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거울의 방에 갇히다

타인의 시선을 먹는 사람들

by Mind Thinker

공포의 본질 4편 6장.


6장. 몸, 거울의 방에 갇히다

― 타인의 시선을 먹는 사람들



1. 무대 위의 밥상


본래 식사란 하루 중 가장 평온하고 사적인 시간이어야 했다. 나의 고단한 몸을 음식으로 위로하고, 혀끝에 닿는 맛의 기쁨을 만끽하며, 마주 앉은 사람들과 다정한 눈빛을 나누는 충만의 시간. 그것이 식탁의 본질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 식탁의 평화는 깨어졌다. 이제 '먹는다'는 행위는 즐거움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 아래 수행되는 공연(Performance)으로 변질되었다. 식탁은 더 이상 휴식처가 아니다. 그곳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무대이자, 서로가 서로를 검열하는 거울의 방이 되었다.


현대의 인류는 식탁에 앉는 순간, 숟가락보다 스마트폰을 먼저 든다.


맛집의 식탁에 화려한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차려지면 맛을 보기 전에 '인증샷'부터 찍는다. 이때 접시 위에 담긴 음식은 내가 진정으로 먹고 싶은 것보다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달콤한 디저트 사진을 올리며 '스트레스 풀려!'라고 적지만, 실제로는 살이 찔까 봐 한 입만 먹고 남기는 모순이 감추어져 있다. 남성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닭가슴살과 고구마 사진을 올리며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식단관리 태그를 다는 것은, "나는 내 본능을 이만큼이나 통제할 수 있는 유능한 수컷이다"라고 사회에 제출하는 보고서와 같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또한 치열한 눈치 싸움의 장이다. 메뉴를 고르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세련되고 정제된 삶의 방식'을 증명하는 행위가 되었다. 동료들과 마라탕이나 떡볶이를 먹으러 가서도, 습관적으로 "난 양심상 제로 콜라 마실래"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는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야"라는 방어기제이자, 설탕이 든 음료를 마시는 타인을 향한 은근한 우월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반대로 혼자 샐러드 도시락을 싸 온 동료를 보며 "독하다"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의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과 나의 튀어나온 배를 비교하며 열등감을 삼킨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시선은 더욱 이중적이다. 잘 먹으면 "관리 안 하나 봐"라고 수군거리고, 음식을 가리면 "까다롭다"라고 비난한다. 이 딜레마 속에서 현대인은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시선'을 먹는다.


결국, 현대의 세련된 인류는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조차 내 위장이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해야 가장 세련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해 보일 음식'을 검색한다. 탕수육 소스를 붓느냐 찍느냐 하는 사소한 취향조차 "센스 있다" 혹은 "이기적이다"라는 인격 평가로 이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식탁에서 음식을 씹는 동시에, 자신을 향한 사회적 평가를 끊임없이 씹어 삼키고 있다. 맛을 음미해야 할 혀가 변명을 준비하느라 바쁘고, 서로를 바라봐야 할 눈은 상대의 칼로리를 계산하느라 바빠진 것이다. 식탁이 무대와 법정이 되어버린 세상,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소화불량의 진짜 원인이다.



2. 미디어의 이중 구속(Double Bind)


이러한 식탁이라는 무대를 기획하고 지휘하는 총연출가는 바로 미디어다. 현대 미디어와 자본주의는 대중에게 정신을 분열시키는 모순된 명령을 동시에 내린다. 심리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이를 ‘이중 구속(Double Bind)’ 상태라고 말한다.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화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먹방'과 '맛집 탐방'이 끊임없이 방영된다.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숨 쉴 겨를조차 없이 흡입하는 크리에이터를 미디어는 칭송한다. 치킨의 바삭거리는 파열음을 증폭하고, 라면과 짜장면을 씹지도 않고 터질 듯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미디어는 외친다. "먹어라! 욕망해라! 맛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생의 낭비다!" 이렇게 대식(大食)은 쾌락이고, 미식은 교양이며, 맛집 탐방은 가장 세련된 유희(遊戱)가 된다.


그러나 채널을 조금만 돌리면, 메시지는 180도 뒤집힌다. 체지방률 5%의 근육질 남성과 뼈가 보일 듯 마른 모델들이 등장하여 다이어트 보조제와 운동 기구를 선전한다. "관리하라! 절제하라! 뚱뚱한 몸은 자기 통제에 실패한 패배자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모순된 명령이다. "소비자로서 마음껏 탐식하라, 하지만 노동자로서 완벽한 몸을 유지하라." 식품과 패션 산업은 우리를 살찌우려 하고, 다이어트와 의료 산업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판다. 이렇게 자본의 산업들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공생하며 막대한 이익을 창출한다. 미디어가 부추긴 식욕을 따르면 '비만'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미디어가 요구하는 몸매를 따르려면 '식욕 억제'라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 모순 속에서 개인은 길을 잃는다. 먹고 싶은 욕망은 미디어가 주입했는데, 그 결과인 살은 오로지 개인이 책임져야 할 수치가 된다. 대중은 이 분열된 틈바구니에서 한 손에는 고칼로리 배달 음식을, 한 손에는 다이어트 약을 쥔 채 혼란스러워한다. 연출가의 큐사인이 매분 매초 모순되게 뒤집히니, 무대 위에 선 현대인은 언제나 연기를 망치는 배우가 될 수밖에 없다.



