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본질 1편
한밤의 산길.
작은 무덤 둘.
그리고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오래된 이야기 하나.
나는 매일같이 그 무덤 옆을 지나며 공포를 느꼈다. 심장은 조이고, 숨은 멎고, 어둠은 말을 걸었다.
그때, 나는 외쳤다.
“누렁아! 흰둥아!”
개들이 달려왔고, 모든 공포는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공포는 실재가 아니라, 내가 만든 이야기였다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감정이란 어떤 외부 자극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이라고 믿는다. 어두운 밤길에서 낯선 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지며, 몸이 얼어붙는 반응. 이것을 우리는 ‘공포’라고 부른다.
그러나 심리학자 리처드 라자루스(Richard Lazarus)는 이 단순한 연쇄를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자극 -> 반응이라는 기계적 흐름의 결과가 아니다. 감정은 자극에 대한 해석의 결과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자극의 물리적 성질보다, 그 자극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달려 있다.”
즉, 인간은 ‘느끼기 전에 해석한다.’
공포는 단지 어떤 장면을 본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해석을 통해 생긴다.
길가의 풀숲이 흔들리고, 어두운 숲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이 장면을 누군가는 '자연의 소리'로 해석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안에 ‘귀신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한다. 같은 자극이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 따라온다.
이 차이는 바로 ‘이야기’의 유무에서 발생한다.
라자루스의 이론에 따르면, 감정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생성된다
1. 감각 자극 – 어두운 길, 풀벌레 소리, 무덤
2. 기억의 호출 – “처녀귀신이 나온다”는 과거의 이야기
3. 맥락적 해석 – 이 어둠은 안전하지 않다
4. 감정의 발생 – 공포
5. 행동 반응 – 심박 증가, 회피, 개의 이름 부르기
이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번과 3번 항목이다. 기억이 호출되고, 그 기억에 따라 해석이 이루어진다. 즉, 공포는 무덤 때문이 아니라, 무덤을 ‘귀신의 장소’로 해석한 내 머릿속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떤 감정이 발생하는 순간, 인간은 종종 그 감정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감정은 단지 자극 때문이 아니라, 자극이 가진 ‘의미’ 때문이다. 그 의미는 대부분 우리가 배우고 내면화한 것들에서 온다.
예컨대, 한국 사회에서 '무덤', '처녀귀신', '한스러운 죽음'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특정한 감정, 두려움, 수치, 금기 등을 유도하는 문화적 기호다. 나는 무덤을 본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온다’는 문화적 내러티브를 본 것이고, 그 내러티브가 나의 감정 회로를 활성화시켰다.
라자루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인간의 가치 평가와 분리될 수 없다. 감정은 인간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부여하는 의미의 총합이다.”
이 말은 곧, 공포는 외부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의 해석이, 나의 기억이, 나의 문화가 만들어낸 감정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감정은 이성보다 빠르고 강하다’고 말한다. 맞다. 그러나 감정은 이유 없는 괴물이 아니다. 그 감정조차도 나의 해석, 나의 믿음, 나의 내면화된 이야기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감정은 ‘의식적 사유’로는 완전히 다룰 수 없지만, 그 감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감정은 해체되기 시작한다.
공포를 느끼는 나, 그 감정을 만드는 해석의 구조, 그 해석이 어디서 왔는지 질문하는 것, 그것이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밤, 개들과 함께 걸으며 이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공포는 무덤에 있지 않았다. 공포는 나의 기억 속, 이야기 속, 의미의 구조 속에 있었다. 나는 무덤을 지나가던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해석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둠 속에서 느낀 공포는 정말로 존재했을까?
어떤 위협도 실재하지 않았고,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 무덤은 그저 흙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심장은 뛰었고,
호흡은 가빠졌으며,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반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Joseph LeDoux)는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과정을 두 가지 경로로 설명한다.
