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본질 2편 2장
서울의 한 번화가. 저녁이 가까워지자 거리 곳곳에 길거리 음식 노점이 하나둘씩 불을 밝힌다. 그중 한 곳, 접시 위에서 산낙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지나가던 한국인들은 발길을 멈추고 웃으며 말한다.
“쫄깃하겠다. 진짜 신선하네, 소주 땡기는데”
바로 옆에 있던 외국인, 특히 북미권에서 온 관광객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도저히 못 보겠어." " 저건 음식이 아니야.", "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생물을 그냥 먹는다고?", " 충격적이야. 끔찍해. ”
같은 시각, 같은 장소, 같은 자극.
그러나 정반대의 감정이 유발된다.
한쪽은 입맛을 다시고, 다른 한쪽은 불쾌감과 심리적 혐오를 드러낸다.
이 차이는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어떤 이는 같은 장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다른 이는 혐오나 공포를 느끼는가?
왜 어떤 이에게는 기꺼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 다른 이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가?
무엇이 그 감정의 방향을 정하고, 무엇이 그것을 ‘정상’이라 승인하는가?
이 질문의 핵심은 간단하다. 감정은 자극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그 해석의 구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문화다.
문화는 인간의 감각과 감정을 조직하는 거대한 ‘해석 체계’다.어떤 대상에 대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어떤 반응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타당한지를 판단하는 정서적 코드를 제공한다.
산낙지를 보는 한국인의 뇌는 그것을 ‘신선하고 쫄깃한 해산물’로 해석하고, 북미인의 뇌는 그것을 ‘살아 있는 생명체를 날것으로 먹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이는 ‘신선함’과 ‘생명 윤리’, ‘미각의 전통’과 ‘문화적 금기’라는 전혀 다른 문화 코드에 기반한 감정이다.
감정은 인류의 보편적 속성일까?
우리 모두 공통의 감정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혹은 문화가 다르면 감정도 다르게 구성되는가?
이 의문에 대해 문화심리학자 리처드 슈웨더(Richard Shweder)는 “감정은 생물학이 아니라 문화가 제공한 틀 안에서 구성되는 사회적 신호다.” 라고 말한다. 이는 감정이 단순한 ‘감각의 반응’이 아니라, 사회가 정의한 방식으로 느껴지고 표현되어야 하는 일종의 사회적 언어라는 뜻이다.
메뚜기 튀김은 어떤 이에게는 ‘고소한 단백질 간식’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공포나 혐오를 유발하는 벌레’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는 메뚜기 튀김이 어린 시절 간식이자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벌레를 식용하는 행위 자체가 문명 이전의 야만적 행위로 간주되며, 구역질과 거부감을 유발한다.
그중에서도 ‘개(dog)’라는 존재는 특히 문화적 감정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의 아이는 개를 보고 “귀엽다”고 말하며 쓰다듬는다. 최근에는 개를 가족처럼 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여기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반면, 이슬람권의 일부 지역에서는 개가 종교적으로 의례에 부정한(나지스) 동물로 분류되기 때문에, 아이들이 개와의 접촉을 자연스럽게 피하고, 실내에서 기르는 문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혐오가 아니라, 종교적 정결 개념과 신체적·정신적 경계감각이 감정 구조를 규율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같은 개를 이누이트에게 물어본다면,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온다. 북극의 이누이트(Inuit) 공동체에서 개는 썰매를 끌고, 사냥을 도우며, 눈보라 속 생존을 함께 하는 파트너였다. 개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존을 공유한 가족이었으며, 죽으면 이름을 불러주고,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감정적으로도 깊이 교감하며, 개가 경계하거나 짖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영적 경고로 해석하기도 했다.
몽골의 유목민들에게도 개는 특별한 존재다. 그들은 개를 게르(Ger, 유목 생활을 위한 둥근 천막식 이동식 주거)를 지키는 수호자이자 가축 떼의 경비병으로 여겼고, 늑대와의 혼혈종은 강인함과 신령스러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개는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로서, 때로는 조상 영혼의 보호자, 또는 샤먼 의례의 안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같은 ‘개’라는 존재를 마주하고 있지만, 어떤 문화에서는 혐오하거나 기피해야 할 존재로, 또 어떤 문화에서는 가족이자 생존의 파트너로, 또 다른 문화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영적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개를 바라보는 감정은 생물학이 아니라 문화적 해석의 산물이며, 그 감정의 구조는 각 문화가 설계한 감정 코드에 따라 조율된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집단이 공유하는 감정의 틀, 즉 ‘문화적 감정표(cultural affect grid)’ 에 따른 반응이다.
