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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설계된 권력

공포의 본질 2편 4장

by Mind Thinker

1. 감정 설계.


공포의 감정은 언제나 개인의 고유한 경험으로 여겨진다.
무섭고 불안하다.
그런데, 그 무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근대 이후의 권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권력은 더 이상 단순히 억압하지 않는다. 이제 권력은 신체를 통치하고, 삶 전체를 관리한다.'

그는 ‘생명권력(biopower)’이라는 개념을 통해,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몸, 건강, 욕망, 감정에까지 작동하는지를 분석했다.


그중에서도 공포는 가장 강력한 통제 도구다. 공포는 몸을 얼어붙게 하고, 판단을 멈추게 하며, 질문 대신 복종을 유도한다. 즉, 공포는 권력이 인간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감정 작동 메커니즘이다.


누군가를 통제하고 싶다면 그에게 ‘두려움’을 주입하라.

무서움의 대상이 정해지는 순간,

그 사람의 감정은 물론, 행동과 판단까지 이미 권력의 구조 안에 포획하는 것이다.



2. 공포의 목록.


당신은 무엇이 무서운가?

공포의 목록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랐다. 하지만 언제나 언제나 누군가가 그 목록을 정해왔다.


중세 유럽 – 공포는 신의 언어였다.

이 시기 공포의 목록은 악마, 마녀, 지옥, 이단이었다. 교회는 신의 이름으로 윤리를 생성하고, 감정을 통치의 도구로 삼았다.


사제들은 지옥의 형벌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타오르는 불, 끝없는 고통, 심판의 날. 이러한 묘사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서적 현실이었고, 사람들의 일상적 공포의 토대였다.


“불신자는 지옥에 간다”, “마녀는 공동체를 타락시킨다”는 말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각인시키는 문장으로 작용했다. 이 감정들은 개인의 양심을 압박하고, 내면적 검열을 작동시키는 감정의 사슬이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법 이전에, 제도 이전에, 감정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공포는 단지 어떤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게 만드는 내면의 통제장치였다.


근대 시민사회 – 공포 도덕의 감시자가 되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공포의 목록은 바뀐다.

범죄자, 타락한 자, 정신이상자, 위험한 군중...

이들은 더 이상 종교적 이단이 아니라, 사회적 일탈자로 규정된다.


국가는 종교 대신 법과 도덕을 통해 시민을 규율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여전히 감정이었다.

두려움, 수치심, 불안.

“범죄자는 격리되어야 한다”, “타락한 자, 광기는 위험하다."는 식의 내러티브는 정상성의 경계선을 강화하고,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감정적으로 차단했다.


감정은 시민을 제도에 순응하게 하는 심리적 접착제였다. 사람들은 처벌보다도 수치심과 배제의 공포를 더 두려워했다.


현대사회 – 공포는 데이터가 된다
오늘날의 공포 목록은 다시 바뀐다.

테러리스트, 바이러스 감염자, 외국인, 낙오자...

공포의 대상은 가시적이고 구체적이며, 무엇보다 통계화되고 시각화된다.


이제 공포는 종교도, 윤리도 아닌 정보의 형태로 유통된다.
언론은 실시간으로 테러 장면을 중계하고, 감염자 수를 자막으로 띄우며, 외국인의 범죄율을 그래프로 보여준다. 정부는 감정의 확산을 예측하고 관리하며, 데이터는 감정의 과학이 된다. 사회는 점점 더 감정의 자동 반응 시스템이 되어간다.


현대의 공포는 구체적인 어떤 것보다,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감염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타인의 시선, 탈락자라는 낙인의 형태로 작동한다. 즉, 공포는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자기 감시의 신경회로가 되어버린다.


공포의 대상은 바뀌지만, 그 기능은 같다
시대마다 공포의 표적은 달라졌지만, 그 기능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을 유지한다.
공포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감정의 전략화다.

인간은 무엇을 무서워해야 할지 배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인간의 마음을 설계하고, 행동을 조절하며, 삶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공포는 단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다.