빠른 회로
감각 --> 시상 --> 편도체 --> 뇌가 해석하기도 전에 즉각적인 생존 반응 발생
느린 회로
감각 --> 시상 --> 대뇌피질 --> 편도체 -->인지적 해석 후 공포 반응 발생
이 두 회로는 진화적으로 모두 필요했다. 빠른 회로는 생존을 위한 즉각적 반응을 가능케 하고, 느린 회로는 정보의 정확한 해석을 도와준다. 하지만 이 이중 회로 시스템은 과잉 반응을 낳는다. 인간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위험하다’는 실재의 반응을 한다. 편도체는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는다. 그저 빠르게, 그리고 신속하게 반응할 뿐이다.
내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있다’고 느낄 때, 편도체는 그것이 귀신이든 바람이든 상관없이 생존 모드로 들어간다. 그 순간, 심장은 뛰고, 근육은 긴장하고, 숨은 가빠지고, 이성은 멈춘다.
공포란 결국, 뇌가 만들어낸 생존의 환각이다.
공포 영화 실험은 이 구조를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한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공포 영화를 보여주며 fMRI로 뇌 반응을 측정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뇌는 화면 속 가상의 위협에 대해 실제 위협처럼 반응했다.
편도체는 격하게 활성화됐고, 자율신경계 역시 반응했다.
공포는 실재가 아니라, 실재처럼 인식된 해석이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상상에 휘둘리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나는 산길에서 귀신을 본 것이 아니라, 귀신을 상상했고, 내 뇌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순간 나의 해
석은 나의 생리 반응을 결정했고, 결과적으로 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 이유는 진화적 맥락에서 설명된다. 공포 반응은 생존을 위한 시스템이다. 원시시대, ‘무언가가 숲 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것이 실제 위험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는 일단 도망치고 보는 편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르두는 말한다.
“공포 시스템은 빠르되, 정확하진 않다. 그것이 오히려 생존에 유리하다.”
이 시스템은 현대에도 작동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호랑이도 없고, 창 들고 도망칠 일도 없다. 하지만 뇌는 여전히 ‘위험할 수도 있음’을 ‘확실한 위험’으로 간주해 공포 회로를 작동시킨다.
이렇게 인간은 매일, 존재하지 않는 위협 앞에서 실재처럼 떤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허상일지라도.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감정을 “뇌가 몸의 상태를 읽고 그것을 지도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감정은 뇌가 몸의 변화를 읽으며 생성되는 하나의 내적 시뮬레이션이다.
공포 역시 그렇다. 어둠 속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 떨림을 뇌가 감지하고, “지금은 위험하다”라고 판단한다. 이 판단은 외부 현실과 상관없이 내부 신체의 반응에 근거해 결정된다.
이때, 감정은 물리적 실재보다 해석된 신호에 더 민감하게 작동한다. 나는 귀신을 보지 않았다. 나는 단지 몸이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고, 그 반응을 공포라는 언어로 해석한 것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실재의 위협이 아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 위험이 머릿속에서 실체화되는 순간이다. 그 위험은 어디에도 없고, 나만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누구도 나를 설득해 “그건 없어”라고 말해줄 수 없다.
이런 공포는 내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며 점점 더 현실을 가린다. 결국 공포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실재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신체, 나의 반응, 나의 의식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나는 무덤 옆에서 존재하지 않는 귀신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귀신을 본 것이 아니라, 나의 뇌가 상상을 실체로 바꾸는 방식을 본 것이다.
공포는 뇌의 생존 회로가 만들어낸 오해다. 그러나 그 오해는, 매우 논리적이며, 철저하게 진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실재를 의심하기보다, 반응을 의심해야 한다.
공포는 단지 느끼는 것이 아니다.
공포는 행동을 낳고, 그 행동은 다시 공포를 강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점점 더 그 감정에 길들여진다.
B.F.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행동이 고통을 줄인다면, 그 행동은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학습된다.”
이것이 회피 행동의 강화(Avoidance Reinforcement)이다. 특정 자극(무덤 옆을 지나야 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이나 공포를 줄이기 위해 특정 행동(달리기)을 한다. 그 결과, 심리적 긴장이 줄어들고, 뇌는 “이 행동은 효과적이었다”라고 기록한다.
다음 날, 뇌는 같은 상황에서 다시 같은 행동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더 빠르게, 더 자동적으로, 더 필
사적으로 반복된다. 이것이 바로 행동으로 각인된 감정의 구조다.
