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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사회의 거울(2)
-디지탈 귀신

공포의 본질 2편 3장

by Mind Thinker


6. 자살자의 유령 –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죽음.


자살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설명하지 못하는 불투명한 죽음이며, 남겨진 자들이 감정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부채의 감정이다.


살인을 당한 자는 ‘피해자’로 불린다. 병으로 죽은 자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진다.그러나 자살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듯하면서, 모두의 책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이라는 은유로 그 죽음을 밀어낸다.

“밤마다 그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그 집은 들어가면 기운이 이상해.”...

이러한 말들은 귀신 이야기라기보다, 도덕적 혼란과 감정적 불편함이 만든 은유(metaphor)다. 죽음을 해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그 죽음을 감정의 언어로 귀환시킨다.


자살자는 귀신이 된다. 그는 질서 밖의 존재, 공동체가 수습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로 재구성된다. 사회는 그 죽음을 정당하게 해명하지 못한 채, 귀신으로 전이시켜 감정의 공간 밖으로 배제한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다.

무서운 것은, 그 죽음을 남겨진 사람들이 끝내 붙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회 안의 침묵, 회피, 무기력,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그들은 말하길 원했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온다. 말이 아닌 귀신의 형태로.

그리고 인간사회는 그 귀환을, 공포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우려 한다.



7. 귀신은 질서 균열의 징후


귀신은 언제 나타나는가?


지방의 한 요양병원에서 두 달 사이 원인 불명의 사망자가 여섯 명 발생했다. 의료진은 '기저 질환 악화'라는 공식 발표를 내놓았지만, 유족들 사이에선 “죽기 전 환자들이 뭔가를 본 것 같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카메라에는 새벽마다 빈 병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모습이 찍혔고, 누군가는 “그 병실엔 간호사도 혼자 못 들어간다”고 말한다.
--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죽음은 감정적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귀신의 이야기로 바뀐다.


한 고등학교에서 성적 압박을 견디지 못한 학생이 자살했다.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고, 학교는 '일상 복귀'를 종용했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엔 “그 아이가 쓰던 사물함 근처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그 반 교실에서 밤마다 책상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애도하지 못한 죽음은, 불안과 죄책감을 귀신이라는 감정 구조로 표출하게 된다.


전쟁 당시, 전방에 투입된 병사 수백 명이 실종된 채 귀가하지 못했다. 마을 어귀에는 그 가족들이 세운 작은 비석들이 늘어섰고, 아직도 명절마다 빈 밥그릇을 차리는 집들이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 동네에선 밤마다 철모 소리가 난다.”
-- ‘죽음의 마무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종은, 죽은 자를 보내지 못한 사회의 불안이 귀신으로 변형되어 떠돌게 만든다.


서울의 한 아파트. 3년 동안 같은 동에서 네 명이 자살했다. 처음엔 우연이라 여겼지만, 그 이후 새로 이사 온 사람들도 수개월 만에 떠났다. “새벽에 현관 센서등이 혼자 켜진다”, “엘리베이터에서 찬 기운이 돈다”는 글들이 커뮤니티에 올라오며 이 공간은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낙인찍혔다.
-- 사회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불안을 낳고, 귀신은 그 불안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한 다세대주택에서 일가족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빚과 돌봄 부담, 부부갈등이 원인이었으나 언론은 이를 ‘고립된 죽음’으로 축소했다. 그러나 이후 같은 집에서 자꾸 물이 새고, 가스가 새고, 입주자가 수차례 교체되면서 “그 집은 뭔가 있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응은 단지 미신적 상상력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감정적으로 충격을 해소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의 구조화된 표현이다. 귀신은 예언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미 발생한 충격 이후, 사회적 질서와 감정 체계의 균열을 ‘감각화’한 상징적 산물이다.


