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음식 공포:
불안과 공허를 먹는 사람들

by Mind Thinker

공포의 본질 4편 1,2 장


프롤로그. 감정에서 충동으로


공포의 본질 3편 '좀비의 탄생'에서는 감정이 더 이상 주체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자동화되고, 외부 설계에 의해 반사적 반응으로 축소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자신만의 고유한 감정을 언어로 변환하지 못한 채 신체적 긴장이나 반복 행동으로만 드러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좀비의 은유로 드러냈다.


그렇다면 해석되지 못한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통로, 즉 ‘먹는' 행위로 흘러 들어간다. 감정을 잃은 인간은 결국 음식이라는 신체적 충동을 통해 그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때 음식은 더 이상 단순한 영양 공급원이 아니라, 억눌린 감정이 드나드는 출구이자 공포의 관문이 된다.


1장. 음식, 공포로 변하다


위로에서 공포로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음식은 생존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연료이자, 삶의 기쁨을 채우는 원천이다. 갓난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따스한 우유, 어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아침밥, 축하의 순간을 장식하는 케이크와 근사한 저녁, 일과 후 친구나 동료들과 나누는 치킨을 안주삼은 맥주...처럼, 음식은 기억과 감정을 보관하는 그릇이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언어다. 사람들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유대감을 확인하고, 식탁 위에서 소속감과 친밀함을 배운다. 음식은 분명 생존과 쾌락, 그리고 관계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순수한 즐거움에 죄책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많이 먹었다’는 자책과 ‘살찔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식사의 즐거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음식은 이제 생존의 도구를 넘어, 현대인의 복잡한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수많은 감정이 충돌하는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다.



모순의 시대: 즐겨라 그러나 심판받으리라


음식이 감정의 전쟁터로 변모한 배경에는 현대 사회와 미디어가 주입하는 모순적 명령이 자리한다. 미디어는 한편으로 ‘먹방’과 화려한 미식의 세계를 전시하며 “먹어라, 많이 먹어라. 입을 통해 욕구를 채우고, 행복해져라”라고 속삭인다. 음식은 위로이자 보상이며, 누려야 할 권리라고 말한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마른 몸을 이상적인 자기 관리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먹지 마라, 날씬해져라”라고 압박한다. 다이어트 광고와 건강 담론은 식욕을 통제해야 할 죄악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개인은 혼란에 빠진다. 먹는 행위는 단순한 생리적 충족을 넘어 ‘욕망을 허락할 것인가, 통제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도덕적 시험대가 된다. 특히 여성에게 ‘먹음’은 오랫동안 자기 절제의 척도로 여겨졌고, 최근에는 남성 역시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미디어의 규율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날씬하고 균형 잡힌 몸은 성공과 유능함의 기호가 되었고, 음식 앞에서의 망설임은 자기 통제 능력을 증명하는 사회적 행위로 바뀌었다.



불안을 먹는 사람들


“나는 배고픈 게 아니라 불안한 것이다.”


수많은 섭식장애 경험자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이 말은, 현대 사회에서 음식이 어떻게 감정의 대리물이 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현대인은 이제 배고프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우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음식을 찾는다. 먹는 행위는 감정적 불안과 공허를 막으려는 위태로운 시도이자, 동시에 음식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자기 고백이 된다.


냉장고 앞에서 서성이며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는 모습, 스마트폰의 배달앱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할 때의 심리적 갈등, 음식을 앞에 두고 젓가락을 들었을 때, 곧 있을 욕구충족의 기쁨과 함께 내쉬게 되는 한숨의 교차, 폭식 후 밀려드는 극심한 자책감... 이 모든 장면은 음식이 더 이상 순수한 영양 공급원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내면의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출입구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일상에 스며든 공포: 음식이 폭력이 될 때


이러한 감정적 혼란은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은밀하지만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가족과의 저녁 식탁은 즐거운 대화의 자리가 아니라, '더 먹어라'라는 강요와 '살 좀 빼라'는 잔소리가 교차하는 불편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야근 뒤 피로를 달래려 시킨 치킨은 처음엔 위로처럼 다가오지만, 곧 '내일 체중이 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으로 바뀌며 또 다른 자책을 낳는다. SNS 속에는 풍족하고, 먹음직스럽고 화려한 음식 사진과 함께 완벽에 가까운 몸매의 남녀가 나란히 등장한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먹고 싶다'는 갈망과 '먹으면 살이 찐다'는 공포에 가까운 걱정 사이에서 흔들리며, 혼란스러운 감정적 줄타기를 이어간다.


“음식이 무서웠다. 먹는 순간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기분이었다.” 한 섭식장애 환자의 고백처럼,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고 감각적 만족을 주는 조력자를 벗어나, 신체를 위협하는 독이자, 자아를 잃게 만드는 공포의 매개체로 변이하고 있다.


인간은 먹지 못하면 죽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먹는 행위 자체를 두려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음식은 영양이라는 물질적 가치를 넘어 사회적 규범, 문화적 압박, 그리고 개인의 내밀한 감정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상징이 되었다.


결국 현대인은 ‘먹는다’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를 통해 매일 자신의 존재 가치와 느낌, 그리고 감정 상태를 위태롭게 증명하고 있다. 음식은 따뜻한 위로이자 칼날이고, 삶을 붙잡아 주는 끈이자 공포의 무대다. 인간은 식탁 앞에서, 매번 자신의 내면과 사회, 그리고 공포의 본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2장. 거식증과 폭식증


거식과 폭식, 내면이 몸과 벌이는 전쟁


거식증과 폭식증은 단순히 식사량을 조절하지 못하는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감정의 언어를 잃어버린 개인이 자신의 몸을 무대 삼아 벌이는 위태롭고 처절한 투쟁이다. 섭식장애의 진정한 뿌리는 식탁이나 체중계 위에 있지 않다. 통제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삶, 조각나고 흔들리는 자아상, 좌절된 관계 속에서 길을 잃고 소용돌이치는 감정, 바로 그 깊은 내면에 핵심이 있다.


