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본질 2편 3장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말한다.
“귀신은 죽은 사람의 혼령이다.” 그런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귀신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 이상한 역설은, 귀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감정의 잔여물, 혹은 감정이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귀신은 실체가 아니다. 귀신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만들어낸 ‘형상’이다.
예기치 않은 죽음, 억울한 상황, 말하지 못한 사정,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별…
그런 순간에 사람은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슬픔, 두려움, 죄책감, 분노 같은 감정들이 마음속에 얽히고 남는다.
그 감정은 주인을 잃은 채 공중에 떠돈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는 그것에 모양을 부여한다. 그 모양이 바로 ‘귀신’이다.
흰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열기도 한다. 그것은 시각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구체화다. 소화하지 못한 감정이 이미지로 발현된 것.
그래서 귀신은 사람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죽음을 둘러싼 감정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우리 사회에 찾아오는 정서적 잔향이다.
인간이 귀신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섭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귀신이 상징하는, 죽음에 얽힌 의미를
감당거나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긴 생머리, 흰 소복, 맨발, 창백한 얼굴.
한국 사회에서 '귀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형상은 대부분 '처녀귀신'이다.
왜 하필 ‘처녀’인가?
처녀귀신의 이미지는 단순히 시각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처녀귀신의 상징은 곧 사회가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통제해왔는가에 대한 문화적 진단이다.
유교적 가치관이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인격 주체가 아닌, 관계적 소속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 ‘아이의 어머니’로서 여성은 남성과 가문에 귀속될 때에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결혼은 여성의 사회적 완성이며, 출산은 그녀의 존재적 목적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미혼, 무출산, 자살, 억울한 죽음은 이 구조에서 벗어난 여성의 삶이며, 따라서 제도적 질서가 감당하지 못한 ‘예외자’의 위치에 해당한다. ‘처녀귀신’은 바로 그 예외자의 형상이다.
미완성의 상태,
질서 바깥의 존재,
가문과 사회로부터 수용되지 않은 자로서,
처녀귀신은 단지 죽은 여성이 아니라
‘제도 밖에 놓인 감정적 실체’의 귀환이다.
더 나아가, ‘귀신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민속적 신념이 아니라 사회적 죄책감과 억압된 불안이 감정적 은유로 표출된 구조를 드러낸다. 사회는 그녀의 죽음을 ‘완성되지 않은 삶’의 결과로 간주함으로써, 그 자체로 여성의 이탈을 낙인찍고 억제하려 한다. 자율성을 가졌던 여성, 제도에 포섭되지 못한 여성, 사회가 구조적으로 억압했던 이들이 죽음으로도 종결되지 않고 귀신이라는 형상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처녀귀신은 억울한 개인의 표상이기 이전에, 남성 중심적 질서가 끝내 수용하지 못한 여성성에 대한 집단적 불안과 통제 욕망의 형상화이다. 그녀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더 큰 공포는, 그녀를 그렇게 규정하고 낙인찍은 사회 구조다.
귀신은 단지 죽은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강시(殭屍)는 그 단적인 증거다. 중국 전통에서 강시는 죽었지만, 떠나지 못한 자다. 팔을 들고 깡충깡충 뛰며 나타나는 이 형상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죽음이 ‘완결되지 않았을 때’ 사회가 느끼는 불안의 이미지다.
도교에서는 사람의 영혼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사후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장례가 부실하거나, 무덤 자리가 나쁘거나, 사회적 정리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치면, 그 균형은 깨지고 죽음은 ‘완전히 지나가지 못한 사건’이 된다.강시는 바로 그 실패의 형상이다. 떠나야 할 자가 남아 있는 상태, 끝나야 할 감정이 잔류하는 상태, 즉 죽음의 감정적 잔류물이다.
이와 유사하게 일본의 ‘요괴(妖怪)’는 인간이 설명하지 못한 현상, 혹은 경계에서 파생된 공포의 혼종이다. 요괴는 유령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그는 괴이(怪異)하며, 낯설고, 불안정한 존재다.
요괴는 왜 생겨났는가?
그 배경에는 일본의 종교적 혼종성이 있다. 불교와 신도, 음양도(온묘도)가 혼재한 문화에서 죽음, 자연재해, 병, 이상 현상 등은 일관된 설명을 갖지 못했다. 그 빈자리를 요괴가 메웠다. 요괴는 불일치, 불완전성, 자연스럽게 설명하지 못하는 정서의 형상이다.
강시도, 요괴도, 귀신이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경계 위에 있다.
삶과 죽음 사이, 신과 인간 사이,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억눌린 슬픔 사이에 머무른다.
귀신은 떠나보내지 못한 감정이 머무르는 곳에 나타난다.
그리고 사회가 ‘이별’을 완전히 해내지 못할 때,
그 감정은 형상을 얻는다.
그것이 강시이며, 그것이 요괴다.
악마는 없었다. 다만 말을 아끼지 않는 여성이 있었을 뿐이다.
검은 옷을 입고, 밤에 날아다니며,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는 마녀. 하지만 그 형상은 언제나 사회가 두려워한 ‘여성’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마녀는 악하지 않았다. 단지 당시 사회에 순응하지 않은 여성이었다.
중세 유럽, 흑사병과 기근, 전쟁과 종교개혁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워질수록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자신 밖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때 희생양이 된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아이 없는 여성, 혼자 사는 여성, 약초를 다루는 여성, 말이 많은 여성, 교회 권위에 의문을 던진 여성, 자율성을 가진 모든 여성이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
마녀사냥은 단순한 미신의 폭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여성성에 대한 감정적 응징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할 때, 그 고통은 '자신의 말을 하는 여성'을 향해 화살을 돌렸다.특히 마녀는 ‘밤’에 활동하고,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졌으며, ‘남성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공동체 바깥에 있었고, 남성 중심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성의 표상이었다.
바로 그 점이 공포였다. 마녀는 죽은 자가 아니다.
마녀는 자유를 감행한 여성의 사회적 유령이다.
그녀는 언제나 통제되지 않는 자로 등장했고,
사회는 그 자유를 감정의 언어로 악마화함으로써 억눌렀다.
그래서 마녀는 불에 타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도 살아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모든 여성 안에.
그리고 사회는 아직도,
그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살아 있으나,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존재
좀비는 이상하다. 그는 죽었지만, 움직인다. 심장은 멎었는데, 발은 걷고 있다. 말도 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며, 단지 움직이고, 배고파하고, 무리를 짓는다. 그의 모든 움직임은 단 하나의 감정 '허상의 배고픔'으로 수렴된다.
좀비는 더 이상 영혼이 깃든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자아, 혹은 자아가 제거된 상태에서의 ‘행동만 남은 존재’다.
기독교 문화에서 죽음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이며,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품은 사건이다.
하지만 좀비는 부활했으되, 신은 없다. 되살아났으되, 구원은 없다. 좀비는 부활이 저주가 된 세계의 표상이다.
현대 좀비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배경은 쇼핑몰, 도시, 병원, 회사, 학교다. 그곳은 인간의 표정이 사라지고,
생존이 구조화된 공간이다. 매일 출근하고, 의미 없이 업무를 반복하고, 군중 속에서 고립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좀비는 타자가 아니다.
그는 바로 ‘나’다.
목적 없이 반복되는 일상,
자율성이 제거된 행동,
비인격화된 노동,
그 모든 것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멈춘다.
그래서 좀비는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내가 이미 좀비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이다.
좀비는 ‘죽은 자의 귀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감정적 사망선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