귀신이 출현한다는 믿음은 단순한 초자연적 신념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죽음, 이해하지 못한 고통, 해소되지 않은 불안이 감정적으로 응결되어 나타나는 ‘사회적 신호’다.


사회는 감정을 질서화함으로써 유지된다. 슬픔은 애도로, 분노는 정의로, 불안은 규칙과 안전으로 전환될 때, 감정은 통제 가능한 질서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 감정 질서에 균열이 생길 때, 사람들은 감정을 구조화할 언어와 형식을 잃는다. 그때 ‘귀신’이라는 이미지가 작동한다. 이는 무형의 감정이 공간과 형상을 획득하며 사회적 균열을 감지하고 경고하는 정서적 징후로 기능하는 것이다.


즉, 귀신은 실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본다고 느낀다.
그 이유는 그가 실제 존재가 아니라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감정의 시각적·감각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귀신이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가 공포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의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귀신은 공포의 존재가 아니라, 두려움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8. 귀신 퇴치는 감정의 의례


귀신은 무서운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을 쫓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쫓음’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굿을 한다. 서양에서는 엑소시즘(Exorcism)을 하고, 불교 문화권에서는 천도재를 열며,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는 북을 치고 트랜스 상태에 들어간다.


이 모든 행위는 단지 귀신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의례는, 감정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귀신은 설명할 수 없는 죽음과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억울함과 죄책감, 집단의 불안이 형상화된 감정의 덩어리다. 그리고 이 감정은 말로는 다 풀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으로 푼다.


한국의 굿을 보자. 굿은 죽은 자의 혼을 보내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산 자의 감정을 정리하는 장치다. 굿판에서는 웃고, 울고, 춤추고, 노래한다. 억울한 죽음을 대신 말해주고, 남겨진 자들의 죄책감을 정화해준다.


서양의 엑소시즘도 마찬가지다. 신부는 귀신을 쫓는 동시에, 죄와 악의 개념을 재정립하며 공동체의 감정 질서를 되돌린다.


불교의 천도재는 영혼을 천도(遷度)시키는 것이지만, 사실은 남은 자들이 죽음을 수용하고,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이 의례들은 종교도, 민속도, 주술도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무너진 사회가 감정을 다시 세우는 의식이다.


귀신을 퇴치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귀신을 받아들이고,

그 감정의 의미를 해석한 후,
공동체가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결국 인간사회는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파편을 정리하고,
그 잔해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퇴치는 반드시 반복된다.
감정은 계속해서 무너지기 때문이다.



9. 디지털 귀신


귀신은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형상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거처도 이동한다.

과거, 귀신은 ‘장소’에 살았다. 밤길, 폐가, 우물, 공동묘지 등, 사람들은 특정한 공간에 공포를 입혔고 그 공간은 귀신의 무대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신은 기억 속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장소보다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날 그 방에서...”, “그 골목에서 무슨 일이 ...” 같은 말들이 귀신의 새로운 근거지를 암시했다. 귀신은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았다. 그는 기억의 잔상, 내면에 각인된 공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귀신은 데이터로 변이한다.

귀신은 더 이상 특정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영상 속에 등장하고, 사진에 숨어 있으며, 밈으로 퍼지고, 알고리즘에 의해 다시 호출된다. 슬렌더맨, 백룸, 괴담 채널, AI 유령 등 이 시대의 귀신은 실재하지 않아도 실재보다 강력하게 작동한다. 인간이 ‘볼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실제가 된다.


귀신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억눌린 감정의 귀환이라는 기능만은 그대로 유지한 채, 시대마다 그 감정 구조에 맞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선택할 뿐이다.


장소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데이터로. 귀신은 진화한다.

그러나 그가 떠올리는 감정은 언제나 같다.

불안, 죄책감, 억압,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

귀신은 형태가 아니라, 감정의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는 존재다.