거식증은 종종 극단적인 체중 감량 욕구로 오해받지만, 그 심층에는 ‘통제를 통한 생존’이라는 절박한 동기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이 자신의 삶의 요소인, 학업, 돈, 관계, 미래와 같은 것들 중, 그 무엇 하나도 스스로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빠졌을 때, ‘먹지 않는 행위’는 자신이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왕국이 된다.


굶주림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은 혼돈스러운 세상에 맞서는 자기 수련처럼 느껴지며, 체중계의 숫자를 줄이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성취감을 안겨준다. 이 왜곡된 성취감 속에서 개인은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외부 세계의 요구와 기대를 거부하는 소극적 저항이자, 자신의 존재를 지워나감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인 것이다.


반면, 폭식증은 억압된 감정의 ‘통제 불능적 폭발’이다. 말로는 차마 표현하지 못한 채 내면에 쌓여 있던 분노, 수치심, 슬픔, 그리고 존재를 집어삼킬 듯한 공허함이 어느 순간 ‘거대한 허기’라는 가면을 쓰고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폭식의 순간은 감각적 쾌락을 동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강렬한 음식의 자극으로 고통스러운 내면의 소리를 잠재우려는 감정적 마취 상태에 가깝다. 그러나 이 폭력적인 자기 위로는 짧은 해방감 뒤에 극심한 자기혐오와 죄책감을 남긴다. 이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뒤따르는 구토나 설사약 복용 등의 정화 행위는, 음식을 비워내는 동시에 더러워진 자신을 정화하려는 고통스러운 의식이 된다.


결국 폭식증은 ‘감정적 억압 → 감각적 폭발 → 죄책감과 정화’라는 파괴적인 순환의 굴레에 개인을 가두고, 자아를 서서히 잠식해 간다.



이처럼 거식과 폭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같다. 바로 처리되지 못한 감정이 신체를 점령하고, 먹는 행위를 통해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는 감정 조절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개인이 자신의 몸을 상대로 벌이는 마지막 전쟁과도 같다.



미디어라는 왜곡된 거울


이처럼,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이 처절한 투쟁은,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상적 신체'라는 거대한 거울 앞에서 더욱 잔인하게 왜곡되고 증폭된다. 현대 미디어와 SNS는 단지 이미지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마른 몸은 성공과 자기 관리의 증명이며, 곧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강력한 신화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유포한다. 화면 속 완벽하게 조각된 몸들은 현실의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심판하는 내면화된 감시자가 된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이 내면으로 파고들 때, 개인의 자아상은 필연적으로 흔들린다.


“SNS 속 완벽한 몸들을 보고 있으면, 나 자신이 한없이 결함투성이처럼 느껴진다.”
“폭식으로 잠시 현실을 잊지만, 뒤따르는 죄책감에 다음 날은 굶어야 한다. 이 굴레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이러한 고백들은 단순한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미의 기준이 어떻게 개인의 정신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이 신체 규율의 압박은 더 이상 특정 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초기에 여성을 주된 통제 대상으로 삼았던 이 시선은, 이제 남성과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자기 몸에 대한 엄격한 통제’라는 보이지 않는 규율 아래 놓이게 되며, 이는 섭식장애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숫자의 감옥, 계산된 자아


섭식장애의 세계에서, 혼란스럽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차갑고 명료한 숫자의 언어로 대체된다. 이는 고통스러운 내면을 다루기 위한 처절한 자기 방어 기제다. 감정은 주관적이고 모호하여 통제 불가능하게 느껴지지만, 숫자는 객관적이고 명확하며 통제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체중계의 숫자, 섭취한 칼로리, 허리둘레 사이즈는 더 이상 단순한 측정값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와 그날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절대적인 척도이자 실존의 성적표가 된다. 이 가혹한 계산 속에서 개인의 풍부한 내면세계는 제거되고, 자아는 숫자로만 증명되는 납작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고, 먹은 모든 것을 노트에 적는다. 그 숫자들이 하루의 감정을 결정한다.”
“숟가락을 들 때마다 내가 또 무너질까 봐 두렵다.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린다.”


이러한 고백들은 음식이 생명의 원천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식사가 평온한 일상에서 매 순간 자신과 벌이는 전쟁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허기는 더 이상 생리적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숫자로 세워 올린 통제의 벽에 균열이 생겼음을 알리는, 내면의 불안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감정적 위험 신호로 둔갑한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섭식장애로부터의 회복은 단순히 식습관을 교정하는 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숫자의 감옥에서 벗어나 잃어버렸던 감정의 언어를 되찾는 근본적인 여정이다. 몸이 보내는 비명과 신호를 다시 신뢰하고, 자신의 존재를 평가가 아닌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 즉 왜곡된 ‘몸의 언어’를 섬세한 ‘감정의 언어’로 재번역해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치유는 음식이 무섭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가 왜 두려워하는지, 그 두려움 뒤에는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변화는 시작된다. 그러면 숨어 있던 진짜 감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외로움, 분노, 수치심, 미움, 열등감, 공허함... 그러한 불안정한 감정들 때문에 먹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음식과 감정의 자동반응 고리를 끊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회복이란 사라졌던 자기 서사의 주도권을 되찾는 과정이다. 숫자가 써 내려가던 삶의 설계도를 지우고, 자신의 진솔한 감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 비로소 개인은 자신의 몸과 감정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