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시계
우리는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공포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해석’이라고 정의했다. 이 명제가 가장 극명하게 증명되는 순간이 바로 유령을 마주할 때다.
유령은 말이 없다. 그들은 그저 서 있거나, 우리를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유령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들에게서 비난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죽었는데 너는 살아 있구나.', '나는 차가운 물속에 있는데, 너는 따뜻한 밥을 먹는구나.'...
이 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유령은 말을 할 수 없다. 그 소리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죽은 자의 입을 빌려 터져 나오는, 일종의 심리적 복화술이다. 내면의 억압된 감정이 소리로 변형되어 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자 죄책감(Survivor's Guilt)’은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운이 아닌 부당한 특혜로 인식할 때 발생한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균형(Justice)을 원하기에 이 부당함을 상쇄해 줄 처벌을 갈구한다. 하지만 현실의 법정은 무고한 생존자를 처벌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는 무죄이나 심리적으로는 유죄인 이 모순 속에서, 무의식은 나를 단죄할 가상의 처벌자를 소환한다. 그것이 유령이다. 즉, 유령의 비난은 타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선고하는 유죄 판결문인 것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식탁이 육체적 욕망(식욕, 살)을 심판하는 법정임을 보았다. 현대인은 칼로리를 계산하며 자신의 몸을 피고석에 세운다. 그러나 유령이 자주 나타나는 적막한 침실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양심의 법정’이다. 식탁의 법정이 “너는 왜 절제하지 못하고 이렇게 많이 먹었니?”를 묻는다면, 유령의 법정은 “네가 감히 살아남아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니?”를 묻는다.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네가 죽어갈 때 나는 편안하게 있었다는 죄책감, 심지어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허기를 느끼는 자신의 비루한 동물적 본능에 대한 혐오감...
이 끈적하고 모순적인 감정의 파편들이 응고되어, 비로소 인간의 형상을 띠고 침대 머리맡에 서는 것이다. 이것이 유령이 낯선 타인의 얼굴을 하지 않는 이유다. 유령은 언제나 가장 가까웠던 사람, 가장 사랑했거나 가장 미안한 마음을 품었던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멀리 있는 타인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죄책감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지나가는 행인은 나에게 청구할 ‘감정의 빚'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했던 자만이, 남겨진 자의 영혼에 대해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갖는 것이다.
유령은 산 자의 부채감이 빚어낸 영원한 채권자다. 하지만 이 빚은 일상의 경제적 채무와는 본질이 다르다. 자본은 갚으면 소멸하지만, 죽음으로 발생한 감정의 부채는 갚을 길이 없다. 채권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싶어도 들어줄 귀가 없고, 속죄의 밥을 대접하고 싶어도 맞은편 의자는 비어 있다. 이 ‘상환 불가능성’이야말로 유령을 영원불멸의 공포로 만드는 핵심 동력이다.
갚을 수 없기에,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빚을 청산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관계를 종결할 수 없다. 이때 무의식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속삭임을 건넨다. '그를 잊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행위다. 그러니 기억하라. 설령 그것이 끔찍한 공포와 고통일지라도.'
이것은 지독하게 역설적인 집착이다. 사람들은 유령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도망치려 하지만, 사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는 유령마저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 그를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유령이라도 보여야 그가 아직 내 곁에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더라도 그를 붙잡고 있어야만, 내가 그에게 덜 미안할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유령은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산 자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가혹한 형벌이자, 고통이라는 끈을 통해서라도 죽은 자와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슬픈 몸부림이다.
21세기, 유령은 ‘데이터(Data)’라는 새로운 육체를 획득했다. 과거의 유령이 구천(九泉)을 떠돌았다면, 현대의 유령은 차가운 ‘서버(Server)’를 부유한다. 이것은 유령의 존재론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자, 인류가 마주한 섬뜩한 현대적 공포의 시작이다.
전통적인 유령의 거처는 인간의 시냅스, 즉 ‘기억’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생물학적 기억은 불완전하다. 시간이라는 풍화 작용 앞에서 시냅스의 연결은 헐거워지고, 얼굴은 흐릿해지며, 목소리는 끝내 잊힌다. 이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망각의 축복’이다. 이 자연스러운 소멸이야말로 죽음의 날카로운 충격을 무디게 만들고, 산 자를 다시 일상으로 복귀시키는 유일한 치유제였다.
하지만 디지털 유령은 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 0과 1로 이루어진 비트(Bit)의 세계에는 현실의 엔트로피(Entropy)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저장된다. 그곳의 유령은 늙지도, 흐려지지도, 심지어 두 번 다시 죽지도 않는다.
죽은 친구의 SNS 프로필에는 여전히 '오늘 생일입니다, 축하해 주세요'라는 경쾌한 알림이 뜬다. 10년 전에 떠난 연인의 사진은 단 하나의 픽셀도 깨지지 않은 채, 영원한 고해상도의 미소로 남아 있다. 더 잔인한 것은 시스템이다. ‘죽음’을 학습하지 못한 알고리즘은 “이 추억을 기억하시나요?”라며, 예고도 없이 죽은 자의 가장 생생한 순간을 산 자의 스마트폰 화면 위로 기습적으로 소환한다.