예전에는 귀신이 ‘이야기’ 속에서 살았다. 그는 사연이 있었고, 이유가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여인, 무덤을 돌본 자, 저주받은 물건처럼, 귀신은 항상 이야기와 함께 등장했고, 그 이야기의 감정이 우리를 무섭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귀신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귀신은 ‘구조’ 그 자체로 감정을 주입한다.

슬렌더맨(Slenderman)은 배경처럼 서 있고,

백룸은 낯선 공간이 반복되며,

AI 유령은 이상한 알고리즘으로 재생된다.


그들은 설명이 없다. 그래서 더 무섭다.

단지 이미지, 소리, 패턴만으로 공포를 ‘느끼도록 설계’된다.

공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통해 해석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터페이스(interace) 속에 녹아 있다.


화면의 떨림, 잡음 같은 음향, 정지된 이미지의 반복, 이상한 리듬의 자막, 기묘하게 느린 페이드 인.

디지털 귀신은 서사를 거치지 않고, 감정에 직접 침투한다. 그것은 마치 ‘기계가 설계한 공포’처럼 느껴진다. 현대인은 그것이 왜 무서운지 모른 채, 무서움을 느낀다.


이제 귀신은 이야기를 벗어났다. 그것은 감정의 알고리즘이다. 공포는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와, ‘인터페이스의 코드’가 되어 우리 안에 침투한다.

현대인은 점점 서사 없는 공포,

맥락 없는 감정,

설명 없는 이미지에 익숙해지고 있다.


귀신은 더 이상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기계의 구조 속에서 재현되는 감정의 잔향이다.



10. 억눌린 감정의 탈출구


왜 인간은 귀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까.

왜 어린 시절 들었던 그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무서워할까?

귀신은 오락이 아니다. 귀신은 감정의 은신처다. 사회가 허용하지 않은 감정들이 ‘귀신’이라는 허구 속에서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분노, 말할 수 없었던 상실감, 설명할 수 없었던 죄책감, 어린 시절의 공포,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았던 고통... 그 모든 감정은 이야기 속의 귀신이 대신 말해준다.


귀신이 나타나서 울면 사람들은 생각한다. '억울하게 죽었나봐.' '뭔가 한이 많았던 모양이야.'

이 생각들은 모두, 그 감정을 직접 말할 수 없었던 이들이 대신 만들어낸 은유다. 귀신이 울고, 탄원하고, 복수하는 이유는 그 감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신은 감정의 언어이며, 공포는 사회가 허용한 감정의 탈출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을 믿는다. 귀신이 있어야, 자신 안의 감정들이 유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귀신은 두려움이 아니라, 감정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11. 감정의 거울


사람들은 ‘귀신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죽은 자, 타자, 이질적인 무언가...

그러나 진짜 무서운 건 그 귀신이 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처녀귀신은 누구였는가? 가문의 일부로 살다, 미완의 존재로 남겨진 여성이다. 그녀는 억압된 여성성의 귀환이자, 순응하지 못한 자에 대한 사회의 두려움이다.


마녀는 누구였는가? 약초를 쓰고, 혼자 살며, 자기 목소리를 냈던 여자다. 그녀는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좀비는 누구인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은 상태로 움직이는 자. 그는 목적도 감정도 잃은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모두 각 사회가 감당하지 못했던 감정의 얼굴이다. 귀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귀신은 사회가 버린 감정의 조각들이다.


그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고, 끝나지 않았고, 표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밤마다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인간은 진짜 공포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 귀신이 결국 ‘내 안의 나’이기 때문이다.


귀신은 거울이다.

인간이 감당하지 못한 나의 일부,

내가 밀어낸 감정,

내가 부정한 기억,

내가 끝내 말하지 못한 슬픔이

귀신이라는 형상을 빌려 되돌아온다.

그래서 귀신은 타자가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는 나 자신이다.

인간이 진정 무서워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내가 외면한 나 자신의 감정이다.



공지입니다. 개인 사정으로 한 회(일요일) 쉬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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