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자화상
공포의 본질 3편 3장.
1968년, 미국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다.
흑인 민권운동은 최고조에 달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암살당했으며,
베트남 전쟁은 반전 시위와 국가 폭력이 충돌하는 전장의 연장이었다.
무장 경찰과 총에 맞은 시민들, 불타는 도시...
흑백 텔레비전이 중계한 폭력의 이미지는 더 이상 ‘미지의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부국인 미국 사회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바로 이 해,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는 <Night of the Living Dead>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작품은 공포의 개념을 단순히 확장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기존의 좀비는 명확한 설명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보코르의 주술로 움직이고, 어떤 특정한 이유로 좀비화되며, 항상 통제자-피통제자의 관계 속에 있었다.
그러나 로메로의 좀비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왜 살아났는지 알 수 없다. 과학적 원인도 없고, 종교적 설명도 없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으며, 단지 무리를 지어 걸어오고, 보는 대상을 뜯어먹는다.
이 괴물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좀비를 더 무섭게 만든다.
로메로는 좀비에게 어떤 설명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괴물은 이성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공포는 이제 어떤 기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공포는 기원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로메로 이전, 공포는 항상 외부의 침입자였다.
드라큘라는 동유럽에서 온 괴물이고,
늑대인간은 밤에 변하는 이방인이고,
귀신은 과거로부터 온 잔해였다.
그러나 로메로는 공포의 방향을 바꾼다.
공포는 더 이상 바깥에서 오지 않는다.
공포는 내부에서 터진다.
좀비는 평범한 이웃이고, 가족이며, 아이이며, 노인이다.
그들은 갑자기 돌아서고, 물고 뜯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상실한 채
그저 ‘무명’인 상태로 움직인다.
이때 공포는 단순히 생존의 위협이 아니다.
공포는 ‘내가 알던 사람이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
즉 정체성과 관계가 파괴된 블랙홀에서 발생한다.
로메로의 좀비는 개별 존재로 기억할 수 없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 감정을 보이지 않으며, 누가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다.
그들은 무명이고, 무정하고, 무질서하다.
여기서 로메로가 구현한 공포는 단순히 좀비의 공격이 아니다.
그 공포는 개체의 소멸, 즉 내가 사회 속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 자아로 존재하지 못하고,
그저 군중의 일부, 감정 없는 다수성으로 흡수된다는 존재론적 공포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다수성(das Man)’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한다.
‘나는’ 느끼지 않는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한다.
좀비는 그러한 ‘비진정성(Unauthenticity)’을 가장 물리적이고 시각적으로 구현한 상징이다.
로메로는 단순히 공포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시대가 숨기려 했던 감정의 잔해들을 직접 스크린 위에 던져버렸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국가 폭력의 내면화, 민권운동의 상처, 인종 갈등의 응축된 공기...
이 모두는 로메로 영화의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좀비의 정서적 토양이었다.
영화속 주인공 벤은 흑인이다. 영화 마지막, 그는 좀비에게 죽지 않는다. 그를 죽인 것은 사람들, 정확히는 그를 오해한 백인 무장 민병대다.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니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생각한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좀비는 질문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질문이 된다.
좀비는 모든 의미가 사라진 공간에서, 생존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좀비의 폭력은 조직되지 않고, 욕망은 설명되지 않으며, 반복적 행위는 의미 없이 진행된다.
어쩌면 이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생활의 획일화, 폭력의 일상화, 관계의 해체를 상징하는
현대인의 무표정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자화상.
좀비 이전, 공포는 이야기 속에서 등장했다.
드라큘라는 불멸에 대한 욕망과 사랑의 배반에서 비롯된 존재다.
늑대인간은 인간 안의 억압된 야성, 본능, 이중 자아를 상징한다.
유령은 풀리지 않은 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이다.
이들은 모두 개인의 사연, 고유한 감정, 시간 속의 트라우마를 지닌다.
그래서 그들은 서사 속에서 발생하고, 갈등하고, 해소되며, 퇴장한다.
하지만 좀비는 스스로 욕망하지도 않고, 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으며,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출현하고, 반복하며, 번식한다.
그렇게 좀비는 서사를 거부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서사를 가질 수 없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는 이름이 없다. 그는 기억이 없다. 그는 고통을 말하지 않고,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왜'라는 질문을 무력화한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유령, 프랑켄슈타인... 은 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만 좀비는 무응답이다.
좀비는 감정이 없다.
그는 공포를 느끼지 않고, 고통에 반응하지 않으며,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이고, 그의 몸짓은 기계적이다. 이러한 비감정성은 단지 캐릭터의 성격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감정을 잃어버리는 방식 자체를 투사한다.
현대인은 감정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반응일 뿐이다. 말하고 싶어도, 더 이상 자기만의 언어가 남아 있지 않다.
좀비는 이런 시대의 감정적 공허를 상징한다.
고전적 괴물은 이야기 속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이야기의 시점이자 핵심적 흐름이었다.
하지만 좀비는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다. 그는 배경이다. 그는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이 상태는 언제든지 재생산될 수 있으며, 한 명이 쓰러지면,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채운다. 그는 서사적 기능의 중심에서 제외된 최초의 괴물이다. 이처럼 좀비는 단지 괴물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은유다.
현대의 교육과 문화는 비슷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좀비는 끝없이 복제되어 나타난다.
노동의 기계화되었고 좀비는 감정 없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현대인의 사회적 소외는, 집단은 있으나 개인적 관계는 없는 좀비무리와 닮아 있다.
인간이지만 주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은, 좀비의 형상으로 거울에 비춘다.
좀비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인간의 초상이다.
그는 인간성을 잃고도, 살아남는 법만 배운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