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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
그리고 좀비가 탄생했다.

부활했지만 추방당한 자들에 관하여

by Mind Thinker

공포의 본질 3편 4장.


1.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던진 이 선언은 단순한 반종교적 도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구적 존재론의 심연이 무너졌다는 자각이며 인간이 의지해 온 의미 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문명 내부의 파열음이었다.


신은 단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의 이름이 아니었다. 신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던 구조 자체였으며,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해주던 궁극적 원리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는 말은, 그 의미의 구조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한다.



중세까지 인간은 자신이 신의 피조물이며, 삶의 목적과 죽음 이후의 구원이 이미 주어진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과학이 발전하고, 자본이 세계를 재구성하며, 계몽주의가 이성을 중심에 세우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중심적 의미’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렇게 문명은 신을 죽였다. 하지만 그 대가를 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신의 죽음은 단지 신학적 허무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던 중심이 사라진 상태, 즉 존재는 있으나 목적은 없는 세계의 도래였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신의 이름으로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자본이 대체했다. 아니 자본이 신을 삼켜버렸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인간은 단지 돈을 벌고 그것을 소비하는 존재가 되었다. 끊임없이 작동하는 시스템 안에서 삶을 이어가지만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이 기능에 의미는 없다. 인간은 이제 ‘사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삶은 시스템 안에 갇혀 있고, 의미는 실종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의미 없는 구조 속에서 의미를 상실한 삶을 지속하고 있다.




좀비에게 신은 없다. 좀비는 부활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존재다. 좀비는 기적이 아닌 오작동된 생물학에 의해 탄생했다. 좀비는 살아 있지만, 천국도 지옥도 아닌 텅 빈 거리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좀비는 니체적 허무의 현실화다. 그들은 신 없이 살아 있고, 기억 없이 존재하며, 죽음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좀비는 부활했지만, 의미를 회복하지 못한 변형된 형상들이다. 기독교적 세계에서의 부활은 사랑과 희망, 구원을 의미했다. 좀비는 부활했다. 하지만 의미가 제거된 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변질된 생물로 되살아났다.


자본은 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인간은 물론이고 신마저 자본의 질서 안에 흡수해 버렸다. 자본은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고리로 인간의 욕망을 더욱 증폭시켰다. 국가와 종교는 자본의 하수인이 되었고, 윤리와 도덕은 파편화되고 분열되었으며, 공동체와 가족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갈등과 불안의 무대가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많은 시스템 속에 있으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점점 더 희미해졌다. 좀비는 이 공허를 형상화한 존재다. 좀비는 제도에 의해 살아 움직이지만, 그 어떤 체계도 그에게 삶의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되 목적 없는 신체’이며, 허무를 걷는 육체 그 자체다.




2. 삶은 어디로 향하는가?


현대인은 매일 아침 일어나 비슷한 행위를 하며, 먹고 마시면서 하루를 소비하고, 또 다른 소비를 계획하며 잠든다.


쇼펜하우어는, 그 이유를 의지(Wille)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의지는 방향 없는 맹목적 충동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은 이성과 목적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충동과 멈출 수 없는 생물학적 에너지다.


그 충동은 생존을 추구하지만, 삶의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먹고 자고 일하고 번식하는 행위는 하나의 목적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들을 관통하는 궁극의 이유는 없다. 이것이 그가 말한 ‘의지의 본질’이다. 의지는 그저 움직인다. 하지만 어디로, 왜 움직이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좀비는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목적지를 가지지 않지만, 언제나 어딘가로 향한다. 그들의 걸음은 비틀거리고, 느리고, 무언가에 의해 지연되고, 의미 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좀비의 걸음은 인간 의지의 이미지화다. 왜 걷는가? 모른다. 그들은 단지 움직일 뿐이다. 그들은 ‘의지’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 의지는 방향이 없다. 그들은 생활을 반복하지만, 존재를 진전시키지 않는다.


욕망은 고통의 근원이며, 만족은 실현되지 않거나 실현되더라도 또 다른 욕망으로 치환된다.


좀비는 욕망이 없지만 끊임없이 욕망한다. 그들은 사람을 문다. 그것은 욕망 아닌 욕망이다. 배고프지 않지만 먹고, 먹어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욕망하지 않는 욕망의 행위를 반복한다.


이것은 현대인의 소비 행위, 그리고 욕망 구조와 닮았다. 현대인은 물건을 사지만, 오래 사용하지 않는다. 곧 다른 것을 원한다. 매일 먹지만 만족하지 않는다. 더 맛있는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더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언제나 사다리를 찾는다.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차버리고 또 다른 사다리를 찾는다. 이러한 욕망의 추구는 끝없이 반복된다. 욕망 없는 욕망, 동기 없는 반복은 좀비의 존재 방식과 거울처럼 닮아 있다.



3.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은 자유로이 태어났으나,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한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본질 없이 존재한다. 그는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어떤 의미나 목적, 역할을 부여받기 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쾌락도 특권도 아니며, 오히려 책임과 불안과 같은 감정적 무게로 인간을 짓누른다.


