 버튼, 사이다 발언.../ 이 모든 감정은 빠르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며, 곧 피로와 무감각의 상태를 낳는다. 이것이 감정의 마비로 연결되고, 그 결과 비탄도, 분노도, 저항도 불가능한 상태로 귀결된다.
감정은 반복되면 소진된다. 같은 자극을 반복해 경험하면, 뇌는 그 자극에 둔감해진다. 이것은 단지 신경학적 과정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윤리, 그리고 심리적 무력화의 흐름이다.
분노는 순식간에 타오르고 꺼진다. 슬픔은 짧은 표현으로 휘발되며 기쁨은 좋아요 개수로 치환된다. 그 결과, 감정은 더 이상 자신만의 고유한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화는 나는데 움직이기엔 피곤해, 너무 많이 봐서 이제 별 감흥이 없어.../
이렇게 현대인은 정서적 소진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자본시장은 그 정서를 흡수해 상품화한다. 심지어 시장은 저항조차 상품으로 만든다..
페미니즘 → 굿즈와 브랜딩
인종 문제 → 캠페인 광고
환경 운동 → 마케팅 슬로건
사회 고발 영화 → 엔터테인먼트
저항은 더 이상 사회나 체제 변화의 열정이 아니라 정체성 소비의 수단,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는 감성 패키지가 되었다. 이 구조 안에서 감정은 행동의 동력이 아니라, 콘텐츠 소비의 코드로 작동한다.
좀비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준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 모습은 현대 자본주의의 인간관계 속에서도 드러난다.
고객의 불만은 ‘클레임’으로만 수치화하고,
노동자의 소진은 ‘효율 저하’로 해석한다.
그리고 타인의 슬픔은 ‘이벤트’로 관찰해서 이용 방법을 연구한다.
자본사회는, 누군가의 감정을 윤리적 사건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변수로 간주한다. 이것은 감정의 탈윤리화이며, 윤리의 비감정화다. 결국 감정이 없는 사회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회로 진행된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는 소진을 덜 느끼고, 타인을 더 무시하며 , 고통을 회피하고 , 시스템의 요구를 수용한다
그러나 그 생존은 존재의 사라짐을 대가로 한 것이다. 감정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최소한의 신호다. 감정이 사라진다는 것은 ‘살아 있는 상태’와 ‘존재하는 상태’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상태야말로 자본주의가 만든 더 진화된 좀비의 형상이다.
나의 감정은 행동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케팅 알고리즘에 흡수되고 있는가?
좀비는 괴물일까, 아니면 모델일까?
자본은 좀비를 기준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무한히 반복한다. 그들은 광고를 의심하지 않으며, 제품의 윤리를 따지지 않으며, 하나의 브랜드에 충성하고, 또 다른 브랜드도 같은 충성도를 보인다. 그들은 오직 소비를 통해 욕망을 충족한다.
좀비는 모든 자본주의 플랫폼이 꿈꾸는 사용자다.
재방문율(리텐션)이 높고, 충성도가 강하며, 사용 시간이 길고, 이탈률은 거의 없다
그들은 분석 가능한 사용자이자 예측 가능한 구매자다. 그들은 시장이 설계한 가장 완벽한 시민이다.
자본주의는 차세대 인간을 만들고 있다.
욕망을 지속적으로 생성할 수 있고
그 욕망을 타인과 비교하며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구매하고
그 구매 후에도 다시 결핍을 느끼는 존재
그런데, 아직 진화하지 않는 인간은 어느 순간 질문을 품는다.
왜 나는 소비를 반복하지?
이 제품이 정말 필요한가?
그런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지?
혹시, 이 시스템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자본은 이 질문들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좀비가 필요하다. 질문하지 않고, 반복만 하는 존재인
좀비는 이상적이다. 그들은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며, 시장의 흐름에 따르며,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시민이 아니라 사용자다.
이 비극적인 상태는 단지 은유적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자본사회의 인간은 소비자이자 노동자이자 유저(user)로만 정의된다. 학교는 진로 소비자의 양성소이고, SNS는 감정 소비의 플랫폼이며, 정치조차 브랜드 선호도의 문제로 전락했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은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사용하고, 구매하고, 반응하는 자로 축소된다.
좀비는 공포의 기호가 아니다. 그는 거울이다.
그들은 불안을 해소하지 않고, 윤리적 반성을 하지 않으며, 본질적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정 없이, 판단하지 않고,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소비자다.
이제 좀비는 상징을 벗어나 매뉴얼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은,
자본이 만든 매뉴얼을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