3. 감정 훈육의 제도들 – 가족, 학교, 교회, 국가


감정은 자연스럽게 자라나지 않는다.
감정은 훈육된다.
그리고 그 훈육은 가장 가까운 공간, 가장 친숙한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감정은 '느끼는 방식'이 아니라 '느끼도록 길들여진 방식'이다.


가족 – 감정의 첫 교정장치

가정은 아이가 세상을 처음 만나는 공간이자, 감정의 방향성이 처음 규정되는 장소다.

아이가 공룡을 보고 “귀엽다”라고 말했을 때, 어른은 반사적으로 말한다. “아니야, 그건 징그럽고 위험해.”

이 한 마디는 단순한 의견 전달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방향을 교정하는 지침서다.
여기서 감정은 표현이 아니라 승인의 대상이 된다.


공포의 정체성은 이렇게 구성된다.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고, 좋아할 것을 좋아하라고 배운다. 감정은 타인의 기준에 맞게 조절된다. 이는 아이가 세계를 ‘느끼는 방식’ 자체를 구조화하는 작용이다.


학교 – 성과로 감정을 훈련하는 곳

학교는 감정을 성과지향적 인간으로 재구성하는 제도다.

“지각하면 벌점이다, 이 점수로 뭐 해서 먹고 살래?, 노숙자가 되고 싶은 거지?, 전교 10등까지만...”


이러한 언어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감정을 동원한 위계화의 언어다.
처벌의 공포는 행동을 통제하고, 경쟁의 불안은 자기 검열을 내면화시킨다. 결국 학생은 두려움 때문에 공부하고, 수치심 때문에 비교하며, 성공이라는 추상적 기준에 감정을 맞춘다.

이때 감정은 더 이상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은 성과를 위한 동기부여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종교 – 죄책감으로 감정을 제도화하다

종교는 감정을 가장 깊숙이, 존재의 윤리적 구조 안에 심는다.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까지 보고 있다.”


이 메시지는 타인의 감시가 아닌 신의 감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감시는 결국 자기 감시로 이어진다. 죄책감은 가장 강력한 감정 통제의 장치다. 죄의식은 행동뿐 아니라 욕망까지도 통제하게 만든다. 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이 자신을 응징하도록 학습하는 것이다.


이때 감정은 단지 신앙적 반응이 아니라, 도덕의 감정적 뿌리가 된다. 즉, 종교는 감정을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제도화된 감시 메커니즘으로 전환시킨다.


국가 – 공포의 재생산과 정치적 자산화

국가는 감정을 정치적 동원과 통제의 수단으로 삼는다.

전쟁의 위협은 '국가 안보'를,

경제위기의 위협은 '정부의 보호'를,

외부의 위험은 '우리'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

언론과 정부는 감정 자극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며, 공포는 국가 권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자산이 된다.

“국가가 없으면 당신은 위험해진다.”
이 구조는 국가가 감정의 보호자이자 조율자로 군림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불안정한 감정을 국가에 위탁하게 된다.


감정은 자발적인 내면의 흐름이 아니다.
감정은 제도 속에서 훈육되고, 길들여지고, 순응하도록 설계된다.

인간은 무서워하는 법을 배웠고,
죄책감을 느끼는 법을 배웠으며,
비교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을 배웠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인간의 내면에서 ‘자기 검열’이라는 가장 완벽한 통제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정은 제도를 내면화하는 가장 정교한 메커니즘이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훈련된 감정을 지니고 살아간다.



4. 미디어의 역할 – 공포의 언어로 사회 조율하기


오늘날 감정을 가장 강력하게 설계하는 장치는 미디어다.
뉴스, 드라마, 예능, SNS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분노하며,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지시받는다.


뉴스 – 감정은 ‘정보’의 형식으로 소비된다

뉴스는 표면적으로는 사실을 전달하지만, 실제로는 사건을 감정적으로 배열한다.
주요 뉴스 포털의 상단에는 언제나 유괴, 성범죄, 강도, 테러, 전염병 같은 공포 중심의 사건이 배치된다. “000 전쟁발발, 주가폭락, 물가폭등, 산불이 전국을 다 태울 기세, 가축 전염병으로 농가가 다 죽어간다. 집값 하늘을 뚫을 듯....”


