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된 존재들 2편 3장
언어는 대상을 지칭한다. 그러나 언어는 동시에 선을 긋는다.
‘우리 부족’, ‘우리 아이들’, ‘우리 조상’이라는 말에는 항상 ‘우리가 아닌 모든 것’에 대한 배제의 선언이 포함되어 있다. 언어는 단지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누가 안쪽이며 누가 바깥인가를 결정짓는 구획의 장치다.
초기 인류는 자신과 다른 무리를 만났을 때, 말이 다르거나, 피부색이 다르거나, 습성이 다른 자들과 마주했을 때, 그들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위협으로 인식된 타자는 결국 언어적으로 규정된다.
"그들은 야만적이다, 그들은 불결하다, 그들은 신을 모른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이러한 규정은 단지 판단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를 결속시키기 위한 언어적 장치다.
타자를 구별하고 열등하게 규정할수록, ‘우리’는 더 순결하고, 더 정당하고, 더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즉, 타자 규정은 외부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를 안심시키는 행위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전략일 뿐 아니라, 내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정체성의 심리적 기획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말은 따뜻하다. 공감, 소속, 연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다. 하지만 동시에 '가름과 분리'를 함축하고 있다.
누가 ‘우리’인가?
그리고, 누가 ‘우리’가 아닌가?
이것은 철저한 정치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범주는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어떤 기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초기 부족사회에서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을 말하며, 같은 방식으로 음식을 먹고, 같은 의례를 반복하는 자들이었다. 이 공유의 조건에서 벗어나는 자는 즉시 낯선 자, 질서 바깥의 존재, ‘우리 아닌 자’로 간주되었다. 즉, ‘우리’는 자연스러운 공감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적 규정의 결과물이었다.
공동체는 항상 자신의 언어와 질서에 맞는 자들만을 ‘우리’라고 부른다.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질서에 순응하지 않거나, 그 믿음에 의심을 품는 자는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배제되거나, 혹은 ‘적’으로 명명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폐쇄된 클럽이다. 그 클럽의 문은 스스로 열리지 않는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자는 기득권자이며, 중심에 있는 자들이다. 그 문을 두드리는 자는 언제나 바깥의 자, 입증을 요구받는 자, 증명되지 않은 자다.
결국, ‘우리’라는 말은 포용의 언어가 아니라, 권력의 언어다.
말하는 순간, 그 언어는 경계선을 긋고, 자격을 묻고, 존재를 심판한다.
프로이트는 ‘ 자아는 스스로 완성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자아는 언제나 타인을 통해, 타인을 향해, 타인을 경유하며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모방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거부하면서 ‘나’를 구성한다. 이 과정을 그는 동일시(identification)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동일시에는 반드시 ‘나 아닌 자’, 즉 대상(other)이 필요하다. 그 대상은 때로는 이상적 모델이 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거울로 더 자주 등장한다.
"나는 저들과 달라, 나는 저렇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아. "
이처럼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형성되는 자아는, 자기 정체성의 확신을 외부의 배제를 통해 획득한다.
그런데 이 구조는 단지 개인 심리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집단 심리의 원형이 되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이질적인 자’, ‘이해할 수 없는 자’, ‘비정상적인 자’를 설정함으로써
‘정상적인 우리’, ‘건강한 우리’, ‘합리적인 우리’라는 정체성을 더 굳건히 믿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 사회가 타자를 단지 낯선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신화적, 상징적 대립 구조로 조직되어 왔다고 보았다.
부족 사회는 외부자를 ‘짐승 vs 인간’, ‘혼돈 vs 질서’, ‘금기 vs 신성’의 구조 속에 배치한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틀은 문화가 타자를 무질서한 존재, 즉 ‘우리가 아닌 자’로 명확히 구획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적 장치다.
이때 타자는 존재 그 자체로 위협이기보다는, 공동체가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설정한 경계 밖의 존재다. 즉, 인간은 자신을 ‘우리’라고 말하기 위해, 누군가를 ‘그들’로 설정해야만 하는 구조 속에 존재해 온 것이다. 그래서 타자를 위협으로 해석하고, 오해하고, 배제한다.
이것이 원시부터 인류가 구축해 온 타자화의 초석이다. 즉, 인간은 정체성을 위해 외부의 타자를 심리적으로 부정하고, 문화적으로 구별하며, 사회적으로 침묵시키는 존재로 진화해 왔다.
인간의 뇌는 타인을 볼 때 자동적으로 범주화한다. 특히 익숙한 얼굴은 편안함과 친밀감을 유도하지만, 낯선 얼굴은 위험 반응을 유발한다.
자주 보는 얼굴은 편도체의 경고 반응을 덜 자극하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는 신경계에 불확실성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는 뇌가 생존을 위해 낯선 정보를 빠르게 위험으로 간주하는 최소 에너지 전략을 선택해 온 결과다.
그러나 이 전략은 현대 사회에서 편견, 고정관념, 혐오의 무의식적 토대가 된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은 존재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그 위협을 제거하거나 제어하기 위해 ‘이름 붙이기’, ‘설명하기’,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즉, 뇌는 배제를 먼저 감지하고, 수용은 훈련을 통해 배워야 하는 감각인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공동체는 언제나 내부의 갈등과 긴장을 외부의 타자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결속된 정체성으로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내부의 문제를 외부의 존재로 전가하는 것이다. 그 외부의 존재가 바로 희생양이다.
초기 부족사회에서 흉작이 들거나, 질병이 퍼지거나, 지도자가 흔들릴 때, 공동체는 그 원인을 공통의 외부자에게 돌렸다. 그 외부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낯선 자: 언어, 외모, 습성이 다르다.
