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된 존재들 3편 3장
인간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가 주체적으로' 느끼는 신체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눈물이 흐르면 슬픔이 생기고,
심장이 뛰고 혈압이 오르면 분노나 사랑을 느끼고,
입꼬리가 올라가면 기쁨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뇌는 감정을 순수하게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내는 것인가?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감정은 만들어진 것이다(How Emotions Are Made)>에서 감정은 단순히 감각의 반응이 아니라, 해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감정은 뇌가 과거의 경험, 언어적 기억, 문화적 코드를 참조하여 구성한 인지적 조합물이라는 것이다.
가슴이 뛰는 것은 단순한 생리 반응이다. 그러나 뇌는 그 반응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뇌는 '이 두근거림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스스로 답한다.
'설렘이야. 아니야, 이건 불안이야. 혹시 위험 신호 아닐까? 어쩌면 사랑이 시작된 거야.'
이 판단은 순수한 감각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배운 감정의 이름들이며, 사회가 감정에 부여한 의미 체계의 자동 변환이다. 즉, 감정은 ‘느낀 것’이 아니라 ‘느껴진 것’이다.
뇌는 생리적 신호와 주변 상황을 조합하고, 거기에 기억과 언어로 구축된 ‘감정 모델’을 덧씌운다. 이 과정을 통해 감정은 감각이 아니라 인지적 추론, 즉 학습된 예측의 산물이 된다. 감정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구성된 스토리다.
우리들은 종종 “나 지금 슬퍼”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 감정은, 내가 과거에 유사한 상황에서 느꼈던 기억, 사회가 그것을 슬픔이라 가르쳤던 언어의 틀, 문화가 그 감정에 허용한 표현의 방식, 그리고 그것을 슬픔이라고 말함으로써 느낄 수 있게 된 내면화된 판단의 결과다.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명명되었는가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감정은 '신체 상태 + 해석'의 조합이다.
두근거림은 순수하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문화적 경험, 언어적 학습, 그리고 반복된 문화적 내면화 안에서 정의된 결과다.
이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감정은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해석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
감정은 진실보다 익숙함을 따른다는 것.
감정은 언어와 문화의 틀 안에서 형성된다는 것.
그렇게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해석하며 살아간다는 것...
뇌는 미지의 '그것'을 위협으로 간주한다.
인간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 하는 존재다. 이는 단지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 신경적 작동 원리다. 뇌는 예측 가능한 감각에는 안정을 느끼고, 정의되지 않은 자극에는 즉각적인 경계 반응을 일으킨다. 그 경계는 때로 공포가 되고, 때로 불쾌감이 되며, 회피라는 형태로 반응한다.
뇌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정의되지 않은, 이름이 없는, 모호한' 감각이다. 그것들은 뇌가 정리하지 못한 것, 범주에 넣지 못한 것, 과거의 기억에 대입할 수 없는 것들이다. 뇌는 그것을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호’로 간주하며, 이내 그 모호함을 위협으로 처리한다.
이럴 때 뇌는 자동적으로 해석을 생성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불안정하고, 어딘가 거슬리고, 피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과 같은 신경 반응은 판단이 아니라 반사에 가깝다. 그리고 이 반사가 쌓이면, 그것은 개인의 성향이 되고, 사회적 태도가 되며, 구조화된 차별과 편견의 기반이 된다.
그 결과, 사회적 언어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사람들, 즉 정신질환자,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낯선 외국인, 비정형적 외모와 행동을 가진 사람들...은 뇌가 처리하지 못한 감각의 잔여물로 남게 된다. 이들은 규범적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뇌에게 불쾌하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이 반응은 도덕의 실패가 아닌, 인지 구조의 자동성 때문이다.
뇌는 위험한 존재를 구분하기 위해 발달해 왔으며, ‘정의되지 않은 것’을 본능적으로 회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즉, 편견은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이름 없는 감각에 대한 뇌의 에너지 절약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는 말로 배운 존재가 아니라, 뇌가 이해하지 못한 존재다.>
뇌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지 못할 때, 그 존재는 안전한 타자가 아닌 불안정한 객체, 즉 통제 밖에 있는 변수로 전락한다. 그래서 인간은 ‘타자’를 몰라서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배제한다.
이러한 인지적 회피 구조는 인간의 윤리 감각과 충돌한다. 현대의 인간은 어떤 존재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뇌는 그 존재를 해석할 언어를 갖지 못했을 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밀어낸다. 그리고 그 밀어냄은 곧 사회적 구조 속에서 차별과 배제라는 형태로 제도화된다.
감정은 순수하지 않다.
감정은 정리되지 않은, 완벽하게 정리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뇌가 만든 방어적 해석이다. 그리고 그 해석이 곧 누군가를 타자로 만드는 구조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까지 함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규정된 존재들> 1권은 인간이 얼마나 익숙한 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말들이 어떻게 나를 규정하고 고착시켜 왔는지를 돌아보는 여정이었습니다.
이 책이, 잠시라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하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2권에서는 그 말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누가 처음으로 타인을 규정했고, 왜 그 말은 법이 되었으며, 신과 왕은 어떻게
‘존재 위의 존재’가 되었는가를 묻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말은 곧 권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나누고, 침묵시키고 있습니다.
<규정된 존재들> 2권 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