이러한 정보는 단순한 사건 전달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정서적 기조를 조율하는 장치다. 특히 ‘범죄 예방’, ‘공공안전’, ‘경각심’이라는 명분 아래 두려움이 일상적으로 정당화되고 반복 재생산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사건보다 감정에 반응하고, 공포는 뉴스 자체보다도 ‘뉴스를 통해 느끼는 사회 분위기’로 작동하게 된다.


뉴스는 감정을 주입하는 일상의 리듬이며, ‘불안’이라는 정서적 프레임을 고정시킨다.


예능과 드라마 – 감정의 규범을 연기하는 장르

드라마와 예능은 사회가 기대하는 감정의 표현 방식을 재현하고, 강화하는 매뉴얼이다.
슬퍼할 타이밍, 분노할 장면, 감동할 포인트는 이미 편집과 음악, 카메라워크를 통해 정해져 있다.

남성은 위기에서 침착하고, 여성은 고통 앞에서 눈물 흘린다.

가족 앞에서는 눈물이 미덕이고, 복수극에서는 분노가 정의로 기능한다.

이러한 감정 코드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서적 각본이다. 시청자는 이 각본을 보며 어떤 감정이 ‘정상적 반응’인지를 학습한다. 감정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틀 안에서 재생산되는 사회적 역할극이다.


특히 예능에서는 ‘감정 표현력’이 출연자의 인성까지 대변한다.
' 슬픈 장면에서 울지 않으면 공감 능력 부족하다..., 화낼 때 화내지 않으면 성격이 이상하다....'

감정은 선택이 아닌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가면이 되어 간다.


SNS – 감정은 클릭되는 쪽으로 진화한다

SNS는 감정 유통의 속도와 범위를 가장 폭발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 감정 유통은 알고리즘에 의해 조율된다.

분노, 혐오, 불안, 충격을 자극하는 콘텐츠일수록 클릭률이 높고, 댓글이 많고, 공유된다.

플랫폼은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성공한 콘텐츠’를 판단하고, 더 많은 유사 감정을 추천한다.

그 결과 감정은 더 자극적으로, 더 파괴적으로 변형된다. ‘무서워서 공유한 것’이 아니라 ‘공유됐기 때문에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구조 안에서 감정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감정은 알고리즘이 분류하고, 타인의 반응 속에서 유효성이 결정된다. ‘진짜로 무서운가?’가 아니라 ‘많이 무서워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된다.


뉴스는 두려움의 일상화를 통해 감정의 긴장을 유지하고,

드라마와 예능은 감정 표현의 규범을 각인시키며,

SNS는 감정의 증폭과 가속을 통해 감정 자체를 상품화한다.


그렇게 감정은 미디어가 설계하고, 사회가 유통하며, 권력이 조율한다



5. 젠더와 공포 그리고 차별과 혐오


감정은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한다. “무서운 것이 없어, 눈물을 잘 흘리지 않아” 같은 표현은 단순한 상태 설명이 아니라 정체성의 선언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표현은 자유롭지 않다.


감정은 언제나 사회적 역할 기대에 의해 구조화된 감정이다. 특히 성별(젠더)은 감정의 표출과 억제를 문화적으로 각인시키는 강력한 틀이 된다.

어린 남자아이는 이런 말을 듣는다.

“너 남자 맞아? 이깟 일 가지고 울고 그래?, 남자가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

이런 언어는 공포를 ‘여성적’이고 ‘무가치한’ 감정으로 구성한다.
'겁 많은 남자 = 여자 같다 = 약하다 = 무능하다'

이 도식은 남성의 감정을 억제하고, 남성성을 공포의 부재로 정의한다.


반대로, 공포를 느끼지 않는 여성은 이렇게 평가한다.

“쟤는 너무 세다. 여자가 저렇게 담이 크면 좀 무서워.”

여성은 ‘공포를 느끼는 존재’로 사회적으로 훈육된다.
'여성 = 약해야 한다 = 공포에 민감해야 한다'

이때 공포는 ‘여성성’의 증거이자, ‘여성다움’의 조건이 된다.