의례에서 벗어난 자: 기존의 신화나 종교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자: 불확실성과 불안을 상징한다.
이 희생양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자가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로 질서를 복원하기 위한 도구였다. 희생양을 처벌하거나 추방함으로써, 공동체는 일종의 정화 의례를 경험하며, 자신들이 ‘옳고 하나 된 존재’라는 착각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규정의 형태다.
즉, 외부의 존재를 악으로 명명하고, 해석 불가능한 자를 제거함으로써 공동체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희생양은 단순히 억울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숨기고 싶은 균열을 봉합하는 장치이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언어적 폭력과 문화적 서사로 정당화된다.
결국,
공동체는 언제나 ‘그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필요는 공포, 불안, 결속의 이름으로 은폐된다.
타자화는 단지 본능적 반응이 아니라, 문화적 서사로 조직된 정당화 전략이었다.
문명은 언제나 타자를 상상하고 해석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자주 신화적 언어와 종교적 상징을 통해 악마화되었다.
메소포타미아 – 짐승의 얼굴을 한 외부인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조들은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을 중심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공통적으로 자기 외부의 존재를 동물적 존재로 묘사하는 전통을 유지했다.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주변 이민족은 종종 네 발로 기는 존재, 털로 덮인 몸, 말을 하지 못하는 자로 표현되었고, 그들을 도시문명의 적, 신의 질서에 저항하는 혼돈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이는 문명(도시, 신전, 문자)을 보유한 자신들과는 대조되는, ‘해석 불가능한 타자’를 동물로 치환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형상화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함께, 침입과 정복의 정당화 장치로 작했다. 짐승은 잡아야 할 존재이지, 대화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 말할 수 없는 자, 수드라
인도 힌두교의 베다 경전은 계급 질서를 ‘자연의 질서’로 신성화했다.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야(전사), 바이샤(상인)는 신의 몸에서 각각 입, 팔, 허벅지로 창조되었다고 서술되지만, 수드라(하층 노동자)는 ‘발’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럽고, 언급조차 꺼려야 할 것으로 규정되었다.
일부 베다 문헌과 다르마 경전에는 수드라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수드라는 경전을 읽을 자격이 없으며, 듣는 것조차 죄악이다. 그가 성스러운 말을 입 밖에 낼 경우, 혀를 잘라야 한다.”
이는 단순한 신분차별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구조적 위계화였다.
이처럼 언어권 밖으로 밀어낸 타자는, 철저히 침묵 속에서만 생존을 허용받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인도의 타자화 구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수드라보다 아래, ‘카스트 바깥’에 위치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 달리트(Dalit,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은 신의 몸 어디에서도 유래하지 않은 자들, 언급되지 않은 자, 곧 존재조차 설명되지 않은 자로 간주된다.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접촉이 금지된 존재였고, 말할 권리뿐 아니라 존재의 자리 자체를 배제당한 타자였다.
이집트 – 혼돈의 화신으로서 이민족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신의 대리자이며, 마아트(Maat, 질서)의 수호자였다.
여기서 질서의 반대는 곧 이민족, 즉 타자였다. 이민족은 ‘세트(혼돈과 파괴의 신)’의 자손으로 묘사되었고, 국경 바깥에서 몰려오는 자들은 질서의 파괴하는 자들로 상징화되었다.
이집트의 사원 벽화에는 전쟁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거기서 타자는 과장된 표정, 일그러진 비율, 흉측한 신체를 가진 자로 그려졌다. 그들은 말로 설득하거나 규칙으로 다스릴 수 없는 존재다. 오직 정복하고 지배해야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존재로 상정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러한 형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를 종교적이고 우주론적인 정당성으로 포장했다.
타자를 악마화함으로써, 파라오의 힘은 곧 신의 힘이 되었고, 그 지배는 혼돈을 통제하는 고귀한 의무로 전환되었다.
고대 한국– 문명과 야만의 구획
삼국시대 이전의 삼한 시대와 삼국 통일기에는, 각 세력이 서로를 정복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타자를 ‘미개’로 명명하는 서사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패역의 무리’로 그렸고, 고구려는 남방을 ‘말과 글이 통하지 않는 야만의 땅’이라 묘사했다. 심지어 통일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질서를 세운 문명’이라는 구도를 강조하면서, 나머지 지역들을 재교육되어야 할 미성숙한 존재들로 처리했다.
이러한 서사는 민족 내부에서조차 문화적 타자화가 어떻게 자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우리 민족’이라는 표현의 이면에도 사실은 "누구는 더 문명적이고, 누구는 덜 인간답다"는 위계적 타자 인식이 스며 있었다.
이처럼 고대의 문명들은 모두 타자를 단순한 이질적 존재가 아니라, 질서의 적, 악마의 대리인, 언급하지 말아야 할 존재로 재현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재현은 서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서사는 중립적인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라는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타자의 존재를 조직하는 언어적 전략이다. 타자를 배척하고 악마화함으로써, 문명은 자기 자신을 ‘질서의 중심’, ‘정의의 화신’, ‘우주의 설계자’로 세울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타자화의 문화적 완성이었다.
존재를 왜곡된 형태로 규정하고, 이해라는 이름으로 배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명이 발전시킨 정교한 기술이었다.
이렇게
인류는 ‘우리’를 만들기 위해, ‘그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들’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규정의 언어를 발명했다.
그 언어는 문명을 세웠고, 법을 제정했고, 역사를 서술했지만,
때로는 타자를 누르는 말이 되어 차별과 학대와 전쟁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