나는 처음에는 그냥 불안했다. 하지만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무덤은 나의 ‘위협’으로 고정되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신경계는 경계 상태에 들어갔고, 심장은 이미 도망칠 준비를 했다.
나는 무덤이 나를 무섭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가 무덤에 부여한 의미가 나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회피는 문제 해결이 아니다. 회피는 문제를 ‘피해야 할 것’으로 학습시키고, 그 학습은 점점 더 공포를 증폭시킨다.
‘부정 강화(Negative Reinforcement)’는 특정 행동을 통해 불쾌한 감정을 줄일 수 있을 때, 그 행동이 강화된다는 이론이다. 중요한 건, 자극 자체가 사라지지 않았어도, 불쾌감이 줄었다는 느낌만으로도 학습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상황: 무덤 앞을 지남
행동: 달린다
결과: 공포가 줄어든다
뇌의 평가: 이 행동은 옳다
강화: 이후에도 무조건 달린다
이렇게 뇌는 달리기를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 회로로 각인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우리들은 더 이상 ‘선택’ 하지 않는다. 단지 반사한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달리지 않았다. 그날 나는 무언가에 떠밀려, 무덤 앞에서 서서히 입을 열었다.
“누렁아! 흰둥아! 장군아!”
그 외침은 절박했고, 거의 울음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의 ‘대면’, 즉 '마주서기'였다.
나는 두려움을 피해 도망치지 않았고, 현실의 존재(개들)를 호출했다. 그 순간, 공포는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개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나를 핥았고, 나의 몸에 기대었고, 무덤을 지나쳤고, 풀숲을 뛰놀았다. 그들은 귀신을 보지 않았고, 무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안에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과 함께, 처음으로 이야기가 아닌 실재 안에 들어갔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이것은 철학적 전환이었다. 감정을 해석하던 내가, 감정을 다시 구성한 순간이었다.
‘개를 부른 행위’는 새로운 반응의 학습이었다. 내가 공포에 대해 새롭게 반응하고, 그 반응이 긍정적 결과(공포 해소)를 가져왔을 때, 뇌는 그것을 새로운 회로로 저장한다.
즉, 나는 무덤 앞에서 이야기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행동을 학습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학습은, 내 감정을 바꾸었다.
회피는 공포를 키운다.
대면은 공포를 해체한다.
그리고 행동은,
감정을 다시 쓸 수 있다.
공포는 순수한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다.
공포는 가르친, 그리고 학습한 감정이다.
인간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자란다.
그리고 그 배움은 대개 이야기의 형태로 주어진다.
내가 무덤을 무서워한 것은 그곳에 무언가를 봤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엔 ‘처녀귀신’이 있다고.
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문화가 나에게 삽입한 이야기였다. 이야기에는 얼굴이 없지만, 그 이야기는 내 감각을 통제하고, 공포를 설계했다.
심리학자들은 감정이 기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기억은 개인의 경험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수많은 감정을 들으며, 보며, 반복해서 학습한다.
유년기의 귀신 이야기
공포영화의 클리셰
부모의 경고 (“무덤 근처 가지 마”)
밤길에 대해 반복되는 말 (“귀신 나온다”)
민속 설화에서의 복수하는 영혼
이 모든 것은 기억 이전의 기억, 즉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이다. 인간은 이러한 기억을 집단으로부터 수용하며, 그 기억 안에서 특정 감정을 ‘정상적인 것’으로 내면화한다.
‘처녀귀신’은 단지 유령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여성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의 구조다.
전통적 서사에서 ‘처녀귀신’은 다음의 서사를 따른다.
젊은 여자
결혼하지 못함 (혹은 아이를 가짐)
억울한 죽음
무덤
원혼이 되어 사람을 해친다
이 구조는 단순한 공포를 넘어 윤리적 규범을 내포한다. 즉,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죽는 것은 ‘완성하지 못한 삶’,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불완전한 존재’로 간주된다. 결국 ‘귀신이 된다’는 이야기는 여성의 삶에 대한 사회적 불안, 도덕적 처벌, 억압된 욕망을 ‘공포’라는 감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유령은 단지 죽은 자가 아니라, ‘억압된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이다. 프로이트는 '유령은 무의식의 억압이 외부화된 상징'이라 했고, 라캉은 '유령은 실재(the Real)의 균열을 상징하며, ‘기표(언어)’로는 해명되지 않는 고통의 잔여'라고 말했다.