죽음에 대한 감정코드 역시 선명하게 구별된다.
한국에서는 ‘검은 옷’, ‘울음’, ‘정중한 침묵’이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죽음은 무겁고 조용하게, 슬픔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감정이 수행된다.
반면 가나, 나이지리아 등 일부 아프리카 문화권에서는 죽음을 축제처럼 기념한다. 고인이 떠나는 길을 춤과 음악으로 환송하며, 살아 있는 자의 생명력을 강조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문으로의 전환이며, ‘잘 떠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감정의 의식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죽은 자의 몸을 ‘천장(天葬)’이라 하여 독수리에게 바친다. 이 의례는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감정적 태도를 전제로 한다. 피와 뼈의 해체를 애도가 아닌 해탈로 여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강가(Ganges) 강변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강물에 흘려보낸다. 눈물보다는 윤회의 고리를 끊는 해방의 순간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며, 슬픔보다는 영혼의 여정을 응원하는 감정이 우세하다.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 또한 대표적이다. 가족들은 해골 모양의 장식과 고인의 사진, 좋아하던 음식을 진열하며 죽은 자를 다시 초대한다. 무섭고 피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억하고 함께해야 할 ‘감정적 가족’으로서의 사자가 등장한다. 이 날은 슬픔이 아니라 웃음과 이야기, 공유의 감정이 강조된다.
결국, 감정은 자극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본능이 아니다.
같은 자극, ‘벌레, 음식, 동물, 죽음 등’에 대해 문화는 서로 다른 감정 규칙을 제공한다.
이렇듯, 감정은 ‘나의 감각’이 아니라, 사회가 반복적으로 가르쳐준 감정 문장을 몸으로 익힌 결과다. 감정은 문화적 감각지도의 위에 놓인 사회적 언어이며, 인간은 그 언어를 자신의 감정처럼 '느끼면서'살아간다.
인간은 감정을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내면의 반응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을 수행하는 반응이다. 감정은 본능이 아니라 코드화된 감정 반응 시스템의 산물이다.
감각은 단지 물리적 자극에 불과하지만, 그 감각에 감정이 덧입혀지기 위해선 반드시 해석의 틀, 곧 ‘코드화’가 필요하다.
문화는 이 코드화 시스템의 설계자다.
라벤더 향기는 서구 문화에서는 심신의 안정을 상징하며 명상이나 이완을 유도하는 편안한 자극으로 여겨지지만, 향 문화가 다른 한국의 중장년층에게는 어색하고 낯선 화장품 냄새처럼 느껴질 수 있다. 같은 자극이지만 그 해석의 맥락은 전혀 다르다.
붉은색이라는 단일한 시각 자극을 떠올려보자. 서양에서는 붉은색이 '위험', '정지', '피'를 의미한다. 응급차, 정지 신호, 전쟁 포스터 등은 모두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붉은색은 '행운', '축복', '돈'의 상징이다. 설날이나 결혼식에는 붉은 옷을 입고, 빨간 봉투에 돈을 넣어 건넨다. 같은 색인데 감정은 정반대다.
피 냄새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이 냄새가 ‘폭력’과 ‘공포’의 전조지만, 몽골이나 티베트에서는 피가 제사의 제물로 쓰이기에 신성함의 상징일 수 있다.
음향 자극 역시 그렇다. 아프리카에서 북소리는 마을 축제의 신호이고, 한국에서는 상여 행렬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퇴마 의식에서 북을 쳐 귀신을 쫓는다.
이처럼 감정은 단지 ‘무언가를 느낀다’는 개인의 반응이 아니라, 사회가 사전에 지정해 놓은 감정의 규범적 매뉴얼을 수행하는 것이다. 인간은 특정한 상황에 놓이기만 해도, ‘이럴 땐 이렇게 느껴야 한다’는 명령을 암묵적으로 따르게 된다.
장례식에서는 울어야 하고, 밤에 혼자 있으면 무서워야 하며, 결혼식장에서는 기뻐해야 한다는 감정 규칙들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주입되고 강화된다. 미국의 어린이는 분노를 표현할 자유를 배우지만, 일본의 어린이는 같은 감정을 억제하고 침묵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이 차이는 감정이 본능적 반응이 아니라, 문화가 승인한 행위(scripted performance)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감정 표현은 선택이 아니라 수행이며, 심지어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수행이 ‘적절한지’를 먼저 판단한 뒤 감정을 선택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서워해도 되는가?”, “이건 웃으면 안 되는 건가?”라는 자기 검열은, 감정을 느끼기 전에 먼저 사회적 허가를 구하는 과정이다.
