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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과 소년 그리고 개

프롤로그

by Mind Thinker


처녀귀신과 소년 그리고 개



중학교 2학년. 과학 경시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교실에 남아 밤늦게까지 실험 자료를 정리하고, 문제를 풀고, 선생님과 토론을 했다. 말 그대로, 나는 학교에 살다시피 했다.


귀가는 늘 늦은 밤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버스를 타곤 했다. 당시 우리 집은 산 등성이에 있는 과수원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산중턱에 위치한 집까지는 가로등 하나 없는 숲 속 오솔길을 걸어야 했다. 그 길엔 가로등이 없었다.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간혹 저 멀리서 반짝이는 희미한 불빛이 있었지만, 그건 위로가 아니라, 어둠을 더 짙게 느끼게 할 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버스가 휙 하고 떠나고 나면 한기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숨이 얕아지고, 목덜미의 털이 스스로 곤두섰다. 그 길은 풀밭이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길에도 풀이 길게 자라고 있었다. 풀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서걱거리는 소리. 풀벌레들이 합창하는 밤의 소리. 그 모든 것들이,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그 길 옆에 있었던 두 개의 무덤이었다. 하나는 갓난아이의 무덤, 또 하나는…

사람들은 말했다.


“그건 한 맺힌 처녀귀신 무덤이야.”


그녀는 마을 부잣집 도령과 사랑에 빠졌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도령은 그녀를 그저 잠깐의 노리개로 생각했던 것이다. 친정도, 마을 사람들도 그녀를 외면했다. 수치라고 했다. 더는 얼굴을 들고 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산기슭 외딴 초가에서 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품은 채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장례는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표식 없는 무덤 하나가, 그 길가 풀숲에 외롭게 놓였다. 그래서 밤마다, 그녀는 외로운 영혼이 되어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는 그 무덤 옆을 지나갈 때면 등 뒤에 손이 닿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가 숨죽이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 나는 숨을 멈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정말로 그 손이 나를 끌어당길 것 같았다. 그 밤길을 걸을 때, 나무는 귀신의 형상이었고, 풀잎은 소리 없이 속삭였고,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랑 같이 가자.”


공포는 이제 목을 조여왔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숨을 삼켰다. 심장은 벌써 달음박질을 시작했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어디선가 손이 나를 낚아채 끌어당길 것 같았다. 내가 그 무덤에 묻힐 것만 같았다.



공포가 극에 달한 그 순간, 나는 소리쳤다. 처절하게. 간절하게. 애절하게.

“누렁아!”
“흰둥아!”
“장군아!”
“꼬마야아아아....!”

절박하고 간절했다. 외침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한참을 그렇게 외치고 있을 때, 먼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개들이 내 목소리에 응답하듯 멀리서 ‘컹컹’ 짖는 소리. 그 희미한 소리는 어둠을 가르며 다가왔고, 그 순간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소리들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아직 멀리 있었지만, 그 작은 응답만으로도 내 의식은 공포의 늪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풀벌레들의 속삭임은 더 이상 나를 옭아매지 못했고, 바람 소리는 더 이상 귀신의 속삭임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개들의 짖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이어 개들의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빛은 없었지만, 그들은 어둠을 뚫고 나에게로 달려왔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들이 내게 뛰어들어 몸을 비비고, 혀로 얼굴을 핥았을 때, 그렇게 개들이 내게 달려와 안기는 그 순간, 그때까지 남아있던 모든 공포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둠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이제 그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의 장막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달빛을 품은 고요한 여름밤의 일부가 되었다.



공포는 실재가 아니었다. 공포는 해석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란 나라는 주체가 세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감정의 이야기였다. 감각은 자극을 받아들이지만, 그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기억이고, 맥락이고, 이야기다.


공포는 단순히 위협적인 대상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나를 위협하는가’에 대한 해석이며, 그 해석은 우리의 기억, 교육, 문화, 그리고 상상력 속에서 길러진다.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들,'외롭게 울던 밤, 들었던 이야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만든 상상'이 뒤엉켜 우리 뇌는 하나의 ‘의미 있는 서사’를 구성한다. 그것이 곧, 공포의 실체다.


인간의 뇌는, 특히 편도체(Amygdala)는 감정적 위협을 감지하는 신경의 감시탑과 같다. 실제의 위협이든, 상상 속의 그림자든, 편도체는 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건 무섭다.'라고 느끼는 순간, 신경계는 자동적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고, 몸은 위험에 대비하는 전투-도피 반응(fight-or-flight)을 일으킨다.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 내가 만들어낸 해석, 그리고 그 해석이 엮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날 밤, 개들은 이야기의 세계에 균열을 냈다. 내가 상상으로 쌓아 올린 공포의 구조물 위로 그들의 짖음은 현실의 소리로 스며들었고, 그 순간 나는 다시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무는 귀신이 아니었고, 무덤은 이야기가 아니라 흙이었다. 풀벌레의 소리는 ‘신호’가 아니라 단지 여름밤의 풍경이었다. 어둠은 어떤 의도를 품은 존재가 아니라, 그저 태양이 떠나 있는 물리적 상태에 불과했다.


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단지 내가 그 위에 이야기를 덧씌웠을 뿐이다.




이 경험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철학 수업이었다. 열네 살, 산길 어둠 속에서, 개와 함께 걸으며, 나는 깨달았다.

공포란 실체가 아니다. 공포는 지각된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 해석의 결과’다. 그리고 그 해석은, 거의 항상, 이야기의 형태를 취한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서사를 만든다. 그 서사는 기억을 엮고, 감정을 해석하고, 의미를 구조화한다. 그렇게 탄생한 내러티브는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고, 현실을 왜곡하며, 때로는 없는 공포를 있게 만든다.


이야기를 믿는 순간, 실재는 퇴장하고, 허구가 현실을 대신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를 걷어내는 순간, 그 모든 해석과 의미 부여의 과정을 잠시 멈추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현실을 만난다.


지각된 세계가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
공포의 그림자 대신 어둠 그 자체.


이것은 단지 '두려움을 이겨냈던 어떤 밤'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내 감정의 구조를 목격한 첫 번째 순간,
내가 나라는 존재가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깨달은 철학적 깨우침이었다.


그 밤, 나는 공포라는 감정이 아니라, ‘공포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려움을 넘어 ‘의식’과 '무의식', 아니 그보다 더 깊고 넓은 마음의 우주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다음은 공포의 본질 1편 '공포는 이야기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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