‘처녀귀신’은 사회가 인정하지 않은 삶의 방식, 말할 수 없었던 고통, 금기시된 욕망이 귀환하여 무명의 공포로 나타난 것이다.
즉, 공포는 사회의 도덕적 억압이 만들어낸 감정의 유령이다.
이야기는 반복될수록 힘을 얻는다. 같은 귀신 이야기, 같은 장면, 같은 경고. 우리들은 그것을 진실이 아니라, 자연처럼 받아들인다.
그리고 감정은 그 반복 안에서 습관화된 반응으로 자리 잡는다.
“밤에는 무덤 근처 가지 마라.”
“귀신은 한을 품고 나타난다.”
“처녀귀신은 억울하게 죽은 여자다.”
이 말들이 반복되는 순간, 공포는 감정이 아니라 규범이 된다. 우리들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 두려움은 ‘정상적’으로 간주된다.
공포는 이제 내 것이 아니다. 공포는 사회가 내 안에 주입한 이야기다.
미셸 푸코는 감정이 단지 개인적 정동이 아니라, 권력이 신체를 통제하기 위한 기제라고 보았다. 공포는 그중 가장 강력한 감정 중 하나다.
공포는 몸을 멈추게 하고
공포는 판단을 흐리게 하며
공포는 회피와 복종을 유도한다
그러므로 어떤 감정을 퍼뜨릴 것인가는 정치적 결정이며, 사회적 통치다.
‘처녀귀신을 무서워하라’는 문화적 명령은 여성의 자유, 죽음의 의미, 삶의 다양성을 도덕적 금기로 가두기 위한 감정의 기술이다.
나는 무덤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배운 서사를 믿었다.
그리고 그 서사는 내 감각과 신체를 통제했다.
이것이 내가 ‘처녀귀신’을 무서워했던 진짜 이유였다. 나는 귀신을 본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윤리적 감정 구조 안에 있었던 것이다.
개가 나타났을 때, 그 모든 구조가 무너졌다. 개는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무덤 옆을 걷고, 풀을 밟았고, 나와 함께 걸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공포는 실재가 아니라, 문화가 만든 감정의 언어였다는 것을.
개들은 무덤 옆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곳을 지나갔고, 그곳을 냄새 맡았고, 그곳에서 풀을 뜯었다.
그들은 무덤을 귀신이 사는 공간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곳은 그냥 냄새가 나는 땅이었고, 어둠은 햇빛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 이름과 의미를 덧씌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자는 몸을 따라 움직이고, 몸은 마음을 따라 움직인다.”
이 구절은 단순히 몸과 마음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실은 ‘마음의 그림자’ 일 수 있다는 통찰이다.
나는 무덤을 보았다. 그러나 실은, 나는 ‘무덤’이라는 단어로 호출된 기억, 감정, 두려움, 문화적 맥락의 총체적 해석 구조를 본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이 투사한 그림자였다.
내가 본 것은 귀신이 아니라, 귀신을 본다고 믿는 인간의 눈이었다.
하이데거는 '공포(Furcht)'와 '불안(Angst)'을 구분했다.
공포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 '무덤, 어둠, 소리 '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불안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계 전체가 낯설게 다가올 때 생기는 내면의 떨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은 세계가 낯설게 다가올 때, 세계 그 자체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무덤을 지나며, 개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곁을 지켰고, 냄새를 맡았고, 풀밭을 뛰어다녔다. 그 모든 모습은 분명 익숙하고, 현실적이며, 평온했다.
하지만 바로 그 익숙함 속에서, 나는 이상한 진동을 느꼈다. 개들이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음에도, 내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해석하지도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문제는 ‘위험’이 아니라, 내가 쥐고 있던 해석이라는 도구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익숙한 존재들조차 이 세계를 설명해주지 못할 때,
나는 비로소 해석이 무너지는 세계의 틈,
그 너머의 실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언어도, 이야기조차도 없었다.