이 현상이 공포를 유발하는 이유는, 알고리즘에게 죽음이라는 값이 입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차가운 수식의 세계는 오직 ‘참여'와 ‘연결 빈도’만을 계산할 뿐, 유저의 생물학적 생사 여부는 변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때문에 계정이 삭제되지 않는 한, 시스템은 망자를 여전히 ‘활동 가능한 사용자’로 인식하여 끊임없이 산 자의 시간 위로 소환한다.
이때, 산 자의 뇌에서는 심각한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이성적 뇌(전두엽)는 '그는 죽었다'라고 알고 있는데, 감각적 뇌(시각 피질)는 '그는 지금 내 눈앞에서 웃고 있다'는 상반된 정보를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신호 처리는 일종의 사회적 환상통을 유발한다. 팔이 절단된 환자가 허공에서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데이터로 완벽하게 복원된 망자를 보며 뇌는 부재를 인정하는 데 실패하고 신경학적 혼란에 빠진다. 정상적인 애도라면 죽은 자를 ‘과거의 기억’으로 분류하고 저장해야 하는데, 화면 속의 그는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망각을 불허하고 애도의 마침표를 지워버리는, 잔인하고도 강력한 ‘디지털 방부제’다.
더 나아가 AI 기술은 이 공포를 기술적 특이점으로 밀어 올렸다. 죽은 자의 말과 음성을 딥러닝(Deep Learning)으로 학습하여 생전과 똑같은 말투로 대화하는 챗봇, 이른바 그리프봇(Griefbot)의 등장이다.
이것은 앞서 다룬 좀비와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는 괴물이다. 좀비가 ‘영혼이 소거된 육체의 과잉’이라면, 그리프봇은 ‘육체가 소거된 패턴의 과잉’이다. “잘 지내? 나는 여기에서 잘 있어.” 죽은 아빠의 데이터를 합성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올 때, 우리는 이 기술적 부활을 축복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저주라 불러야 할까?
분명한 것은 이 기술이 생물학적 죽음을 삭제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마침표여야 한다. 하지만 가상 세계는 죽음을 산 자의 시간에 섞여 들어오는 잡음(Noise)으로 만든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야 하는데, 데이터는 끊임없이 말을 건다.
이것은 소화불량을 넘어선 배설되지 않는 기억의 변비 상태다. 배설하지 못한 찌꺼기는 독소가 되어 산 자의 정신을 서서히 오염시킨다. 현대인은 이제 밤마다 문을 두드리는 유령이 아니라, 죽어서도 영원히 ‘로그아웃’ 되지 않는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다.
결국 유령은 외부에서 침입한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고장 난 시간’이 빚어낸 병리적 결과물이다. 과거가 과거로 흘러가지 못하고 현재로 역류하여, 미래로 향하는 혈관을 막아버리는 ‘시간의 동맥경화’ 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령을 없애는 처방은 주술적인 퇴마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망가진 시간을 수리해야 한다. 멈춰버린 마음의 시계를 고쳐, 다시 현재의 시간 속에 흐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앞 장에서 육체의 건강이 ‘원활한 배설’에 달려있음을 확인했듯, 정신적 건강을 지키는 열쇠는 ‘잘 기억하고 잘 잊는 것’이다. 애도는 단순한 슬픔의 전시가 아니라 정신의 찌꺼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신성한 배설 행위여야 한다.
눈물을 쏟아내고, 소리 내어 울고, 유해를 태워 한 줌의 재로 만드는 의식은 모두 내면에 고인 죽음의 독소를 체외로 배출하는 필수적인 해독 과정이다. 결국 유령이란, 우리가 이 자연스러운 배설을 억지로 참거나, 혹은 디지털 기술이 이 배설을 강제로 막아버렸을 때 피어오르는 독소가 만든 환영이다.
따라서 유령을 없애는 진정한 퇴마사는 무당이나 성직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어야 한다. 유령은 내 마음의 죄책감 먹고 자란다. 그렇다면 유령을 없애는 방법은 단 하나, 그 부채감을 청산하는 것뿐이다. 그들을 떠나보내는 유일한 의식은 부적을 붙이거나 굿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법정에서 스스로에게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겠어.'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단호히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정한 결별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고통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진정한 사랑의 선언이다.
기억하되 붙잡고 매달리지 않는 것. 슬퍼하되 죄책감에 잠식당하지 않는 것. 그리움에 그의 사진을 보며 울더라도, 결국엔 스마트폰의 화면을 끄고 따뜻한 밥을 먹는 것. 그것이야말로 죽은 자를 위한 최고의 예의이자, 산 자가 유령의 숲을 빠져나오는 유일한 출구다.
죽은 자에게는 말이 없다. 그들은 이제 영원한 침묵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들리는 유령의 목소리가 사실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나 자신의 비명소리였음을 깨닫기 전까지, 이 공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의 비명을 멈추고, 그들에게 침묵을 선사하자. 그때 비로소 유령은 사라지고, 멈춰버린 당신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