3. 내면의 판옵티콘


미셸 푸코는 근대 권력의 핵심을 '판옵티콘(Panopticon, 원형감옥)'으로 설명했다. 감시자가 중앙탑에 숨어 있으면, 죄수들은 감시자가 없어도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이 감시탑은 각자의 내면에 세워졌다.


이제 밖에서 "살 빼라"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은 굳이 필요 없다. 개개인 스스로가 가장 가혹한 교도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감시는 '객관적 데이터'라는 탈을 쓰고 수행된다. 우리는 자신의 배고픔이라는 감각보다 스마트워치가 알려주는 칼로리 소모량을 더 신뢰한다. "나는 배가 고픈가?"라고 묻는 대신, "내가 오늘 먹어도 되는 칼로리가 남았나?"라고 앱(App)에게 묻는다.


자신의 신체 감각을 불신하고 외부의 데이터에 의존하는 현상, 이것이 '신체의 데이터화(Quantified Self)'가 가져온 부작용이다. 남성은 근육량과 골격근량 수치에 집착하며 자신의 몸을 기계처럼 조립하려 하고, 여성은 체중계의 소수점 단위에 일희일비하며 자신의 가치를 측정한다.


식욕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라는 몸의 자연스러운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진압해야 할 '폭동'이자, 관리해야 할 '위험요소'다. "방금 먹었는데 왜 또 배가 고프지? 내 위장이 나를 속이고 있어." 우리는 자신의 몸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통제하고 정복해야 할 적으로 규정한다. 몸은 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내가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4. 표준화된 몸, 사라지는 개성


이 감시 시스템이 가진 가장 큰 폭력성은, 그것이 인간의 몸을 단 하나의 '표준 규격'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획일화된 신체를 원한다. 그리고 이 압박은 성별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가해진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여전히 가혹하다. 미디어는 '자기 관리'라는 미명 하에 늙지 않는 얼굴과 군살 없는 몸을 강요한다. 노화라는 자연스러운 섭리조차 '관리 소홀'이나 '게으름'으로 치부된다. 50대 여배우가 20대 같은 피부와 몸매를 유지할 때만 "아름답다"라고 찬양하는 사회에서, 평범한 여성들의 주름과 나잇살은 숨겨야 할 치부가 된다.


남성들 역시 '남성다움의 굴레(Man Box)'에 갇혀 있다. 남성을 재단하는 가장 큰 지표인 경제력에 더해, 이제는 몸까지 완벽해야 한다. 넓은 어깨, 갈라진 근육, 지치지 않는 체력은 유능한 수컷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최근 급증하는 남성들의 '근육 추형 장애(Bigorexia, 자신이 왜소하다고 믿는 강박)'는 여성들의 거식증만큼이나 심각하다. 그들은 근육이 줄어들까 봐 공포에 떨며 단백질 보충제를 물처럼 들이켠다.


심지어 아이들조차 이 감시에서 자유롭지 않다. SNS 필터 앱으로 보정된 얼굴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거울 속 자신의 진짜 얼굴을 어색해하고 혐오한다. '키 크는 주사', '성조숙증 치료'라는 이름의 의료적 개입은 아이들의 몸을 자연의 영역에서 공산품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다이어트(Diet)의 어원은 그리스어 'Diata'로, 본래 '삶의 방식'을 뜻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다이어트의 본질은 '자신의 고유성을 지우고 사회적 표준에 몸을 끼워 맞추는 규격화 작업'이 되었다. 표준 규격에 도달하지 못한 대다수의 현대인은, 마치 불량품이 된 것 같은 만성적인 패배감과 불안을 안고 오늘도 식탁에 앉는다.



5. 감시의 무대에서 내려와, 사랑의 식탁으로


감시받는 식탁, 획일화된 몸, 데이터로 환산된 식욕. 이 숨 막히는 거울의 방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더 완벽한 연기를 펼쳐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내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끝이 없는 소모전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대 위에서 내려와 나의 본래 자리인 식탁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내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차가운 ‘감시자’에서 따뜻한 ‘동반자’로 바꾸는 것이다.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몸은 나를 평가하는 시험지도, 남에게 전시하기 위한 조각품도 아니다. 몸은 곧 '나' 자신이다. 내가 먹는 것이 나의 피와 살이 되고, 내가 느끼는 맛이 나의 정서가 된다. 나의 몸은 평생 나를 지탱해 주고, 세상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하고 소중한 집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아이에게 아무 음식이나 먹이지 않듯, 나 자신에게도 가장 좋은 것을 대접하는 것. 그것이 진짜 '식사'의 본질이다.


우리는 다시, 연습해야 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음식을 고르는 법을. 배가 고프다는 것은 죄가 아니라, 내 생명이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정직한 외침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내 몸이 보내는 감사의 신호다.


즐거움을 되찾는다는 것은 쾌락에 빠져 정크푸드를 막무가내로 먹자는 뜻이 아니다. 내 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쓰레기를 내 몸에 넣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세심하게, 내 혀와 위장이 진정으로 원하고 편안해하는 음식을 고르게 된다. 스마트워치의 숫자나 칼로리 계산이 아니라, 음식이 주는 활력과 기쁨에 집중하게 된다.


몸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고,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이 좋은 음식을 먹고 다시 힘을 내자"라고 말을 건네는 따뜻한 보살핌의 시선을 갖는 것. 그렇게 내 몸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숟가락을 들 때, 비로소 식탁은 나를 평가하는 차가운 무대가 아니라, 나를 살리는 치유의 성소(聖所)가 될 것이다. 건강하고 멋진 삶은,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무대 위가 아니라,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식탁 앞에서 시작된다.



keyword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