이 문화의 코드는 동시대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도 변화하며 생성된다.
조선 시대의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밤늦게 나다니면 호환마마가 잡아간다.”
여기서 '호환마마'는 단순한 병이 아니다.
호랑이(호환)는 산속의 위협이고, 마마(천연두)는 신의 저주 같은 질병이다. 둘 다 아이를 순식간에 데려가는 초월적 공포였다. 이름만으로 공포의 감정을 자동 유발하는 문화적 감정 코드인 셈이다.
조선 시대에는 “도깨비가 잡아간다”고 말하며 아이들에게 밤 외출을 금했다면, 근대 초기에는 “넝마주이가 데려간다”는 말이 등장했다. ‘넝마주이’는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다 파는 떠돌이였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더럽고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그들은 단순한 빈민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추방된 자, 감정적으로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밖에서 울고 있으면 넝마주이가 데려간다”, “착하게 굴지 않으면 넝마주이 되는 거야”라는 말은 단순한 훈육이 아니라, 가난과 오염, 실패에 대한 공포를 내면화시키는 감정 교육이었다. 넝마주이는 귀신도 괴물도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감정 지도에서는 ‘접촉해서는 안 될 존재’로 문화적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서구의 유령, 일본의 도노 요괴처럼, 넝마주이 역시 사회가 만들어낸 감정 통제 장치였다. 사회가 요구하는 청결, 침묵, 복종이라는 가치들을 감정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넝마주이는 실재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상징적 공포로 기능했다. 그들은 가난한 현실의 타자이자, 순응하지 않으면 나도 저렇게 된다는 감정적 경고였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공포의 감정 코드는 더 이상 ‘도깨비’나 ‘넝마주이’ 같은 인물형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가 공유하는 뉴스 헤드라인과 이미지, 그리고 미디어가 반복해서 재생산한 사건의 서사 구조가 감정을 설계한다. 공포는 이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아니라, 익숙한 현실 속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파국의 시나리오로 구성된다.
“낯선 차량이 따라오면 바로 도망쳐.”
“전화로 개인정보 물으면 절대 대답하지 마.”
“공공장소에서 기침하면 사람들 시선이 무서워.”
“회사에서 짤리면 끝이다.”
“실종된 사람, 그날도 평범했대.”
이러한 문장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이 상황은 무서워야 한다’는 감정의 명령어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명령어는 반복을 통해 자동화된다.
또한 코로나19 이후에는 기침, 발열, 마스크 없음, 접촉자라는 단어들만으로도 감정적 반응이 유발된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지만, 그에 대한 ‘정해진 감정 반응’은 견고하다. '감염 = 고립, 통제, 위험인물'이라는 감정의 시나리오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 구조는 단순히 외부 위험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감정을 조율하는 정서적 규율 장치(emotional regulation device)다. 즉, 감정을 통해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실직에 대한 두려움 역시 마찬가지다. ‘백수’라는 단어 하나로 무능, 실패, 패배자라는 감정이 자동 연상되도록 학습된 사회에서, 실직은 단순한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수치로 감정화된다.
현대의 공포는 더 이상 환상 속 귀신이나 가난한 떠돌이가 아니다. 공포는 실시간 뉴스 알림, 모자이크 된 CCTV 화면, “그날도 평범했는데...”로 시작되는 기사, 보이스피싱 시나리오, 재난 메시지의 진동음 같은 익숙한 감각 자극을 통해 작동한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그 자극을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두려워 해야 한다’는 감정을 실행한다.
이처럼 현대의 감정 코드는 시각적이고, 디지털화되어 있으며,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서적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 공포는 더 이상 본능이 아니라, 사회가 사전에 입력한 ‘정해진 반응 프로그램’이다. 현대인은 그 안에서 자율적으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법’을 훈련받은 존재다.
이렇게 현대인은 상황을 마주하기도 전에, 그 상황에서 어떤 감정이 ‘사회적으로 적절한가’를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라 감정을 ‘선택적으로 수행’한다. 이런 감정은 더 이상 진실한 반응이라기보다, 기획된 감정이며 내면화된 연기에 가깝다. 현대인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이미 사회적으로 승인된 방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도록 길들여진 존재다.
다시 말해, 감정은 코드화된 감각의 해석이며,
개개인은 그 해석을 배우고 연기하는 사회적 배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