단지 해석할 수 없는 침묵,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실재의 낯섦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흔들렸고,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실재가 존재한다는 감각 자체를 경험했다.
인간은 세상을 단어로 붙잡는다. ‘무덤’, ‘귀신’, ‘밤길’, ‘공포’, 이 모든 단어는 인간이 세상을 정리하고 해석하기 위한 ‘기표(signifier)’다. 그러나 언어는 항상 실재를 초과하거나, 실재에 미치지 못한다. ‘무덤’이라는 말은 실제 무덤을 모두 담을 수 없고, ‘공포’라는 단어는 내가 그 밤 느꼈던 그 현존적 떨림을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된 이야기 위에 인간은 언제나 왜곡된 실재를 살고 있다.
개는 그런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개는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어둠과 무덤, 풀과 냄새를 그 자체로 경험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걸으며, 처음으로 해석을 거두고 존재를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다.
이야기는 실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다. 하지만 때로, 이야기가 실재를 가리고, 공포는 그 이야기의 그림자만을 추적한다.
나는 처녀귀신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확신했다.
“거기 있다.”
그러나 거기 없었다.
거기에는 단지 어둠, 흙, 풀, 바람, 벌레 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 해석은 그 모든 것을 ‘귀신’이라는 기표 아래에 재구성한 것이었다.
실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내가 그 위에 해석이라는 천을 덮었을 뿐이다.
개들과 함께 걸었던 그 밤, 나는 나무를 나무로, 풀을 풀로, 어둠을 어둠으로 보았다.
그들은 나를 핥았고, 나는 그들의 체온을 느꼈다. 그 감각은 언어보다 먼저 왔고, 해석보다 더 선명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이야기를 쓰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공포는 실재가 아니라, 내가 덧씌운 해석의 그림자였음을.
나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공포는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어둠, 무덤, 풀벌레 소리, 바람...
그 모든 감각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였다.
나는 그 감각들을 엮어
‘처녀귀신의 귀환’이라는 서사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나는 떨었고, 도망쳤고, 숨죽였다.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는 말했다.
“인간은 서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감정을 조직한다.”
공포는 느낌이 아니다. 공포는 서사화된 감정이다. 그 감정은 시작이 있고, 위기가 있고, 결말이 있으며, 무엇보다 의미의 흐름이 있다.
나는 무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반복했고, 내 뇌는 그것을 기억했고, 그 기억은 새로운 자극 앞에서 같은 반응을 재생산했다. 즉, 감정은 기억의 구조이며, 기억은 이야기로 구성된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고정된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구성하고 갱신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적 주체라는 것이다.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구성하고, 강화하고, 반복했던 감정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인 이상, 그것은 다시 쓸 수 있다.
나는 한때 도망쳤다. 그것은 감정의 강화였고,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개를 부른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행동을 바꿨고, 그 행동은 이야기의 균열을 만들었다.
개들이 달려왔을 때, 나는 나의 이야기에서 벗어났고, 존재 그 자체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공포를 이긴 것이 아니라, 공포를 구성하던 이야기의 구조를 자각했다.
이 자각은 곧 자유의 문턱이었다.
감정은 무의식적 반응이 아니라, 의식적 해석과 재구성의 대상이라는 사실.
나는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감정의 저자였다.
심리치료에서 ‘재서사화(Re-narration)’란 자신의 감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과거를 재구성하며, 감정 반응을 바꾸는 작업이다.나는 철학자가 아니었고, 심리학자도 아니었지만, 그 밤 나는 나도 모르게 재서사화를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무덤을 다시 보았고, 그것을 ‘귀신의 무덤’이 아니라, ‘흙이 쌓인 언덕’으로 보았다.
나는 어둠을 다시 보았고, 그것을 ‘위험의 장막’이 아니라, ‘빛이 없는 시간’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감정의 재구성이며, 이야기의 재출발이었다.
공포는 더 이상 나를 사로잡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감정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처녀귀신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귀신이라는 이야기를 믿은 나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감정을 다시 해석했고, 나는 존재를 다시 만났다.
나는 이제, 그 이야기의 저자다.
다음은 공포의 본질 2편. '문화가 만든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