결국 공포는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젠더 규범을 유지하는 감정의 코드로 기능한다.
사회는 감정을 통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 모델을 생산하고,
개인은 감정의 억제나 과잉을 통해 그 정체성에 순응하거나 탈선한다.


공포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사회는 특정 감정을 특정 대상에게 집단적으로 투사함으로써 차별을 합리화하고 배제를 정당화한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공포와 혐오의 결합이다.

“게이는 역겹다.”

“이슬람은 위험하다.”

“정신이상자는 폭력적이다.”

“조선족은 도둑질을 잘한다.”

“외국인은 전염병을 퍼뜨린다.”

이 말들은 통계적 사실이 아니라, 감정화된 고정관념의 재생산물이다. 그리고 대부분 개인의 직접 경험이 아니라, 미디어, 교육, 제도, 대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학습된 감정의 구조다.


뉴스에서는 특정 집단의 범죄를 반복 보도하고, 드라마에서는 이질적인 인물을 ‘위험한 타자’로 묘사하며, 부모와 교사는 “저런 사람은 조심해야 해”라고 말한다. 이렇게 형성된 공포는 처음엔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시작되지만, 점차 ‘그렇다’는 확신으로 고정된다.

그 결과, 공포는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태도가 되고, 그 태도는 정책과 법, 공간과 일상의 구체적 차별로 연결된다.


공포가 제도적으로 자리 잡으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실현된다.

특정 집단에 대한 법적 제재,

주거지나 학교에서의 공간 분리,

고용에서의 기회 제한,

온라인, 오프라인에서의 존재 부정과 인간성 훼손


이렇게 공포는 단지 ‘무섭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 감정은 누군가를 밀어내고, 가두고, 사라지게 만드는 정치적 실행의 정당화 도구가 된다.


감정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은 구조의 일부이며, 권력이 감정을 통해 세계를 재단한다.



6. 공포의 정치학


사회는 법 이전에 감정으로 작동한다.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의 감정을 조율 가능한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이다. 인간은 감정을 자유롭게 느낀다고 믿지만, 실은 사회는 언제나 ‘느껴도 되는 감정’과 ‘느껴선 안 되는 감정’을 구획해 왔다.

‘슬픔’은 장례식장에서 허용된다.

‘기쁨’은 결혼식장에서 장려된다.

‘분노’는 다른 편에게는 응징이 된다.

‘혐오’는 정치적으로 재배치된다.

감정은 단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위치와 맥락에 따라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것이다.

이 감정의 지도를 설정하는 것이 바로 권력의 역할이다.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공포는 통치에 가장 효과적인 감정이다. 왜냐하면 공포는 판단을 정지시키고, 이성보다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몰라도, 왠지 무섭다.” 이 말은 이유 없이 행동을 멈추게 만드는 감정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이렇게 공포는 생각을 중단시키고, 질문을 미루게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포 앞에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복종하게 된다.


그리고 공포가 활성화된 사회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타자에 대한 경계,

낯선 존재에 대한 거부,

욕망과 감정에 대한 규제,

표현과 이동, 행동에 대한 통제,

그리고 복종

이 모든 반응은 감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차원에서 발생하지만, 그 작동 방식은 극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 위에 권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당신들의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안전’, ‘보호’, ‘안정’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공포를 정당화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언어다. 그러나 그 언어는 공포가 이미 구조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설득이다.


공포는 단지 몸의 반응이 아니라, 사회의 기억을 편집하고 역사까지 선택하게 만드는 감정의 명령어다.
그리고 그 명령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문화적인 모든 기획의 기반이 된다.


공포는 내면에서 자생한 본능적 감정 반응이 아니다.
공포는 타인이 설계한 구조적 반응이다.
공포는 권력이 몸에 각인시킨 해석의 습관이며,
인간이 자율적으로 느낀다고 믿는 감정조차 사회가 반복해 온 훈육의 결과다.


이것은 공포의 정치학이며, 통치의 감정 구조다.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는,

인간이 무엇에 복종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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