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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이데올로기의 얼굴

공포의 본질 3편 1장

by Mind Thinker


좀비는 괴물이 아니었다.
좀비는 아프리카에서 아이티로 강제 이송된 노예들의 영혼 안에서 태어났다.


서아프리카 전통 신앙은 식민지 시대 유럽 가톨릭과 언어, 문화적 억압과 융합되며 아이티 특유의 ‘크리올 혼종 문화(Creole syncretic culture)’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인 부두(Vodou)는 삶과 죽음을 선형적 구분이 아닌, 서로 넘나드는 순환 구조로 이해했다


여기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돌아옴은 축복이 아니라, 어떤 경우 저주였다.


좀비는 바로 그 저주의 형상이었다.

육체는 살아 있으되, 자기 영혼은 부두의 악한 사제(bokor)의 의식에 의해 박탈된 존재.

그는 더 이상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었다.

이 형상은 단순한 종교적 환상이 아니다.

좀비는 식민주의와 노예제라는 실재적 구조의 은유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아이티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설탕 플랜테이션 경제의 중심에 있었다. 이 작은 섬에는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해진 것은 단순한 육체적 노동의 착취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겪은 식민주의는 단지 ‘고통스런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 자체를 제거당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은 원래의 이름을 잃었고, 고향의 언어를 말할 수 없었으며,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신념과 공동체적 유대를 박탈당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생산의 도구, 즉 '노예'라는 기능적 존재일 뿐이었다. 몸은 살아 있었지만, 그 몸이 누구의 것인지를 말할 권리는 없었다. 이때 이들이 느꼈던 것은 단순한 고통이나 억압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파괴, 즉 ‘내가 더 이상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존적 상실감이었다.


이러한 감각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공백이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된 채 살아가야 하는 상태. 바로 이 체험이, 후에 좀비라는 상징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한 정서적 기원이자, 문화적 기호의 씨앗이었다.


그렇게 좀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자,

자기 자신을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닌 자로 등장한다.



좀비는 죽음을 상징하지 않는다.

좀비는 오히려 죽지 못한 존재다.

죽지도 못하고 살아 있어야 할 이유조차 박탈당한 채 남겨진 비자발적 생존자다.

선택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자신의 손으로 삶과 죽음을 선택할 권리조차 없다.

그것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결정할 수 있는 주체성 자체의 실종, 즉 탈주체화의 극한 상태다.


부두 신앙에서 좀비가 가진 원형적 의미는 오늘날 서구 문화가 만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괴물이 아니었다. 침략자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괴물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이유 없이 물지 않는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복종한다. 이 복종은 자기 결정권의 포기가 아니라, 결정할 수 있는 자아 자체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비는 가장 슬픈 존재론적 형상이다.


그것은 공포의 형상이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비탄에 가까웠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좀비의 형상은 그들의 원래 모습을 지워버리고 그들을 괴물로 규정한 이후의 이야기다.



좀비의 탄생


1929년, 미국의 작가 윌리엄 시브룩(William Seabrook)은 아이티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저서’ The Magic Island’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두 신앙과 좀비의 존재를 신비롭고 이국적인 기이함(exotic strangeness)으로 포장했다. 그는, 직접 보았다는 좀비들을 ‘말이 없고, 감정이 없으며, 명령에만 반응하는 존재’라고 묘사했다. 그 모습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살아 있는 시체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이 책은 서구 세계에 처음으로 ‘좀비’를 문명 바깥의 이질적 괴물로 정착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왜곡이 있었다. 시브룩은 문화적 맥락을 제거하고, 정서적 상징을 오용하며, 역사적 기원을 의도적으로 망각했다.


좀비는 아이티인들에게 있어 영혼을 빼앗긴 자,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

그리고 타인의 지배에 의해 존재하는 비인간적 상태였다.

그것은 슬픔과 비애의 상징이었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브룩은 그것을 관광 가능한 이미지, 재현 가능한 이야기, 기이함의 서사적 상품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그는 본질을 삭제했다.

좀비가 탄생한 식민주의와 노예제의 실제적 맥락.

그 형상에 담긴 감정적, 사회적, 역사적 고통의 기억.

좀비가 본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사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오해가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의 연장선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밝혔듯,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동양을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구가 자기 정체성을 정의하기 위해 타자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구성하는 권력의 장치였다.


이 시선은 문화적 차이를 단순한 이질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를 위계로 변환시키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미개하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고정시킨다. 즉, 서구는 자기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양과 식민지를 ‘저급함’의 형상으로 재단한다.


침략적 문명은 야만을 필요로 하고, 이성은 비이성을, 규칙은 혼돈을 전제로 한다.
그들에게 차이는 상호 인정의 조건이 아니라, 억압의 기초가 된다.
그 결과, 세계는 지배를 위한 위계적 구도로 조직된다.
이것이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그 구조 안에서,

좀비는 ‘설명할 수 없는 괴물’, ‘이해할 수 없는 야성’, ‘통제되지 않는 공포’의 형상으로 재가공되었다.



좀비는 단지 기이한 존재가 아니라, ‘지배의 이데올로기’를 시각화한 타자가 된다.

좀비는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서구가 대신 말해준다.

좀비는 자기 기억을 갖지 않기에, 서구는 대신 그 기억에 덧칠한다.

좀비는 저항하지 않기에, 서구는 그 위에 ‘공포’라는 이름을 덧씌운다.

좀비는 기억을 잃고 의지를 박탈당한 채, 타자의 해석 속에서 ‘공포’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괴물로 가공된다.

이로써 좀비는 완성된다.


그의 진실이 삭제될 때, 그는 가장 효과적인 공포가 된다.

이제 그는 원래의 자신이 아니라, 서구가 원한 괴물이 되었다.

그는 문명 바깥의 야만이자,

설명할 수 없는 위험이며,

정복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의 얼굴이다.


좀비는 이때부터 문명 안의 타자가 아니라,

문명 바깥에 있어야만 하는 괴물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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