자유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택의 모든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을 자유조차 없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며, 인간은 항상 '내가 이 상태로 살아도 되는가? 이 삶은 내가 의도한 것인가?'라는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좀비는 어떤 주술이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타자의 통제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지, 누구를 공격할 것인지, 언제 멈출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 껍질을 두른 무의식적 자동반응일 뿐, 진정한 선택의 과정을 포함하지 않는다. 좀비는 완전한 자유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고, 자기 삶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것은 실존적 의미에서 보면 가장 공포스러운 자유의 형태, 즉 <무의미 속에서 무제한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무한한 불안을 가져온다. 그래서 인간은 관습을 따른다. 직장을 선택해 자아를 주어진 역할에 위탁한다. 신념이나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타인의 권위에 전가한다. 그것은 자유가 불안을 넘어 공포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 자유롭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묶어 둔다. 좀비는 바로 이 자유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는 결정체다.


현대인들은 꿈꾼다. 정해진 길을 고민하기 않고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는 삶을 꿈꾼다. 자유의 감정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간은 점점 무선택의 평안을 향해 진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 국가, 세계 속에서 치열하게 달리며 좀비로 진화하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현대인이 자신의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도피가 무기력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공포, 즉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적극적 선택이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구성해야 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며,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고독을 감내해야 한다. 프롬은 이것이 현대인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상태라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안정된 제도, 집단에의 소속, 분명한 역할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외부에 의탁한다는 것이다.


프롬이 말한 도피의 한 형태는 권위에의 복종이다. 인간은 자기의 불안을 견디지 못할 때 더 큰 권력이나 구조에 자신을 통째로 위탁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다. 오늘날의 직장, 관료제, 기술 시스템은 이런 도피의 전형적 예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직무 절차,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집단의 익명성 등은 ‘자아’를 점점 의사결정이 필요 없는 기능 단위로 축소시킨다.


좀비는 바로 이 상태의 시각적 형상이다. 그들은 결정하지 않고, 주체를 상실한 생물적 단위로서 도피한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율성의 상실은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 구조 자체의 와해로 이어진다. 판단은 타인에게 맡기고 , 감정은 억제하거나 차단하고 , 윤리는 정해진 코드로 대체한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느끼지 못하며, 결국 감정이 작동하지 않는 신체로 변해간다.


좀비는 말 그대로 윤리 없는 존재, 감정 없는 신체, 판단하지 않는 생존 기계다. 그들은 더 이상 악하지 않으며, 선하지도 않다. 그는 어떤 가치도 작동하지 않는 중립적 괴물이다. 그러나 바로 그 무색무취가 현대인의 감정적 무력감을 정밀하게 반영한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살고 있지 않고, 움직이지만, 감정도 윤리도 없는, 자유로부터 도망친 인간의 거울이자 그림자다.



4. 진화의 단계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점차 기계적이고 기능적으로 변하고 있다. 한 인간이 호흡하고, 움직이며, 역할을 수행하면 살아 있는 존재로 정의한다.


좀비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있지 않다. 심장이 뛰고, 움직이며, 소리를 내지만, 감정이 없고, 자아가 없으며, 기억도 없다. 생명을 가졌지만, 삶을 가지지 못한 존재다. 신체는 살아 있지만, 정신은 비어 있다. 이것이 바로 불사(undead)다.


불사는 죽은 자가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죽음과 삶 모두로부터 유예된 존재다. 그는 사망선고를 받지 않았지만, 생명선언도 불가능한 상태에 머문다.


좀비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겁내지 않고, 도망가지 않으며, 자신이 파괴되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공포를 제거한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죽음을 잃어버린 존재다. 고통이 없다는 것은, 죽음이 더 이상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끝이 없는 생존은, 의미를 회복할 수 없는 무한한 지연이다. 쾌락이 없는 욕망, 고통이 없는 파괴, 감정 없는 생명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고 있을 뿐인 상태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감정이 제거된 기능 단위, 혹은 데이터 노드(data node)처럼 취급된다. 출근 시간에 맞춰 이동하고,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고, 시스템이 요구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자기다움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프로파일과 알고리즘 속에서 스스로를 규정한다.


이런 인간은 정서적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기계의 부품이다. 좀비는 이 기계화의 종착지다. 그들은 더 이상 판단하지 않고, 윤리를 고민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스템과 무관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시스템보다 더 철저히 자동화되어 있다. 그들은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가 꿈꾸는 ‘고장 나지 않는 생존기계’의 형상이다.


고통이 없는 생존은 평화로울까. 고통이 없다는 것은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 기준점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자각하고, 고통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며, 고통을 통해 삶의 방향을 수정한다. 좀비는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존재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깨닫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존해 있지만, 그 생존은 존재의 소멸 이후에도 작동하는 신체의 잔여물일 뿐이다.


좀비는 죽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아 있는 자로 분류되지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 그들은 죽음을 극복한 자가 아니라, 삶으로부터 추방된 자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처럼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 상태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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